SERMONS
말씀
- 나사로야 나오너라요한복음 11:17-44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유족들과 그들을 찾아온 사람들이 통곡하는 모습을 보고 예수님께서도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죽음이 인간에게 안겨주는 슬픔과 절망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예수님 자신마저도 눈물 없이는 그것을 지켜볼 수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우리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기에 사랑하는 자를 죽음에 빼앗기고 슬퍼하며 고통하는 그 사람들의 마음을 고스란히 받으셨고, 그들과 똑같은 심정을 느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이 겪는 이 죽음의 공포와 슬픔을 놓고 눈물을 흘리실 뿐 아니라 마음으로 분노하고 우리의 모든 아픈 감정을 함께 나누신 하나님으로 지금 서 계시는 것입니다. 사망의 권세를 이김 그러나 주님이 흘리신 눈물은 패배와 절망의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자신을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선언하셨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사실을 믿는 자는 죽어도 다시 살아날 것이며, 아직 죽지 않고 믿는 자들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고 계십니다. 다시 말해서 믿는 자들에게는 육신의 죽음이 진정한 죽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음의 영역에서 이미 해방되었기 때문에 죽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심으로써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임을 실제적으로 증명하셨으며, 며칠 후에 그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실 것을 미리 예고하셨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세상 끝날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하늘의 별과 같이 무수한 성도들이 천사의 나팔소리를 듣고 무덤에서 일어날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멀리 있는 진리는 믿지만 예수님께서 울고 있는 마르다에게 “네 오라버니가 살아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자 그는 이 말을 대뜸 이렇게 받았습니다.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리실 줄을 내가 아나이다.”(24절) 그는 마지막 부활을 믿고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멀리 있는 진리는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네 오라버니가 살아날 것이다.”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지만 그 가까이 있는 말씀은 믿지 못했습니다. 당장 적용되어 그 결과가 눈앞에 드러나야 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믿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도 현실 문제에 부딪치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어도 쉽게 은혜를 받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죽음에 대해서도 세상 사람들처럼 죽음에 대한 본능적인 반응만을 보입니다. 믿음의 반응이 본능의 반응에 삼킨 바가 되는 것입니다. 날마다 죽지만 날마다 부활하는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고전 15:31)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날마다 죽는다.” 하는 말은 “내가 날마다 산다. 날마다 부활하고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매일 죽음의 위기를 당하지만 그때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이 주시는 능력을 체험하면서 산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먼 훗날 부활할 것이라는 믿음만을 가지고는 날마다 죽어야 되는 이 세상 현실에서 다시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죽어야 되는 이 세상에서 날마다 부활하는 능력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이 내 안에 살아계시며 역사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기에 앞서 돌을 옮겨놓도록 명령하셨습니다. 당신의 심령을 무덤처럼 만드는 돌은 무엇입니까? 그 돌을 빨리 옮기고 부활의 예수님과 함께 하는 인생을 사십시오. 그러면, 날마다 죽지만 동시에 날마다 사는 부활의 능력이 당신의 삶에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 예수님의 사랑이 의심될 때요한복음 11:1-16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세 남매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집안의 기둥인 오빠 나사로가 병석에 드러눕게 되었습니다. 그의 누이동생들은 급하게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에게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음을 전하고, 애타게 기다렸지만 주님은 며칠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으셨고 결국은 오빠가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틀림없이 의심이 생겨났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믿었던 만큼 그들의 마음에는 더 커다란 시험이 찾아왔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처럼 주님의 사랑을 의심할 만한 신앙의 위기가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어떤 경우에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위험과 시험에 빠질 수 있는지 함께 살펴보기를 바랍니다. 갑작스러운 불행 우리는 나사로처럼 갑작스런 불행을 당할 때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기 쉽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나사로가 병들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되는 갑작스런 불행 앞에서 그들의 믿음이 흔들리고, 예수님의 사랑을 의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시험이 어찌 나사로 집안에만 불어 닥치겠습니까? 우리 역시 그런 시험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사로 삼 남매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매우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하지 않는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때에 조용히 마음의 귀를 기울여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고 내가 영광 받기 위한 것인 줄 네가 믿기 바란다.”고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지체되는 응답 둘째로, 응답이 지체될 때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기 쉽습니다. 나사로는 마침내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장례식도 치렀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이럴 때 마리아와 마르다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예수님이 정말 우리를 사랑한다면 이럴 수 있을까?’ 분명 마음속에 이런 의심이 자리 잡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와 마르다는 오늘 우리에게 또 한 가지 값진 메시지를 말해줍니다. 아무리 응답이 늦어도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의심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기다릴 줄 아는 것,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려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주님은 “주를 기다리는 모든 사람은 복되다.”(사 30: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다릴 줄 아는 것,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약속이 의심될 때 마지막으로, 붙잡고 있던 주님의 말씀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느껴질 때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의지한 말씀이 우리에게 어떤 실제적인 효과나 응답을 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절대 그 말씀을 의심하면 안 됩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어떤 도움을 받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또 어떤 면에서 믿었던 말씀 때문에 실망했다 할지라도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25, 26절 말씀대로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 때문에 실망하지 않을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나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이 하셨던 말씀은 영원토록 진리입니다. 비록 우리의 생각으로는, 실제적인 문제에 대해 구체적인 대답이 되지 않을 때에라도, 그 말씀은 진리입니다.
