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S
말씀
- 돌아갈 집이 있으면 여행이 즐겁습니다.요한복음 14:1-11예수님의 제자들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피를 못 잡고 있었을 것입니다. 마음을 짓누르던 근심은 마침내 주체할 수 없는 공포로 돌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에 예수님은 이렇게 권면해 주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1절) 여기에서 근심하지 말라는 말씀은 “너희가 마음속으로 고통하고 번민하는 것을 이제는 그만둬라. 왜냐하면 내 하나님 집에 있을 곳이 많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처소를 마련하고 다시 오리라 그 첫 번째 권면의 말씀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본문 말씀의 의미는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라. 내가 지금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가지 않느냐? 그리고 마련하면 다시 올 것이다. 하나님을 믿느냐? 나를 믿어라. 그러면 너희 마음에서 근심이 떠나갈 것이다.” 천국 문을 활짝 열어놓으신 후에는 다시 오셔서 우리를 그 나라로 인도하실 것이므로 근심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천국은 우리가 세상에서 가슴에 안고 씨름하는 모든 문제에 대한 완전한 해답입니다. 천국은 우리가 세상에서 입고 있는 손해, 원통함, 분한 모든 것들에 대한 완전하고 충분한 보상입니다. 그 나라에 가면 우리의 마음에 있는 응어리들이 다 풀리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엄청난 것으로 보상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유일한 권위자 둘째로는, 예수님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천국 이야기를 들려주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땅에서 난 우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분입니다. 천국에 계시다가 이 땅에 오셨기에 천국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유일한 권위자가 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신을 가리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없다.”(6절)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으로 인도하는 유일한 길이요, 천국에 대해서 가르쳐주는 유일한 진리요, 천국에서 살게 하는 유일한 생명입니다. 예수님 말고는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할 구원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만이 천국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자격자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내 아버지 집에 있을 곳이 많다.”고 하시면서 자신 있게 제자들을 위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행이 즐거우려면 여러분에게 자주 말씀드렸던 예화 중의 하나입니다. 아직 듣지 못하신 분들을 위하여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여행이 즐거우려면” 첫째는, 좋은 동반자와 함께 했을 때입니다. 그런데 나를 가장 사랑하시고 나에게 가장 유익한 것으로 채워주시는 주님과 동행하는 여행이야말로 가장 즐겁고 유익한 여행이 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짐이 가벼워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짐이 무엇일까요? ‘인생’이라는 짐보다 더 무거운 짐은 없습니다. 주님은 십자가 앞에 그 짐을 내려놓게 해주셨습니다. 셋째는, 돌아갈 집이 있어야 합니다. 그곳에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집은 하늘에 있는 것이며, 그곳에서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나를 반갑게 맞아주실 것입니다. 그곳에서 나는 사랑하는 주님을 만날 뿐 아니라,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시 만날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죽음이나 죄와 질병으로 인한 고통도 겪지 않습니다. 오직 신나는 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요한복음 13:36-3833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직은 자신이 그들과 함께 있겠지만 장차 그들을 떠나갈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무슨 말씀일까 궁금했을 것입니다. 드디어 베드로가 주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36절) 우리는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가보다는 ‘내가’ 어디로 갈 것인가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살 때가 많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하는 질문을 매일매일 반복하며 주님이 가시는 길을 나도 따라가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본질적인 의미에서의 신앙생활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야할 이유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야할 이유는 첫째로, 구원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없다.”(14:6) 구원을 받으려면 예수님만이 나의 생명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만이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가야 할 또 한 가지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세상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일단 내가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가지면, 그 다음에는 눈을 돌려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큰 뜻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큰 뜻은 세상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나를 통해서 내 이웃과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함으로써 세상이 구원받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 자아가 죽어야 따를 수 있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묻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다소 뜻밖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나중에는 따라올 수 있을 것이다.”(36절) 왜 주님은 이런 말씀을 하셔서 베드로의 기를 꺾어 놓으셨을까요?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그것을 위해 희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갖추어야할 중요한 요건이 하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보실 때 베드로는 아직 자아가 살아있었습니다. 그는 자신감에 불타있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베드로의 태도는 참 감동적인 자세요, 칭찬할 만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자아가 살아있으면 주님을 따라가기 어렵습니다. 여러분에게 자아가 아직도 살아있어서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없는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솔직하게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깨어진 자아에 깃드는 하나님의 은혜 예수님은 또 한 가지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지만, 후에는 따라올 수 있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후에는’이라는 말이 얼마나 긴 시간을 가리키는지 가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은 안 되지만 결국 나중에는 따라올 수 있게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지금’ 주님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그의 자아가 아직도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사랑하는 자에게는 자아가 깨어지고 꺾이는 과정을 허락하십니다. 징계를 통해서든지 아니면 어떤 사건을 통해서든지 간에 하나님은 자아를 꺾어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은혜가 무엇인가를 배우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라갑시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당신이 주님을 따라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주님께 순종합시다. 그리하여 주님을 따라가는 생애를 살아갑시다. 그것이 또한 행복한 삶의 비결입니다.
