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S
말씀
-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한복음 7:37-39제사장이 실로암 못에서 길어와 하나님의 제단에 부은 그 생수는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목이 말라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마다 반석을 쳐서 마시게 하셨던 그 생수를 상징하는 물이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생수를 내는 반석이 여기 있노라. 내가 너희에게 생수를 주겠노라. 그러므로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사야는 “너희 모든 목마른 사람들아, 어서 물로 나오너라.”(사 55:1)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목마른 사람은 다 내게로 와서 마셔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사야가 외치던 그 물이 바로 생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채워지지 않는 갈증 이 세상사람 가운데서 이처럼 장엄하고 분명한 메시지를 가지고 사람들을 초청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목마른 인생들에게 그 목마름을 해갈시켜 주겠다고 자신 있게 외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예외 없이 본능적으로 강렬한 갈증을 갖고 있습니다. 모두가 죄로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이 부패성은 육신의 욕심을 자극해서 찾고 싶고, 갖고 싶고, 즐기고 싶고, 높아지고 싶고, 공격하고 싶어 하는 갈증을 유발하는 것입니다. 이런 갈증의 뿌리에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도망가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증세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갈증은 영적인 문제입니다. 성령 체험에 대한 올바른 이해 그러면 어떻게 해야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을 뿐만 아니라 성령이 시냇물처럼 흐르는 은혜도 날마다 체험하면서 사는 복을 누릴 수 있을까요? 첫째, 이미 여러분 안에 성령의 강이 흐르고 있음을 인정하십시오. 성경은 예수님을 믿는 자는 누구나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넘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38-39절) ‘나를 믿는 자’는 특별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생수의 강이 그 배에서 흐르는 사람은, 특별한 은혜를 체험한 사람이 아닙니다. 또 남다른 소명을 가지고 아프리카의 오지로 달려가는 사람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평범하게 예수님을 믿고 주님 앞으로 나오는 모든 사람에게 주님이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주님의 약속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내게 오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리라.” 말씀하셨으면, 믿고 따르면 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고, 성령을 사모하십시오. 둘째,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십시오. 성령이 우리 마음에 계시기 때문에 항상 우리에게 속삭이고, 우리를 향해서 탄식하시고 교훈하시고 책망하십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책망하시고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권면하십니다. 이럴 때 우리가 들어야 합니다. 성령을 모시고 있으면서도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지 않으면, 성령이 강물처럼 역사하지 않습니다. 셋째, 성령의 강물이 좀 더 힘 있게 흐르기를 사모하십시오. 내 모든 지성, 내 모든 감정, 내 모든 의지, 전인격적으로 내 영혼 구석구석까지 성령의 물은 지체 없이 흘러내립니다. 사모하는 자에게 이와 같은 은혜가 역사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이미 생수를 마시고 그 생수가 그 안에서 흘러넘치는 사람입니다. 목말라 한다면 그 원인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일어나는 갈증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역사하는 이 놀라운 축복을 다시 누리시기 바랍니다.
- 예수님께 반항하는 사람들요한복음 7:1-13사람에게는 누구나 권위에 도전하고 싶어하는 반항의식이 있습니다. 아마도 자기를 만드신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려다가 저주를 받은 우리의 조상 아담이 그 후손에게 물려준 좋지 못한 유산인 모양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인간이 가장 악랄하게 한 반항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반항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자 사람들은 극렬하게 반항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이 생명이라고 하자 죽이려고 했고, 결국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예수님의 동생들 절기상으로 초막절이 가까워 오는 시기였습니다. 이런 명절을 맞으면 유대 나라 각처에 있는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모입니다. 예수님의 동생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빈정거리는 말을 하였습니다. 형제들의 이런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그들이 자신을 믿지도 않을뿐더러 비아냥거리고 있다는 것을 훤히 아시면서도 나무라지 않으시고 한마디로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님 가까이 살면서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 오히려 마음은 점점 더 굳어져 예수님의 형편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비아냥거렸습니다. 신앙적으로 환경이 좋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예수를 잘 믿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제일 먼저 믿어야 되고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믿을 수 있는 요건을 다 갖추고 있어도 반항의식을 가지고 있으면 믿음을 가지기가 어렵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의 반항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후 성전에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보자 “배우지도 않은 사람이 어떻게 글을 아느냐?”고 시비를 걸었습니다. 소위 학벌을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출생지를 물고 늘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출생지가 어디냐는 질문에, 예수님은 “내 출생지는 하나님 나라다.”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에게 있는 가장 기본적인 문제인 죄의 문제와 죽음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신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외에는 어느 누구도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 외에는 죽음을 이기고 살아난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 값으로 우리의 죄 값을 치르신 분은 예수님 뿐입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분도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예루살렘에는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심한 아주 악질적인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먼저,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했다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걸고 넘어지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찾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두 번째 부류는, 로마정부를 등에 업고 부와 권력을 누리고 있던 사두개인들입니다. 우리는 베드로와 같은 입장을 취해야 합니다. “주님,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선생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주님을 떠났고, 심지어 그동안 예수님을 추종하였던 제자들도 등을 돌렸습니다. 이럴 때 베드로가 그런 고백을 한 것입니다. 믿음은 생명을 걸면서까지 예수님 편에 서는 것입니다. 또한 살벌한 분위기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생명을 걸고 소리를 지르면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우리도 이 세상에서 예수의 이름을 외쳐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필요한 믿음입니다.