- 영생을 주시는 예수님요한복음 10:22-42본문에서 예수님은 세상에서 가장 큰 선물을 우리에게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영원히 사는 생명을 우리에게 주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28절) ‘저희’를 ‘우리’로 바꿔서 읽어보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에 이것보다 더 놀라운 복음 중의 복음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영생이란 무엇인가 영생이란 무엇입니까? 영생이란 말 그대로 영원히 사는 생명을 말합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을 기록하면서 ‘생명’과 ‘영생’, 이 두 단어를 별로 구분하지 않고 사용했습니다. 하나님에게 진정한 생명은 영원히 사는 생명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육신의 생명을 ‘생명’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안개에 지나지 않습니다.”(약 4:14) 그렇습니다. 아침에 잠시 생겼다가 햇살과 더불어 스러지는 안개에 불과한 것이 우리 육신의 생명입니다. 장차 하늘에서 누릴 영생에 비하면 생명이라고 할 수도 없는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생명’이라는 말을 ‘영생’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영생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 영생은 인생의 성패를 좌우합니다. 이 영생은 우리 인생의 마지막을 행복하게 끝나게 하느냐 아니면 정말 비극적인 종말로 끝나게 하느냐를 판가름하는 중요한 변수가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믿기만 하면 값없이 영생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믿기만 하면 그 영생이 내 것으로 되는 줄 믿으십시오. 그런데 만약 가격표를 붙여서 우리에게 사라고 한다면, 우리 가운데 영생을 살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영생은 너무나 고귀하고 엄청난 가치를 가진 것이기 때문에 값으로 따질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우리가 믿기만 하면 영생을 거저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 숨 막히는 세상에서 웃을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계시는 분이 있다면 꼭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믿음과 의심 또 한 가지 우리가 생각해볼 것이 있습니다. 영생의 확신에 관한 문제입니다. 겉으로 보아서는 분명 믿는 사람인데 영생을 확신하지 못하고 흔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영생을 받았나 안 받았나? 정말 내가 영생할 수 있을까?’ 하고 흔들리기 때문에, 오늘 우리에게 주신 이런 영광스런 복음을 보고도 마음에 감격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나 그 신실하심을 의심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그만큼 믿지 못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요, 또 어느 누구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가지 못할 것이다.”(28절)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 말씀을 마음에 담고 내게 영생이 주어진 것을 평생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떤 형편에서든지 ‘나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나는 영원히 산다. 나는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마음에 명심하고, 믿음으로 고백하고 찬송하면서 세상을 능력 있게 사시기 바랍니다.
