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S
말씀
- 우리가 세워야 할 성전 학개 1:1-11올해 1월 호세아서를 시작으로 스바냐까지 포로 이전 유다에게 주신 9권의 선지서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학개, 스가랴, 말라기를 통해 포로에서 돌아온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신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학개서는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에게 성전을 지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도 예배당 건물을 지어야 한다는 말씀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성전을 지으라고 하셨는지, 오늘 우리에게는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무엇을 따라 살아야 하는가? (1:1-2)
다리우스 왕 이년 여섯째 달 초하루는 BC 520년 8월 29일에 해당합니다. 유다 백성은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온 후 BC 537년부터 성전 재건을 시작했지만, 사마리아 사람들의 방해와 고발로 공사가 중단되었습니다. 그렇게 약 14년 동안 성전은 무너진채 방치되었습니다. 그런데 유다 백성들은 성전을 짓지 않는 이유를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들에게 성전을 짓지 않을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주변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상황을 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들의 마음과 우선순위를 보셨습니다. 신앙은 상황이 좋아질 때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황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에스라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은 성전을 짓는 것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성전 재건은 상황에 따른 것이 아니라 말씀을 따라 순종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상황을 먼저 볼 때가 있습니다. ‘조금만 여유가 생기면’, ‘형편이 좋아지면’, ‘때가 되면~하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상황이 아니라 말씀을 따라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2.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가? (1:3-11)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이 성전을 짓지 않는 진짜 이유는 자신의 집에만 관심을 가지고 성전에 무관심한 것,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없는 것이라고 (4절). 하나님이 성전을 지으라고 하시는 것은 머물 곳이 없어서가 아니라(행 7:48-49), 하나님을 첫 자리에 놓는 우선순위 떄문입니다. 하나님보다 자신의 삶을 첫 자리에 두는 것은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기를 원하십니다(5절). 그렇게 살 때 어떤 결과가 생기는지 6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만족과 기쁨이 없고, 열매가 없습니다.(9-11절). 하나님께서 성전을 짓지 않았기 때문에 벌을 주신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보다 자신의 삶을 먼저 첫자리에 두면,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참된 만족을 얻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다고 저절로 만족을 누리고 행복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환경보다 중요한 것은 삶의 중심입니다. 하나님을 첫 자리에 모실 때 우리의 삶에 기쁨과 만족이 있고, 열매가 있습니다.
3. 무엇을 세워야 하는가? (1:8)
하나님은 뒷산에 있는 나무를 베어서 성전을 지으라고 말씀하십니다(8절). 평범한 성전입니다. 솔로몬 성전처럼 화려하고 아름다운 성전을 회복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유다 백성이 하나님을 첫 자리에 모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성전을 짓도록 하셨습니다. 우리가 지어야 할 성전은 무엇입니까? 벽돌 건물이 아니라 성도들이 서로 연결되고 자라는 것입니다(엡 2:20-21). 서로 연결되기 위해서는 겸손, 온유, 오래 참음, 사랑으로 용납하는 것이 필요합니다(엡 4:2). 성령이 평화의 띠로 하나되게 하심을 지키려고 애쓰는 것이 필요합니다(엡 4:3). 또한 우리는 예수님의 성품과 사역을 닮아서 자라야 합니다(엡 4:13, 15). 자라는 것이 끝이 아니라 그 다음에 영혼구원과 제자 삼는 사역, 즉 목자, 목녀, 목부가 세워지는 일을 해야합니다. 나무로 짓는 성전은 무너지고 사라지지만 우리가 짓는 성전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 회복의 완성스바냐 3:14-20지난번 말씀에서는 하나님께서 유다 공동체를 어떻게 회복시키시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공동체가 회복되었다고 해서 하나님의 회복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에도 회복이 일어나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어디까지 회복시키시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개인을 회복시키시는 세 가지가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1. 기쁨의 회복 (3:14-15) 70년대 ‘바빌론 강가에서(by the rivers of Babylon)’ 팝송은 시편 137편을 배경으로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슬퍼하는 모습을 노래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빌론 강가에서 우는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십니다. “노래하여라, 즐거이 외쳐라, 마음껏 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14절).” 왜 이렇게 말씀하십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징벌이 끝났고, 압제하던 바빌론이 망할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15절). 우리도 바빌론 강가에 앉아 울던 사람입니다. 인생의 의미를 찾지 못해서,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 때문에, 실패와 고난 때문에 울던 사람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셨고, 영원한 죽음인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기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결코 너를 떠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히 13:5). 이것이 우리도 기뻐하고 환호해야 할 이유입니다. 