-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요한복음 6:37-40, 64-71본문은 장로교의 뼈대를 이루는 다섯 가지 신앙 원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물론 이 교리가 장로교에서만 통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개혁교단을 비롯하여 이 교리를 그대로 고백하는 교단과 지도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다섯 가지 신앙 원리의 영문 첫 글자를 따면 튤립(Tulip)이 되므로 연관시켜 생각하면 기억하기 쉽습니다. 이 다섯 가지 신앙 교리는 흔히 “칼뱅주의”라고도 합니다.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Total depravity) 첫째 원리는 ‘전적 타락’ 또는 ‘전적 부패’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해서 구원을 받는 데는 완전히 무력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너무도 타락했기 때문에 스스로의 힘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전서 12:3에서 “성령으로 감동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 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조건 없는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두 번째는 ‘무조건적 선택’입니다. 사람이 전적으로 무능해서 예수를 믿을 수 없다고 한다면 세상에서 믿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주일이면 전 세계적으로 수십억의 신자들이 교회에 나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우리의 지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이와 같은 선택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무조건적인 선택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내가 예수 믿게 된 것은 하나님이 나를 조건 없이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 세 번째는 ‘제한 속죄’입니다. 선택 받은 사람이 제한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들의 수가 한정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수는 굉장히 많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많을 것이 틀림없지만, 분명한 것은 선택된 한정된 사람들만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제한적으로 선택된 사람들 속에 내가 속해 있다는 사실은 기적 같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불가항력적인 은혜(Irresistible grace) 네 번째는 ‘불가항력적인 은혜’입니다. 37절에 하나님께서 선택하여 예수님에게 주시는 자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예수님께 와서 믿음을 고백하고, 죄 사함 받고, 구원 얻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나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미리 정해 놓으신 계획대로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성도의 견인, 끝까지 책임지시는 은혜(Perseverance of the saints) 다섯째는 ‘성도의 견인’입니다. 성도의 견인이란 하나님께서 자기가 좋아서 선택하여 믿게 하신 자들은 끝까지 책임지시고 구원하신다는 말입니다. 예수 믿은 다음에 자꾸 하나님께 반항하고 거역할지라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꼭 구원해 주십니다.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 하나님의 조건 없는 선택, 제한 속죄, 불가항력적인 은혜, 성도의 견인, 이러한 ‘튤립’의 진리를 생각하면, 하나님의 자녀 된 것이 얼마나 놀랍고 고마운 일인지 감격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 생명의 떡 예수요한복음 6:30-36, 47-59사람들은 아무리 옳은 말이라고 하더라도 듣기 싫은 소리이면 귀를 막고 떠나 버립니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무리가 다 떠나고 충성스럽게 따르던 제자들마저 떠났을 때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도 떠나가려느냐?” 이에 대해서 시몬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님,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선생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육체의 목숨과 영적이고 영원한 생명 예수님께서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헬라어에서는 생명을 ‘비오스(bios)’와 ‘조에(zoe)’라는 두 가지 단어로 쓰고 있습니다. ‘비오스’는 심장의 맥박이 뛰는 동안 유지되는 우리 육체의 목숨을 가리킵니다. 반면에, 사람에게는 영적인 생명을 의미하는 ‘조에’가 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생명입니다. 영적인 생명은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생명의 원천이 되신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그와 화목하고 그와 교제하는 것 자체가 ‘조에’입니다. 또한 ‘조에’는 영생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죽음이 가까이 하지 못하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영원히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육신의 생명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영적 생명, 그리고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사는 영원한 생명, 이것보다 귀중한 것은 천하에 없습니다. 예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믿음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믿음이 진정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죄인을 위하여 살을 찢기시고 피를 흘리신 것에 대해 감사하며 찬송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찬송가 143장을 쓴 아이작 왓츠는 자기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살이 찢기고 피 흘려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자마자 그 은혜와 그 사랑에 감격해서 감동적인 찬송을 썼습니다.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내 지은 죄 다 지시고 못 박히셨으니, 웬 일인가 웬 은혠가 그 사랑 크셔라.” 이런 감격과 고백을 일컬어서 예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믿음입니다. 