- 선한 목자 예수님요한복음 10:11-29사람을 바로 알기 위해서 ‘그가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함께 ‘그가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사람의 인품이나 성격 등과 같은 인물의 됨됨이가 어떠한가를 묻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물론이거니와 ‘그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실 때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분인가를 함께 말씀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첫 구절에서 예수님은 ‘말씀’으로 소개되었고, ‘빛’ ‘생명’으로 소개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예수님은 자신이 어떤 분인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자기 생명보다 양들을 더 사랑하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하신 첫 번째 이유는 양들을 자기 생명보다 더 사랑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다.”(11절) 자기 생명보다 양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이 선한 목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삯꾼 목자는 돈을 보고 일하기 때문에 진정으로 양떼를 위하는 사람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삯꾼 목자는 좋지 못한 목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선한 목자’ 즉 ‘좋은 목자’이십니다. 양들을 위해서 일하는 진실한 목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의무적인 사랑이 아니라,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입니다. 주님은 그 사랑을 십자가에서만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우리를 자기 생명보다 더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양들을 잘 아시기에 예수님이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시는 두 번째 이유는 양들을 너무나 잘 아시는 목자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내 양을 알고, 내 양은 나를 안다.”(14절) 여기에서 ‘안다’는 말은 양이 몇 마리인지 아는 정도의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안다’고 하실 때는 양들의 상황을 속속들이 이해하고 동정해 준다는 말입니다. 제 것을 다 챙겨서 아버지를 떠나 먼 지방으로 가서, 거기에서 방탕하게 살면서 그 재산을 낭비한 아들이라 할지라도, 그가 집에 돌아왔을 때에 그가 아직도 먼 거리에 있는데, 그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서,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좋은 옷을 꺼내서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가 잡아서 기쁨의 잔치를 벌이는 것, 이것이 바로 선한 목자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아시는 것처럼 그렇다면 예수님은 우리의 처지를 얼마나 깊이 알고 계실까요? 14-15절을 보십시오. 말로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매우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내 양을 알고, 내 양은 나를 안다. 그것은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예수님이 우리를 아시는 것을, 하나님이 예수님을 아시는 것에 비유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아시는 것은 예수님도 다 아시고, 예수님이 아시는 것은 하나님도 다 아십니다. 완벽하게 상호 지식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마치 하나님이 예수님을 아는 것처럼 세밀하고 정확하게 우리의 깊은 데까지 다 알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나를 알아주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나를 진정으로 이해해 줄 수 있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 양의 문이 되신 예수님요한복음 10:1-10예수님 당시, 목자들은 하루 종일 양에게 풀을 뜯기다가 저녁이 되면 자기 양들을 몰고 우리로 옵니다. 대부분의 목자들은 양들을 여러 가정이 공동으로 만든 우리 속에 둡니다. 아침이 되면 목자들은 하나둘 나와서 문지기의 확인을 받고 우리 안에 들어가서 자기 양을 부릅니다. 목자들이 자기 양들만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를 내면, 양들은 그 소리를 알아듣고 그 목자 앞으로 나온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배경을 알면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양의 문에 비유하신 뜻이 무엇인지 짐작하기가 쉽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왜 예수님이 자기를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셨는가를 깊이 깨닫고 그 은혜를 다시 한 번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구원 왜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일컬어 ‘양의 문’이라고 하셨을까요? 그 첫 번째 이유는, 자신이 생명을 주는 구원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양의 문이 되시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통해 들어가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생명을 얻게 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은 자, 즉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우리 힘이나 노력으로 영적 생명을 받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의 값을 치러야할 무서운 형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한 사람도 예외 없이 구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우리는 모두 구원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구원받지 못하면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구원의 문이 되십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유일한 구원자 예수님이 자기를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시는 두 번째 이유는, 예수님만이 세상의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과 ‘진리를 주장하는 것’을 분명히 구별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를 혼동하면 안 됩니다. 