2. 정체성의 회복 (3:16-18) 하나님은 이스라엘 남은 자들에게 낙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16절), 구원을 베푸실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고, 그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고 반기시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17절). 현대어 성경에서는 명절 잔치 때와 같이 환호성을 올리며 기뻐 뛰신다고 표현합니다(3:17-18).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뿐 아니라 우리를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가치를 세상이 평가하는 기준으로 판단할 때가 많습니다. 학력, 직업, 재산, 경력, 외목, 다른 사람의 인정으로 가치를 결정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진짜 가치가 아닙니다. 우리의 진짜 가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결정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나를 하나님 자녀 삼기 위해 예수님을 내어주셨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께 예수님만큼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만 사랑받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느냐입니다. 이것이 정체성의 회복입니다. 3. 소망의 회복 (3:19-20) 세 번째 회복은 흩어졌던 사람들이 다시 고향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돌아가고 싶은 곳이 있습니다. 최희준 가수가 부른 ‘하숙생’이라는 노래는 인생을 나그네에 비유합니다.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잠시 머물다 떠나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우리가 하늘에 고향을 둔 이 땅의 나그네라고 말씀하면서, 천국이 우리 본향인 것을 분명하게 말씀합니다(벧전 2:11, 현대어). 많은 사람들이 천국은 착한 사람이 가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천국은 내가 얼마나 착하게 살았느냐로 가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가는 곳입니다. 결론적으로 기쁨, 정체성, 소망, 세 가지 회복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기뻐하고,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시니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며, 하나님과 함께할 영원한 본향이 있으니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 ‘우연히’와 ‘마침’의 은혜를 누리는 삶룻기 2: 1~12 룻기의 배경이 되는 사사 시대는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가장 타락하고 암울했던 시대였습니다. 그러한 때에 하나님은 한 이방 여인의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신앙과 희생적 사랑을 통해 놀라운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다 망한 것 같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우연히’와 ‘마침’의 은혜를 통해 한 가정을 일으키시고, 더 나아가 한 민족을 구원하시는 그분의 놀라운 섭리를 룻기를 통해 살펴보게 됩니다. 1. ‘우연히’ 보아스의 밭으로 간 룻 룻은 우연히 보아스의 밭으로 갔지만, 그 뒤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음을 성경은 강조합니다. 그녀의 희생, 헌신, 순전한 믿음을 보신 하나님께서 룻을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았고 어떻게든 그녀가 선대받을 수 있는 좋은 장소로 인도하셨습니다. 또한 그곳에서 충분한 곡식을 얻어갈 뿐만 아니라 보아스와의 놀라운 만남을 가지게 되는데, 우연을 가장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이제 룻의 삶을 통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 삶 가운데도 하나님이 예비하신 이런 ‘우연히’의 은혜(기적)들이 가득하길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오늘 룻과 같이 먼저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믿음, 내 옆의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는 헤세드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2. ‘마침’ 밭에 나타난 된 보아스 룻과 나오미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는 그걸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마침’ 보아스를 그곳으로 보내어 룻을 만나게 하시고 그녀를 선대하게 합니다. 보아스는 룻을 처음 만났지만 이미 룻이 어떤 여자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과부의 신분으로 홀로된 시어머니를 모시고 낯선 이방 땅에 왔고, 시어머니를 위해 보리 줍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 룻이 대단하게 여겨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연히’와 ‘마침’의 은혜로 두 사람을 만나게 하셨지만, 그 만남을 복되게 하고 잘 되게 하신 것은 결국 룻의 희생과 헌신, 헤세드의 사랑이 있었고, 보아스는 그런 여인을 모른체 않고 선대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우연히’와 ‘마침’의 은혜를 누리는 삶을 위해서 일상의 관계, 만남 속에서 자신의 이익과 욕심만을 이루려 하기보다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대하고 성공으로 이끌어 주려고 노력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두 사람을 축복하셨듯이 우리 삶에 개입하시고 우리를 축복하시리라 믿습니다. 3.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는 작은 선택들 룻기 전체에 흐르는 중요한 교훈은 바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믿음의 선택이 만나,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을 이룬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룻기에는 이런 믿음의 선택, 자기보다 남을 더욱 생각하는 배려의 선택이 자주 등장하고, 특히 마지막 4장에서는 나오미 가문의 잃어버린 땅을 되찾아 주기로 결단한 보아스의 ‘책임지는 선택’이 등장합니다. 그의 이런 희생적인 선택은 결국 나오미와 룻을 살린 것 뿐만 아니라 무너진 한 가정을 일으켜 세우고, 결국 그의 후손으로 다윗왕이 태어나고,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는 영광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일상속에서 헤세드의 마음으로 하는 '작은 믿음의 선택'들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위대하고 완전한 구원의 섭리를 이루어 가시는 분입니다.