조용히 눈을 감고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영혼의 귀를 열면,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죄인이었던가를 생각하면서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앞에 무릎 꿇고 엎드리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살을 찢기시고 피 흘리신 주님을 믿는 믿음 예수님은 친히 십자가에서 살을 찢기고 피를 흘리시면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죄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아들이신 죄 없는 예수님께서 살을 찢고 피를 흘려서 그 생명을 희생하셨습니다. 주여, 내가 이 사실을 믿습니다. 주의 죽음은 나의 죽음입니다. 주님이 살을 찢기신 것은 내 대신 찢기신 것이고, 주님이 피를 흘리신 것도 내 대신 흘리신 것입니다. 주여, 내가 믿습니다.” 하고 가슴으로 주님의 십자가를 부둥켜안고 감격하면서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요한복음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이 믿음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영생의 그날을 바라보면서, 인생길이 비록 힘들고 무거워도 기쁨으로 걸어가는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에게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기도합니다.
- 풍랑 중에 찾아오신 예수님요한복음 6:16-21예수님은 언덕에서 내려와 풍랑과 싸우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 물 위로 걸어가셨습니다. 주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바다는 잠잠해지고, 어느덧 배는 건너편 벳세다 해안 가까이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는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는 인생의 풍랑을 잔잔케 하시고 그 마음에서 공포를 쫓아주신 예수님을 체험한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려운 풍랑을 만나고 있을 때 아무리 주님을 찾아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생각되는 때도 있습니다. 그 이유를 우리는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몇 가지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세상을 혼돈하지 말라 첫째는, 하나님과 세상을 혼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불공평한 일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치고 예수님처럼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한 자가 어디에 있을까요? 처음부터 끝까지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만 당하시다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도 억울하게 대접받은 곳이 세상이라면 누구나 다 억울한 일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요지경처럼 보인다고 하더라도 세상과 하나님을 혼돈하여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주님은 억압받는 모든 사람에게 의롭고 공정하게 대하신다.”(시 103:6) 이해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불공평하지 않다고 하는 진리만은 인정하고 있어야 믿음으로 견딜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쉬지 않고 돌보신다 둘째는, 우리가 심한 풍랑을 만나 괴로워할 때 예수님은 우리의 고통을 알고 계시고 우리와 함께 계시며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풍랑을 만나 씨름하였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어오실 때 눈으로 볼 수 있었고 위로의 말씀을 하실 때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영으로 계시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찾아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언제나 여전히 나를 돕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형편에 놓이든지 간에, 하나님은 나를 아시고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보이지 않는 손으로 도와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 불평하고 상한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지금도, 이 자리에까지 오게 된 것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이 나를 떠받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기대와는 다르게 주시는 하나님 셋째로,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를 잃으면 다른 것을 얻는 영적 원리를 일컬어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말합니다. 또 하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우리 앞에 펼쳐지면 우리는 예수님처럼 신령한 몸을 입고 부활해서 주님과 영원히 사는 백성으로 그 신분과 형편이 바뀌게 됩니다. 그날에는 잃어버린 것처럼 보였던 것들이 다시 회복되고 불완전한 것들이 완전하게 되는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믿고 오늘도 바다 위를 걸어오신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남은 인생을 찬송하면서 사는 당신이 되기를 바랍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주님 앞에 서면 이 세상에서 고통을 많이 당한 사람일수록 더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요한복음 6:1-15요한복음을 쓴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기 위해서 네 번째 표징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배고픈 군중을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불리 먹이고 열두 바구니를 남겼다는 이적입니다. 이러한 이적을 베푸신 이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말씀을 듣고 또 예수님을 보내신 분을 믿어서,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고 심판을 받지 않는 은혜를 주시기 위함이며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가는 은혜를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영혼뿐 아니라 육신까지 배고픈 군중을 먹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몇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은 배고픈 군중을 불쌍히 여기시고 먹이셨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세상 사람들은 빵으로만, 즉 육신의 필요만 채우면 다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필요뿐만 아니라 영적인 필요를 채워야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육신의 필요는 무시해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아무리 은혜를 많이 받아도 배가 고프면 먹어야 한다는 것을 주님은 너무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영혼만 아니라 육신까지 중요하게 보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자하시고 자상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진정한 감사는 기적을 낳고 우리는 배고픈 군중을 손수 먹이시는 예수님을 통해 일용할 양식이 전적으로 하나님 손에서 온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일용할 양식은 하나님의 손에서 옵니다. 