다른 종교인들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길은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죄값을 자신의 몸값으로 십자가에서 치르셨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구원받으려면 그를 찾아와야 합니다. 구원의 문이 되신 예수님 앞으로 와서, 그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즉 그분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영적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풍성한 생명 예수님이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하시는 세 번째 이유는, 우리에게 풍성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실 뿐만 아니라 그 생명이 우리 안에 풍성하게 넘쳐날 수 있도록 계속 은혜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자기를 가리켜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육체적으로 생명이 있고 건강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정신적으로 지식과 감정과 의지가 풍성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영의 생명, 주님께서 그것을 우리에게 주기 원하십니다. 이 놀라운 구원을 주시는데 돌아서면 안 됩니다. 우리 모두 구원을 받는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보십시오. 지금이야말로 은혜의 때요, 지금이야말로 구원의 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받아들이고 영생을 얻는 구원의 즐거움을 누릴 뿐만 아니라, 주님 안에서 풍성한 삶을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영의 눈을 멀게 하는 것들요한복음 9:1-41눈이 먼 사람을 보면, 안타까워하면서 ‘얼마나 답답할까? 저 사람의 눈을 뜨게 해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를 고민을 해야 정상입니다. 그리고 태어나서 한 번도 눈을 뜨고 본 일이 없는 사람을 주님께서 고쳐주셨다면 축제 분위기가 되어야 마땅할 텐데, 그 뒤에 오가는 대화들을 보면 살벌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기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영의 눈이 감겨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아예 처음부터 못 보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영의 눈을 멀게 하는 것들’이 무엇인가 알고, 같은 어리석음을 범치 않기를 바랍니다. 잘못된 생각이 영의 눈을 흐리게 한다 첫 번째 요소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잘못된 생각이나 지식, 통념, 시각이 우리의 영안을 흐려놓을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눈이 먼 사람을 보며, “주님, 저 사람이 누구 죄 때문에 저런 불행을 겪습니까? 자기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 부모 죄 때문입니까?” 제자들을 비롯하여 당시 유대 사람들은, 앞 못 보는 사람을 보면 무조건 죄 때문에 그런 형벌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잘못된 지식이요, 생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일반 사람들이 남의 고통에 대해 가지고 있는 통념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이나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그에게서 드러나게 하시려는 것이다.”(3절) 우리도 거짓된 정보나 지식 때문에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리고 영안이 흐려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를 솔직하게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율법주의가 영의 눈을 흐리게 한다 우리의 영안을 흐리게 하는 두 번째 요소는 율법주의입니다. 예수님께서 눈먼 사람을 고쳐주시자 곁에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바리새인들과 그 추종자들은 예수님을 물고 늘어졌습니다.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 하는데, 예수님이 침을 뱉어 손으로 진흙을 이기고 소경의 눈에 발라주기까지 했으니 그들에게는 이보다 큰일이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평생 앞을 못 보던 자가 광명을 찾는 경사로운 일을 보면서도 율법을 내세우며 예수 그리스도를 공격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주의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율법주의란 법이나 형식을 앞세워서 남을 판단하는 일체의 태도를 말합니다. 본질보다는 형식을 중요시하고, 내용보다는 외형을, 정신보다는 법을 우선에 두고 사람을 잡으려 드는 것이 바로 율법주의입니다. 이런 율법주의에 사로잡히면 우리의 영이 흐려집니다. 교만이 영의 눈을 흐리게 한다 우리의 영안을 흐리게 하는 세 번째 요소는 교만입니다. 예수님은 고침 받은 소경이 찾아왔을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못 보게 하려는 것이다.”(39절) 바리새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발끈하고 나섰습니다. “우리가 눈이 먼 사람이란 말이냐? 어떻게 그런 말을 다 할 수 있는가?” 자신들은 다 안다고 하는 교만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아는 것만큼 살지 못하면 그 사람은 눈을 뜨고 있어도 보지 못하는 사람이요, 빛이 비쳐도 여전히 죄 속에 거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기 쉽습니다. 우리 눈이 흐려지지 않도록 합시다. 잘못된 생각 때문에 우리 눈이 흐려지지 않도록 합시다. 율법주의 때문에 우리 눈이 흐려지지 않도록 합시다. 안다고 하는 교만 때문에 우리 눈이 흐려지지 않도록 합시다.