- 하나님이 회복시키시는 공동체스바냐 3:9-13 스바냐 1장에서는 무서운 심판을 말씀하시다가 3장에 오면 하나님께서 회복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마치 하나님께서 갑자기 심판에서 회복으로 방향을 바꾸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선지서에서 반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심판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심판을 통해 죄를 제거하시고, 결국 하나님의 백성을 회복시키시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이것이 구약에 나타난 복음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무너진 공동체를 어떻게 회복시키시고, 무엇을 회복시키실까요? 1. 예배를 회복하십니다. (3:9-10) 뭇 백성들의 ‘입술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스르던 말과 태도가 변화되는 것을 말합니다.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것은 한마음이 되게 하셔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신다는 뜻입니다(9절). 이들은 에티오피 강 저너머에서부터 즉 온 세상에서 예물을 가지고 옵니다(10절). ‘예물을 가지고 오는 것’은 예배하기 위해서 오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공동체를 회복시키실 때 가장 먼저 하시는 일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를 회복시키시는 것이며, 예배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위해서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에디오피아 강 저너머에서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나라, 민족을 넘어서 열방으로 하나님의 구원이 확장될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도 다른 배경과 형편을 가진 사람들이지만, 어깨를 나란히 하여 한 마음으로 예배하는 공동체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2. 사람을 회복하십니다. (3:11-12) 다음으로 공동체에서 교만한 자를 제거하시고(11절) ‘온순’하고 ‘겸손’한 사람을 남기심으로(12절) 순전한 공동체로 회복시키십니다. ‘온순’은 약하거나 낮은 사람을 말하고, ‘겸손’은 가난하고 고통받고 비천한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회복시키시는 공동체에는 교만한 사람이 사라지고 온순하고 겸손한 사람, 약하고 낮고 가난한 사람, 고통받고 비천한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꿈꾸시는 교회 공동체의 모습이고 행복한제자교회가 꿈꾸는 공동체 모습입니다. 우리 교회가 어떻게 이런 교회가 될 수 있습니까? 9-12절에서 “내가 ~깨끗하게 할 것이다.” “내가 모으겠다.” “내가 ~없애 버리겠다.” “내가 ~남길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 교회를 재송동에 세우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이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3. 평안을 회복하십니다. (3:13) 13절은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신 공동체의 모습을 아름답게 보여줍니다. 먹는다는 원어의 의미는 양이 꼴을 먹는 것을 말하고 편히 쉰다는 것은 드러눕는 것을 말합니다. 양들이 푸른 초장에서 평화롭게 풀을 먹고, 드러누워 있는 모습입니다. 양들이 이렇게 위협을 받지 않고 두려움 없이 먹고 쉴 수 있는 것은 목자이신 하나님이 양들을 보호하고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목자 되신 하나님을 믿고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이 축복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행복한제자교회는 목자되신 하나님을 믿고 따름으로 영혼이 만족하고 마음의 쉼을 얻는 축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목자는 양을 떠나지 않습니다. 목자는 양에게 필요한 꼴과 물을 찾아갑니다. 목자는 위험으로부터 양을 지킵니다. 우리 삶에도 여전히 어려움과 위협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위협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누가 우리와 함께하느냐입니다. 목자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평안한 것은 위협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목자되신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평안할 수 있습니다.