그가 거두시면 우리는 모든 것을 한순간에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아무리 초라한 음식이라도 먹을 때마다 하나님을 기억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아무리 메마른 떡 한 조각이라도 감사 없이 입에 넣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식사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식사기도가 너무나 습관화되어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정말 하나님이 주신 일용할 양식으로 알고 감사하는 것인지, 우리 모두 새삼스럽게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낭비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교훈을 더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작은 떡 한 조각이라도 버리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절약은 부단히 저축을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부단히 낭비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껴 쓰고 나누어 쓰고 바꾸어 쓰고 다시 쓰는 것이 절약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인류가 당할 재해가 있다면 거의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아껴 쓰지 않고 함부로 버리고 없애는 데서 자초하는 인재일 것입니다. 먹다 만 보리떡 한 조각을 버리지 말고, 먹다 만 작은 생선 한 조각을 버리지 말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낭비하고 살았는가를 반성해야 합니다. 배고플 때 먹이시는 예수님, 보잘것없는 보리떡과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하나님 앞에 감사드리신 예수님, 남은 떡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도록 하라고 권면하시는 예수님, 그 예수님을 우리가 조용히 마음에 모시고 성령이 들려주시는 그의 음성을 들어 봅시다. 우리가 깊이 깨달아야 할 진리가 무엇입니까? 조용히 성령께서 들려주시는 음성을 듣는 시간이 되기 바랍니다.
- 예수님을 증거하는 성경요한복음 5:31-47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을 보고 안식일의 규율을 어겼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예수님이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하시자 그 말씀을 믿으려 하지 않고 증거를 내놓으라고 요구했습니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내 자신을 위하여 증언한다면, 내 증언은 참되지 못하다.”(31절) 그리고 예수님은 세 가지의 명확한 증거를 가지고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입증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의 증거, 이적 기사, 구약성경 이렇게 세 가지였습니다. 세례 요한의 증거와 이적 기사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충실하게 증거한 위대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증거(33절)를 받고도 많은 사람들은 고개를 흔들면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더 큰 증거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성하라고 주신 일들, 곧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바로 그 일들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증언하여 준다.”(36절) 세례 요한이 추천하고 하나님께서 추천해 주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는데 하나님께서 이루신 역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행하신 수많은 이적 기사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 많은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행하신 일을 책에 낱낱이 기록한다면 이 세상에 그 책들을 쌓아둘 자리가 부족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마지막 증거인 성경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입증하는 두 가지 증거 즉, 세례 요한의 증거와 예수님의 이적 기사를 보고도 사람들이 믿기를 거부하자 최종적인 증거를 내놓으셨습니다. 요한복음은 12장까지의 전반부와 13장 이하의 후반부로 나눌 수 있는데, 전반부는 예수님의 이적 기사들을 설명하면서 ‘예언자 (이사야)가 말한 대로’라는 말을 열 번 가까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의 후반부로 가면 여덟 번 내지 열 번 정도 반복하여 나오는 어구가 또 하나 있는데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구절구절을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됨을 증거하는 말씀으로 보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최종적으로 예수님이 자기의 아들임을 구약성경으로 증거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최고의 권위, 성경 하나님께서는 이상의 세 가지 증거를 가지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입증해 보이셨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광야에서 외치는 세례 요한의 증거를 들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직접 행하시는 이적을 볼 수도 없습니다. 