- 거짓 믿음도 있습니다요한복음 8:31-59예수님께서는 자기를 그리스도로 믿겠다고 말하는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의 말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게 될 것이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31-32절) 유대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서 보였던 반응은 주님께서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우리로 하여금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 해줍니다. 입으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지만 그들의 믿음이 순수하고 진실한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믿음이 그들의 고백에도 불구하고 실상은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간파한 것입니다. 그 문제가 무엇인지 본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영적 절박성의 결여 첫째로, 거짓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구원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인 특징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처럼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빌립보 지방의 간수가 바울에게 보인 반응처럼 구원을 절실히 사모하는 믿음이라야 진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보면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그 사람들은 정작 구원에 대하여는 이처럼 절실한 필요성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자신의 영적인 절박성, 즉 구원받지 않으면 나는 죽는다는 절박성을 깊이 인식할 때 생깁니다. “사람 앞에서는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 중의 죄인이다. 나는 용서받아야 한다. 구원받아야 한다.” 이런 절규가 마음속에서 뜨겁게 우러나오는 믿음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말씀에 매력을 느끼지 못할 때 두 번째로, 거짓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상대로 말을 주고받고 있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귀담아듣기보다는 자꾸 말꼬리를 붙잡고 늘어졌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말로 트집을 잡아서 예수님을 올무에 걸리게 하려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스스로 종교인이라고 자처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그 중의 하나였습니다. 같은 날 또 트집을 잡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을 가정해서 말을 만들었습니다. 그랬더니 또 바리새파 가운데 율법 교사 하나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물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볼 때, 믿음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지 못함 세 번째, 거짓 믿음을 가진 사람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지 못합니다. 거짓 믿음을 가진 사람은 결국 예수님을 떠나게 됩니다. 믿는다고 했던 유대인들이 나중에는 오히려 손에 돌을 들고 주님을 치려고 했던 것처럼, 결국은 예수님을 떠납니다. 거짓 믿음은 결국 세상으로 다시 되돌아갑니다. 거짓 믿음은 “나는 죄인이다. 나는 구원받아야 한다.”는 절실한 영적 요구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예수님을 떠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믿음을 선물로 받고 나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이 기적을 우리가 인정하게 되면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감사한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믿음을 선물로 받게 된 것이 감사할 뿐입니다. 주님께 감사하며 나도 모르게 찬송이 내입에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 진리로 자유를 누리려면요한복음 8:31-32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자유는 우리가 세상에서 살기 위해 필요한 어떠한 자유보다 더 소중한 것이고, 그러한 자유들이 있기 위해서 꼭 먼저 있어야할 근본적인 영적 자유입니다. 이 놀라운 자유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한 가지 요구를 하십니다. “너희가 나의 말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게 될 것이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31-32절)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은 믿는다고 입으로만 고백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해서 참 제자가 되고 진리가 자유케 하는 자유를 누리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말씀 안에 거하면서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어 자유를 누리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말씀에 열려 있고 즐거워해야 한다 첫째로,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에 대해서 마음을 열어놓고 살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기분 좋다고 듣고 기분 나쁘다고 듣지 않고, 형통한다고 귀를 기울이고 형통하지 않는다고 귀를 막아버리는 식의 변덕을 부리지 않고 항상 귀와 마음을 열어놓은 자세, 이것이 말씀을 청종하는 자세입니다. 우리가 자유인이 되려면 말씀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믿는다고 고백은 하면서도 죄에게 끌려 다니는 삶이 아니라, 죄로부터 자유를 누리는 그리스도의 제자의 삶을 살려면 “나의 말에 머물라”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머무른다’는 것은 말씀 안에 머무르는 것이고, 말씀 안에서 주님과 교제하는 것이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끌려 배워야 한다 두 번째로,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배운다는 말은 끌린다는 말과 통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우리가 발견하면 그 영광에 끌리게 됩니다. 끌리는 사람은 배우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오직 성경 안에서 자기를 계시하십니다. 성령은 성경에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경말씀을 배우는 것이 예수님을 아는 길입니다. 성경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서 배우면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를 자유케 하는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나를 만나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성경말씀을 배우면 자연스럽게 주님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에게 우리의 마음이 끌려야 합니다. 마음이 끌려야 진리이신 예수님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세 번째는,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성경말씀을 항상 듣고 배우고 묵상하는 사람은 최종적으로 그 말씀이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고, 우리의 성격을 다스리고, 우리의 생활을 가르치는 원리와 법칙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을 통해서 순종되어야할 진리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인격화되어야 합니다. 또한 말씀은 순종하는 자를 통해서 인격화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배우고 묵상하여 그것이 마음속에 살아있는 주의 음성이 되면 그 말씀에 순종하게 됩니다. 진정한 자유인이 되기 원하면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항상 귀를 기울이고, 배우고, 묵상하면서 그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의 아들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 놀라운 자유를 가지고 병들고 더럽고 냄새나는 세상을 치유할 뿐 아니라, 이 땅의 수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케 하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도구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 세상의 빛 예수요한복음 8:12-30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모든 사람들에게 “나는 세상의 빛이다.”