- 내가 원하는 하나님, 성경의 하나님스바냐 1:1-6 성경에서 ‘심판’이라는 단어는 ‘새번역’의 경우 구약 152회, 신약 148회, 모두 300번이 나옵니다. 이것은 심판이 성경의 중요한 주제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많은 신학들이 이성과 논리에 따라 내가 원하는 하나님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심판과 지옥을 말하지 않고, 십자가의 죄사함도 부인합니다. 복음은 내가 원하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말씀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오늘은 복음을 왜곡하는 신학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심판을 지우는 신학, 자유주의 신학 스바냐는 요시야 왕 때 사역하였고 고조부가 히스기야(왕)라고 소개합니다. 요시야 왕과는 인척 관계인 것을 말하며, 이 관계는 요시야에가 종교 개혁을 일으키는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요시야의 종교개혁에도 불구하고 유다의 심판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스바냐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땅 위의 모든 생명을 쓸어 없애는 심판을 말합니다(1:2-3).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인간의 분노와 동일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화가 나서 다른 사람을 심판할 때에는 미움과 복수심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죄를 심판하시는 것은 미움과 복수심 때문이 아니라 죄를 죄로 판단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시고 어둠이 없으시므로 분노와 미움, 복수로 심판하실 수 없습니다(요일 1:5). 빛이 어둠을 사라지게 하듯이 빛이신 하나님은 어둠인 죄를 심판하십니다.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심판과 지옥을 지웠습니다. 심판을 지우면 십자가도 지워집니다. 한 신학자가 자유주의 신학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심판하지 않는 하나님이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죄 없는 인간을 심판 없는 왕국으로 인도하셨다." 심판과 지옥을 부정하면, 천국 문이 닫힙니다. 2. 고난을 지우는 신학, 번영 신학 예루살렘 성전 안에 바알 신상을 세웠고 ‘그마림’이라 부르는 제사장도 있었습니다. 유다가 이렇게 바알에 목을 맨 것은 농사 지으면 비를 풍족히 내려 풍년들게 해준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번영 신학이 현대판 바알입니다. 조엘 오스틴이 쓴 ‘긍정의 힘’에서 그는 긍정적인 사고가 복받는 비결이라고 말합니다. 그에게 고난은 실패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심판, 예수님의 십자가, 지옥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복음을 위해 고난과 핍박받는 것을 말하고, 믿음의 시련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번영 신학에서 벗어나려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삶(마 6:33)’을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의식주를 염려하는 것에서 벗어나고 하나님의 공급을 경험하며 번영 신학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3. 예수님의 유일성을 지우는 신학, 종교 다원주의 유다에는 하나님도 섬기고 밀곰(말감, 몰렉)도 섬기는 종교 혼합주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 450명과 벌린 대결을 통해서 살아 역사하시는 분은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 뿐이신 것을 보여주셨고 혼합주의 신앙을 금하셨습니다(왕상 18장). 종교 혼합주의는 다원주의로 연결됩니다. 모든 종교는 가는 길만 다를 뿐이고 마지막 구원은 같다는 주장이 ‘종교 다원주의’입니다. 세계교회협의회(WCC)도 종교 다원주의를 주장합니다. WCC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과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원의 길인 것을 부인합니다. 종교 다원주의로부터 승리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유일하신 구원의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시라는 것을 붙드는 것입니다(요 14:6). 결론적으로 복음은 내가 원하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 무엇을 자랑합니까?갈라디아서 6:12-18우리는 모두 자랑하며 살아갑니다. 외향적인 사람은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내향적인 사람은 조용히 표현할 뿐,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누구나 자랑합니다. 자랑은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 나를 알아주세요”라는 외침이며, “나는 가치 있는 존재입니다”라는 인정을 받고자 하는 인간의 깊은 욕구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자랑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1. 육체를 자랑하는 사람 12절에서 말하는 “육체의 겉모양을 꾸미려 한다”는 표현은 할례를 의미하며, 그것을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종교적 행위를 가리킵니다. 바울은 할례를 강요하던 자들의 숨은 의도를 두 가지로 밝힙니다. 첫째, 그들은 할례를 통해 유대 율법주의자들의 핍박을 피하려 했습니다. 십자가를 택할 때 오는 유대인들의 핍박을 면하기 위해 할례를 택하였습니다. 둘째, 율법의 본질과 정신은 놓친 채, 얼마나 많은 사람을 개종시켰는지를 자랑하기 위함이었습니다(13절). 교회의 역사 속에서도 동일한 실수가 반복되어 왔습니다. 유럽의 웅장한 성당들은 신앙의 열심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형식이 본질을 가릴 수 있음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가정교회도 형식과 방법을 붙드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붙들어야 합니다. 성경은 교회를 가족 공동체로, 교회의 사명을 영혼 구원과 제자 삼는 일로 분명히 말합니다. 