그 대신 이 두 가지 증거는 신약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구약성경을 가지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입증하는 세 가지 증거를 다 가지는 셈이 됩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예언, 세례 요한의 증거, 예수님 자신의 이적 기사 이 세 가지 증거를 보여주는 성경말씀을 보면서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지 못하면 소망이 없는 사람이요 정말 불행한 사람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말씀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성경 속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날마다 주님을 만나는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 구원의 세 가지 단계요한복음 5:19-24같은 단어이지만 여러 뜻으로 사용되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한 예를 들어서, 성경에 나오는 ‘시험’이라는 단어가 그렇습니다. 시험이라는 말이 유혹이라는 말로 쓰일 때가 있고, 테스트라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연단이나 단련이라는 의미로 사용될 때도 있습니다. ‘구원’이라는 단어도 그렇습니다. 구원을 이미 받았다(롬 3:24)라고 과거 시제로 말하는가 하면, 구원을 이루어 나가야 할 것(빌 2:12)으로 현재 시제로 말하기도 합니다. 또한 구원이 가까웠다(롬 13:11)는 말로 미래 시제로 말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 중 요한복음 5:24은 이 세 가지를 모두 말하고 있습니다. 1. 과거(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갔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기 때문에 한 번 죽을 뿐만 아니라, 불과 유황이 타오르는 고통을 받는 둘째 사망의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 마음에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사면을 받고 사형선고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들에게 사면을 받을 수 있는 은혜를 주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사면의 은혜를 거부하면 여전히 사형집행을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구원은 즉각적이며 점진적입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그 순간부터 온전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직 사람의 역할을 온전히 하지는 못합니다. 점진적으로 사람이 되어가야 하지만, 태어난 순간부터 즉각적으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과거의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죄의 형벌로부터 벗어났습니다. 2. 현재(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고) 빌립보서 1:6은 구원의 세 단계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선한 일을 여러분 가운데서 시작하신 분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시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선한 일을 우리 가운데서 시작하신 것은 과거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날은 미래에 이를 것입니다. 그때까지 하나님께서는 현재 우리를 온전하게 완성해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는 죄의 권세로부터 벗어나고 있습니다. 그 동안에 우리는 죄의 권세와 싸우는 갈등을 겪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그 갈등을,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고,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고 있습니다.”(롬 7:25)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감사한 일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롬 8:1)라는 사실입니다. 또한 우리는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롬 8:38-39)라고 확신하며 고백할 수 있습니다. 3. 미래(심판을 받지 않는다)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은 사형집행일을 두려움 가운데 맞이합니다. 그러나 사면을 받은 사람은 사형집행일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를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 말미암아 사면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날이 이를 때, 즉 예수님께서 다시 재림하셔서 모든 것을 의로 통치하시는 그 날이 이를 때를 소망하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날이 이르면, 우리는 죄의 존재로부터 벗어날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 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신 말씀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신 말씀을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우리의 모습을 통해서, 세상이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도록 돕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 부활신앙의 능력누가복음 24:1-12예수님이 다른 종교의 창시자들과 극명하게 다른 점이 있습니다. 예수님 외에 어떤 사람도 인간들의 죄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하여 인간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 외에 어떤 사람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인간들의 죄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하여 인간들을 대신하여 돌아가셨고, 오직 예수님만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에 대한 많은 증거들이 있습니다. 그 증거들과 아울러 중요한 것은, 부활에 대한 여러분 자신의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1. 부활에 대한 실제적 증거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실 것을 자주 예고하셨지만, 사람들은 자기 생각의 한계 속에 갇혀서 예수님의 부활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예수님께서 장사지낸 지 사흘 째 되는 날, 여자들은 예수님의 몸에 향료를 넣기 위하여 무덤으로 갔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인자는 반드시 죄인의 손에 넘어가서, 십자가에 처형되고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야 한다.”고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기억하고 있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빌라도에게 몰려가서 무덤을 단단히 지켜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들의 요청대로 빌라도는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을 봉인하고, 경비병들을 두어서 무덤을 단단히 지켰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무덤에 간 여인들은 무덤을 가로막고 있었던 커다란 돌이 무덤에서 굴려져나간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무덤에 들어가 보니 예수님의 시신이 없었습니다. 