(12절)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는 오직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선언이요 예수님만이 들려줄 수 있는 위대한 주제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세상의 빛이라고 주장하시는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그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세상의 상식을 가지고 예수님을 반박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세상 상식이라는 잣대를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의 빛은 주님을 따르는 자에게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기를 따르라고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따르는 자에게는 생명의 빛을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먼저 주님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른다는 것은 믿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심을 알려면 먼저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부터 회의적인 생각이 밀려올 때가 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주님을 따르는 일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인데 끝까지 자기를 부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기 몫의 십자가를 져야 되는데 십자가는 전부 다 벗어던지고 그냥 편안하게 예수 믿으려고 하니까 문제가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통해 주님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라 주님을 따르기 위해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주의 말씀을 배우는 것입니다. 주님은 빛이십니다. 그리고 빛이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비추는 방법은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성경 말씀은 주님의 등불이요 빛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주야로 읽고 묵상하며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면 어두움에 다니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면, 우리는 다윗처럼 세상을 힘 있게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십시오.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자를 어두움에서 인도할 뿐 아니라 그에게 생명의 빛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말씀을 배우면서 드디어 빛을 보고 삶의 의욕을 가지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주변에 있는 모든 이웃들을 눈부시게 할 만큼 밝고 기쁘게 인생을 사는 사람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생명의 빛을 체험하는 삶 우리 가운데에는 이러한 생명의 빛이 필요한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는 길만이 유일한 길입니다. 주님을 모시고 생명의 빛을 받으면 이 세상을 누구보다도 밝고 힘 있게 기쁨을 누리면서 살 수 있는 생명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빛 되신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세상을 사는 거룩한 백성입니다. 입술로만 예수가 세상의 빛이라고 하지 마십시오. 생명의 빛이 비치는 진정한 체험을 우리 모두가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좌절했을 때 좌절하지 않게 하시는 그 생명의 빛, 눈앞이 캄캄할 때 환히 내다보면서 기뻐할 수 있는 그 생명의 빛, 몸져누워 있는 병상에서도 찬송할 수 있는 그 생명의 빛, 이 빛을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서 얻는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느 누구도 부럽지 않은 멋진 생을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며 생명의 빛 되신 예수님이 주시는 감격을 느끼시기 바랍니다.
-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요한복음 8:1-11간음한 여자를 다루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가지고 기독교의 핵심을 잘못 짚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말씀을 볼 때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또는 자기 입맛에 맞게 해석하면서 읽기 때문입니다. 특히 자신들이 짓고 있는 죄를 합리화시키거나 자신의 죄를 가볍게 여기기 위한 목적으로 성경을 적용하기 때문에 이상한 결과를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도, 예수님께서 죄를 가볍게 다루신다고 생각하는 오해가 이런 풍조를 확산시키는 데 한몫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중에 아무도 이와 같은 오해를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딜레마 예수님은 지금 빠져나갈 어떤 틈도 보이지 않는 딜레마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간음 현장에서 잡혔으면 돌로 치시오.”라고 말한다면, 예수님은 그 순간부터 그때까지 누리던 모든 대중적인 인기를 송두리째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의 친구라고 알려져 있었습니다. 따라서 만일 예수님께서 여자를 돌로 치라는 말씀을 하셨다면 많은 사람들이 실망하고 예수님에게서 등을 돌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예수님께서 “돌을 던지지 마시오. 여자가 너무 불쌍하지 않소.”라고 말을 했다면,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율법에 위배된 말씀을 하셨다면서,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어 예수님의 멱살을 잡거나 여인에게 던지려던 돌을 예수님에게 던졌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이 모략은 너무도 음흉하고 무서운 계략이었습니다. 말씀의 능력 본문을 읽으면서 예수님께서 죄를 너무 가볍게 다루고 계시지 않나 하는 오해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7절) 예수님의 이 말씀은 엄청난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한 마디 말씀이 주변에 서있는 사람들의 양심을 찌르고 깊이 들어오는 것을 그들은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모두 가책을 받았습니다. 이 말씀은 죄를 가볍게 다루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십자가의 죽음을 생각하시면서 하신 말씀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회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십자가의 피로서 다 씻어주고 덮어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자기 아들을 희생시키면서 하시는 용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생명을 십자가에 던지며 하시는 용서입니다. 이 감격이 있을 때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하나님 앞에 마음을 드리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오직 십자가의 은혜에 붙들려 예수님은 여자를 보내시기 전에,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11절)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면서 우리가 다시 죄를 짓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용서받았다고 해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아니할 만큼 우리는 거룩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주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내가 용서받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대신 죽으셨다는 사실을 마음속 깊이 인식하고 그 은혜에 붙들려 살면 죄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그러면 세상이 아무리 악해지고 음란해져도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십시오. 당신은 승리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거룩할 수 있습니다. 그 어느 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결코 끊을 수 없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