이 방향이 분명할 때, 그에 맞는 방법과 형식은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방향은 기관차와 같고, 방법과 형식은 객차와 같아서, 기차를 끄는 힘은 언제나 기관차인 방향에서 나옵니다. 2. 십자가를 자랑하는 사람 당시 ‘십자가’라는 단어는 입에 담기조차 꺼려지는 가장 수치스럽고 혐오스러운 표현이었습니다. 그런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상 “나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선언과도 같습니다. 바울은 혈통, 가문, 학문, 그리고 사도로서의 업적과 열매를 생각해 보면 누구보다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은 겸손해서가 아니라 그에게 세상은 죽은 것이고 자신도 죽었기 때문에 세상은 더 이상 자신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14절). 나와 세상이 함께 죽을 때, 비로서 진짜 중요한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종교적 형식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새롭게 창조되는 삶입니다(15절). 바울이 세상이 혐오하던 십자가를 자랑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고, 그 부활의 능력에 이르기를 간절히 소망했습니다(빌 3:10–11). 그렇기에 자신의 몸에 남은 수많은 매질과 돌에 맞은 상처를 부끄러운 흔적이 아니라 “예수의 흔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3. 개인 적용
- 낙심하지 맙시다.갈라디아서 6:7-10우리는 살아가면서 낙심을 자주 경험합니다. 낙심하는 이유는 다양하지만, 대부분은 기대한 대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찾아옵니다. 낙심이 위험한 이유는 우리의 의욕을 꺾고, 무기력하게 만들며, 결국 주저앉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오늘 본문 9절에서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맙시다.”라고 권면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낙심하지 않고, 선한 일을 끝까지 계속할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함께 묵상해 보겠습니다. 1. 선한 일을 하다가 바울이 말하는 “선한 일”은 단순히 도덕적으로 착한 행실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앞선 문맥에서 말하는 것처럼, 이는 ‘성령에 심는 삶’을 가리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열매 맺는 삶,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고, 죄에 빠진 형제를 바로잡아 주며, 서로의 짐을 함께 지는 삶을 뜻합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삶을 살려 할 때 낙심이 찾아옵니다. 바울은 누구보다 낙심할 만한 일을 많이 겪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방으로 죄어들어도 움츠러들지 않으며”(고후 4:8)라고 고백하는데, 여기에는 고린도교회와의 깊은 갈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로 인해 바울은 극심한 고통과 마음의 상처를 경험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박해를 받았고, 거꾸러뜨림을 당했습니다(고후 4:9), 이는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고, 39대의 곤장을 맞았고, 세 번이나 배가 파선되어 바다에 표류했습니다. 강도의 위협, 굶주림과 추위, 헐벗음까지 겪은 것을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낙심하지 않고 망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2. 지쳐서 넘어지지 아니하면 바울이 낙심하지 않을 수 있었던 비결은 그의 강인한 정신력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을 질그릇이라고 고백합니다(고후 4:7). 그러나 그 질그릇 안에 담긴 보배, 곧 하나님의 엄청난 능력이 그를 붙들고 있었기에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내 힘으로 버티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낙심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힘도, 포기하지 않는 인내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공급되는 은혜와 능력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바울이 자신의 고난을 “지극히 잠깐 받는 가벼운 고난”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영원하고 큰 영광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고후 4:17-18).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영원한 천국 상급을 바라볼 때, 우리는 지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의 경주를 완주할 수 있습니다. 3. 때가 이를 때에 거두리라 농부는 씨를 뿌릴 때 수확 시기를 예측할 수 있지만 영적인 일은 심기는 하지만 거둘 때를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반드시 거두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열매를 다 맛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소망은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고전 15:19). 만약 부활과 영생이 없다면,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일 것이며, 차라리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 인생이니 오늘 먹고 마시자”하는 것이 낫습니다(고전 15:32). 우리가 주님 안에서 드리는 모든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고전 15:58). 헛되지 않다는 것은 이 땅의 보상이 아니라, 천국 상급을 말합니다. 우리가 천국 상급을 바라볼 때 낙심하지 않고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4. 개인 적용