2.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의 변화 여인들이 무덤에서 돌아와서 열한 제자와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그들이 본 사실을 알렸습니다. 사도들은 이 말을 듣고 어처구니없는 말로 여기고 여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가까이 있었던 베드로는 일어나서 무덤으로 달려가 몸을 굽혀서 들여다보았습니다. 거기에는 예수님의 시신을 감았던 삼베만 놓여있었습니다. 이것을 본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회상하며 부활을 믿은 것이 아니라, 이상히 여기면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밤에 그 뒤를 따라가다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있고 예수님의 시신을 감았던 삼베만 놓여있는 것을 보고도 이상히 여겼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의 강림을 경험한 그는 수많은 사람 앞에서 주님의 부활을 담대하게 증거하였고, 순교를 당하기까지 했습니다. 3. 부활에 대한 확신 사도 바울은 스데반의 죽음을 당연하게 여겼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묶어서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려 할 정도로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부활 후의 예수님을 만난 그는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가장 고상하게 여기고,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겼습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 모든 것을 오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오직 복음을 위하여 자신의 생애를 불태웠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신앙의 능력입니다. 부활신앙이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모든 소망을 걸고 살지 않습니다. 아무리 부활의 역사적 증거를 많이 알고, 부활신앙을 가지고 변화된 많은 사람을 알아도 자기 나름대로의 확신이 없으면,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부활에 대해 여러분의 확신을 가지고 부활신앙의 능력 있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 일어나 걷게 하시는 은혜요한복음 5:1-15예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에 열정을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 열정으로 유대인이 지나가기 꺼려하는 사마리아를 지나가셨고, 남자들이 상대하지 않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다가가 물을 달라 하셨고, 그와 대화를 나누어 그 여인으로 구원을 받게 하셨던 것처럼, 이번에는 병자 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것도 안식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낫게 하셨습니다. 이 남자는 38년이나 누워있었으니 관절은 이미 돌처럼 굳어버렸고 다리에는 아무 힘도 남아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말씀하시자 성령의 능력이 그를 일으킨 것입니다. 생명을 걸고 찾아오신 은혜 예수님이 행하신 많은 표적과 기사 중에서 요한이 이 사건을 특별히 기록한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 모두는 이 이적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보아야 합니다. 38년 된 병자를 일으키시는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걸고 우리를 찾아오셨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우리를 위하여 생명을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이 사실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그는 우리 죄를 그의 몸에 몸소 지시고, 나무에 달리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죄에는 죽고, 의에는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벧전 2:24) 예수님에게서 누가 목숨을 빼앗아 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스스로 원해서 자신의 목숨을 우리를 위하여 버리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절망의 자리에 함께 계시는 은혜 베데스다 못가에 와있던 이 병자는 자기 병을 고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이미 죽음을 맛보았습니다. 소망도 힘도 없는 자의 삶은 죽음의 연속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오랜 역경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 우리를 조용히 찾아오십니다. 그때에 우리가 절망하고 있는 그 자리에 주님이 와서 계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말하지 않아도 예수님은 우리의 형편을 다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에 처하면 누구한테 호소할 기력마저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주님은 우리 사정을 다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십시오. 우리 사정을 속속들이 다 알고 계시는 그분이 곁에 와계신다는 사실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일어나 걷게 하시는 은혜 본문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처지에 놓여도 소망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완전히 좌절하여 완전히 포기한 사람에게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사람이 힘든 고비를 만났을 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희망을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여기서 배울 수 있습니다.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한번 받은 은혜를 쉽게 쏟아버리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라고 경고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이 사나이가 건강을 회복하면 옛날의 죄를 다시 지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한번 은혜를 받았으면 그 은혜를 쏟아버리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시간 여러분의 모습이 38년 된 병자와 흡사하다면, 주님을 만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