- 신앙생활에서 갈등을 느끼는 이유갈라디아서 5:16-25예수님 믿고 나면 일어나는 변화 중에 하나가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입니다. 점을 보거나 부적을 붙이는 것이 찜찜해지고, 화내고 욕하는 것이 불편해집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부담이 되고, 다른 사람을 속이거나 거짓말을 하면 양심이 찔립니다. 그러다 보면 “예수님 믿고 갈등이 더 많아졌습니다.” “신앙생활이 어렵습니다.”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오늘 본문에서는 왜 갈등이 생기고, 이 갈등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왜 갈등이 생기는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았지만, 믿고 나면 성령께서 새 욕구를 주십니다. 그런데 이 둘은 서로 적대 관계이기 때문에 충돌이 일어납니다(갈 5:17). ‘갈등(葛藤)’이라는 단어가 칡과 등나무가 얽혀 있는 모습을 뜻하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에도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뒤엉켜 씨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갈등은 신앙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을 닮아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건강한 증상입니다. 2. 바울도 겪은 갈등 바울 역시 이 내적 싸움을 겪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동시에 자신 안에 있는 죄의 법이 끊임없이 싸우고 있다고 말합니다(롬 7:22-23). 여기서 ‘싸운다’는 표현은 단순한 언쟁이 아니라 죽고 죽이는 전쟁을 의미합니다. 그 싸움의 결과로 자신이 죄의 법 아래 끌려가는 모습을 보며 바울은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라고 탄식했습니다(롬 7:24). 중요한 것은, 이 고백이 바울이 예수님을 믿은 지 약 20년이 지난 후에 나온 말이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갈등은 미성숙한 신앙의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살아 있다는 증거이고, 믿음이 약해서가 아니라 성령님이 일하신다는 증거입니다. 3. 갈등에서 승리하는 두 가지 길 1)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는 결단: 바울은 먼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다”(갈 5:24)고 말합니다. 여기서 ‘십자가에 못박는다’는 말은 단순한 종교적 표현이 아니라 단호하고 철저하게 죄를 죽이겠다는 영적 결단을 뜻합니다. 죄는 줄이려고 해서는 이길 수가 없습니다. 다시 살아나서 나를 지배합니다. 만약 나를 계속 괴롭히는 죄가 있다면, 회개와 함께 “이 죄를 십자가에 못박겠다”는 분명한 태도가 필요합니다. 2)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삶: 바울은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명합니다(갈 5:16). 육체의 욕망을 이길 수 있는 힘은 우리의 의지나 결심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입니다(롬 8:13). 성령님은 우리에게 생각나게 하시고, 가르치시고, 깨닫게 하시며(요 14:26),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을 비추어 인도하십니다(고전 2:9-10). 우리가 성령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성령의 음성을 믿지 않거나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음성 앞에 나의 지(知)·정(情)·의(意)를 내려놓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성령충만입니다. 성령충만은 성령님이 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지배하시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이며(엡 5:18),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사모해야 합니다. 성령충만을 받기 위해서는 성령님을 진심으로 사모하고, 생각나게 하시는 죄를 회개하며, 순종하라고 하신 일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럴 때 성령충만한 삶을 살고, 그 결과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갈 5:22-23)가 자연스럽게 우리의 삶에 열리게 됩니다. 4. 개인 적용
-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출애굽기 20: 1~11십계명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 세가지(사도신경-믿음, 주기도문-소망, 십계명-사랑) 중 하나입니다. 사도신경은 우리가 무엇을 믿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답을 주고, 주기도문은 우리가 어떤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줍니다. 십계명은 기독교의 핵심인 ‘사랑’에 관한 것으로 1~4계명까지는 ‘하나님 사랑’에 대한 계명이고, 5~10계명은 ‘이웃 사랑’에 대한 계명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1~4계명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가’를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제 1계명 –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1계명은 가장 먼저이고, 가장 중요하며, 십계명 전체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신을 섬기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고 예배하라는 뜻인데 여기서 말하는 다른 신은 인간이 만든 거짓 신들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외에 다른 신 앞에 가서 빌지는 않아도 성공의 신, 학벌의 신, 재물의 신 등에 자기 마음을 빼앗겼거나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 됩니다. 2. 제 2계명 – 어떤 우상도 만들지 말고,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 형상을 만들고서는 우리를 이집트에서 인도해 내신 우리 하나님(엘로힘)이라고 불렀습니다(창 32:4). “하나님만을 섬기라” 하는 것은 자기 생각, 자가 방식대로 믿음생활 하지 않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 예배자로 살아야함을 강조합니다. 또한 2계명은 하나님 외에 어떤 것에도 절하지 말라, 즉 세상의 어떤 우상(힘, 권력) 앞에서도 무릎 꿇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일제강점기 때 신사참배의 강요에도 끝까지 무릎 꿇지 않은 신앙의 선배들이 있었고, “나에게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다 주겠다.” 는 마귀의 시험에 예수님은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섬길것이라”(눅 4: 7~8) 며 결코 무릎꿇지 않았습니다. 3. 제 3계명 –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헛되게) 부르지 말라. 하나님은 모세를 부를 때,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을 때 자기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곧 그분의 존재와 영광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은 진실한 기도와 찬양을 할 때 그 이름을 합당히 사용하여 영광을 돌려야 하며, 저주나 악담, 농담 등에 함부로 그 이름을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3계명은 하나님을 함부로 말하지 않는 것과 더불어 진심으로 하나님을 찾고 구하며 그 이름을 찬양하는 삶이 되어야 함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4. 제 4계명 –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를 기념하는 날이며(11절), 또한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념하는 날(신 5:15)입니다. 우리가 안식일을 기억하고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만이 세상의 참 주인이시며, 참 신이심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의 참된 의미는 영적인 회복이 일어나는 것이며 이것은 예배를 통해서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예배를 통해 내 삶의 분주함을 멈추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묵상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기를 다시 결심하는 것이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5. 개인 적용
- 구원은 누구의 손에 있는가?갈라디아서 5:1-15예수님을 믿고 나서 신앙 성장을 위해서 구원의 확신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뜻을 따라 살았는데 실패할 때, 인생이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갈 때, 죄를 짓고 죄책감에 시달릴 때는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맞는지 의심이 들고 구원의 확신이 흔들립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과연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인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예수님이 주신 자유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우리를 자유케 하기 위해서입니다(1절). 바꾸어 말하면, 예수님을 믿기 전에 우리에게는 자유가 없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종살이의 멍에라고 표현합니다. 사람들은 자유를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자유는 ‘원하는 선을 선택할 수 있고, 원하지 않는 죄를 거부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실제로 그렇지 못합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 염려, 근심, 두려움, 죄책감 속에 묶여 살아갑니다. 이러한 결박으로부터 진정한 자유를 누리려면 주의 영, 곧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셔야 합니다(고후 3:17).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며 하나님 뜻대로 살고 싶은 욕구를 주시고 능력을 주시기 때문입니다(빌 2:13). 2. 구원을 잃을 수 있습니까? 바울은 예수님이 주신 자유를 율법으로 대체하려고 하면 그 자유를 잃어버릴 수 있을 뿐 아니라 율법 전체를 지켜야 하는 무거운 짐까지 지게 된다고 말합니다(2-3절). 더 나아가 그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지게 된다고 경고합니다(4절). 이 구절 때문에 ”그렇다면 성도도 구원을 잃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한국 교계에 큰 영향을 준 신학 자 김세윤 교수는 ‘유보적 칭의론’을 주장하며, 구원받은 성도라도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지 않으면 구원을 잃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의 주장이 옳다면, 바울이 5절에서 말한, ”믿음으로 의롭다고 하심을 받을 소망을 간절히 기다린다“는 말과 연결되지 않습니다. 성경은 성도의 구원이 우리 손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강조합니다(요 10:28-29). 바울이 은혜에서 떨어졌다고 말한 것은 구원을 잃는다는 말보다, 마치 집을 떠나 방탕하게 살던 탕자처럼 은혜의 자리에서 벗어난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관계는 끊어지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집 안에 누릴 복을 스스로 떠난 것입니다. 3. 신앙생활에서 자주 묻는 두 가지 질문 1) “믿기만 하면 마음대로 살아도 구원받습니까?” 이것이 바로 ‘구원파’의 주장입니다. 믿음만 있으면 행동은 상관없다고 하여 믿음을 절대화시킵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지만 이 자유는 육체가 원하는대로 방종하는 자유가 아니라(13절), 이웃을 사랑하고(14절), 서로 해치지 않는 삶으로 이어진다고 말합니다(15절). 정말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믿는 사람은 육체의 정욕을 따라 마음대로 살 수 없습니다. 2) “잘 믿던 사람이 이단으로 빠지면 구원을 잃은 것입니까? 사도 요한은 자신과 함께 사역하다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사람의 무리에 속한 사람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다고 말합니다(요일 2:18-19). 이단에 빠졌다가 다시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은 믿음을 버린 것이 아니라 믿은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4. 개인 적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