- 지금은 서로 사랑할 때요한복음 13:31-35예수님이 이와 같이 마지막 떠나는 장면에서 “서로 사랑하라”고 제자들에게 당부하실 때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이 생각하는 메시아인 줄 알고 3년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예수님이 처참하게 십자가에서 처형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그런 절망적인 상황 앞에서는 그들의 믿음도 파산하고 인격도 파산하고 꿈도 파산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이런 위기의 때에 제자들로 하여금 살아남게 하는 것은 사랑밖에 없다고 보셨을 것입니다. 그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사항을 꼭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위로하라 첫째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서로 위로해야 합니다. 골고다 현장에서 넋을 잃고 돌아온 제자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따뜻한 위로의 말 한마디였을 것입니다. 정말 지치고 낙담한 자에게는 위로의 말 한마디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따뜻한 위로의 말 한마디, 격려의 말 한마디가 우리의 사랑을 대변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서로’란 일차적으로 ‘제자들끼리’를 뜻합니다. 예수님은 거창하게 인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다른 누구를 생각하기에 앞서 3년을 동고동락한 제자들 상호간에 이 사랑을 실천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가까이 있는 남편이나 아내, 자녀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함께 예배드리거나 옆에 있는 믿음의 형제자매들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용서하라 둘째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는 것을 지켜본 제자들은 매우 불안했을 것입니다. 이럴 때 한 제자가 베드로를 보자 “자넨 수제자가 어떻게 사람들 앞에서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할 수 있는가?” 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런 너는 일찌감치 도망갔잖아?” 하며 베드로가 반응할 수도 있겠지요. 용서는 뒷전에 두고 서로를 탓하기에 급급하다 보면 가정이나 공동체를 그런 살벌한 분위기로 몰아갈 수 있습니다. 용서는 공동체가 깨어지지 않도록 하나로 붙여주는 접착제입니다. 용서가 넘치는 공동체는 절대 흩어지는 일이 없습니다. 용서가 넘치는 가정은 부부가 서로 나누이지 않습니다. 자녀들이 집밖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용서하고 서로 끌어안으면 어려운 위기도 함께 웃으면서 대처해 나갈 수 있습니다. 용서가 곧 사랑입니다. 인내하라 셋째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서로 인내해야 합니다. ‘사랑장’이라고 일컫는 고린도전서 13장은 진정한 사랑을 말하면서 인내를 여러 번 강조했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모든 것을 덮어 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험하고 가파른 인생길을 오르면서 함께 참는 것만큼 큰 사랑이 없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 꼭 실천할 일 세 가지는 서로 위로하고, 용서하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는 한평생 계속 의지적으로 실천해야 할 일입니다. 가족들끼리 나누는 사랑은 끝까지 가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은혜를 받아야만 그런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사랑의 은혜를 받아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를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가룟 유다가 주는 교훈요한복음 13:18-30우리 중에는 가룟 유다와 같거나 그와 같은 자가 될 것이라고 예상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으리라 믿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배워야할 값진 교훈이 있기 때문에 성경에 기록해 주셨을 것입니다. 물론 이런 종류의 교훈은 듣기 좋은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위기 속에서 지혜를 배우고 진정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기 원한다면 이러한 교훈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화려한 성공자를 통해서 교훈을 주시기도 하지만, 가룟 유다와 같은 실패자를 통해서도 음성을 들려주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가룟 유다 이야기가 듣기에 거북하다 할지라도 마음의 귀를 활짝 열고 하나님께서 바로 나를 위해 주시는 교훈으로 받아야 합니다. 돈을 사랑하다 망한 사람 첫째로, 가룟 유다는 돈을 사랑하다 망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복음서를 보면 가룟 유다의 이름이 등장하는 곳마다 돈 문제가 따라다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그였기에 돈에 대한 애착 역시 남달랐습니다. 돈에 대한 그의 욕심은 급기야 자기 스승인 예수님을 놓고 대제사장과 흥정하는 자리에까지 이르고 말았습니다. 그는 대제사장이 주는, 당시 노예 하나 값에 불과한 은 삼십을 황급히 자기 주머니에 넣고는 예수를 팔아넘길 기회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철저하게 돈의 노예가 되어 있었으면 그렇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도 우리 자신이 돈에 대해 지나친 애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닌지, 가룟 유다처럼 명예도 믿음도 다 팔아넘길 수 있을 정도로 돈에 끌려 다니는 사람은 아닌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자기 뜻을 고집하다 망한 사람 둘째로, 가룟 유다는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의 뜻을 더 고집하다가 망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열심당’이라는 정치단체에 소속되어 있던 사람으로, 예수님이 유대 나라를 로마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는 유일한 메시아라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무시한 채 끝까지 자기 뜻을 고집하다가 결국은 돌이킬 수 없는 멸망의 길로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영원한 천국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나라보다 이 세상 나라에 더 많은 매력을 느낍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의 뜻대로’라는 말을 수도 없이 하지만, 실제로는 그 뜻대로 순종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합니다. “주님, 주님 뜻대로 살기보다 내 뜻대로 살기를 더 좋아했습니다. 용서해 주옵소서.”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분별하여 그 뜻을 따르기를 힘써야 합니다. 경고를 무시하다 망한 사람 셋째로, 가룟 유다는 거듭 경고를 받았으나 회개하기를 거부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불과 몇 시간 전에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성만찬을 함께 나누던 자리에서, 가룟 유다에게 직간접적으로 다섯 번이나 경고를 보내셨습니다. 가룟 유다는 그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말을 듣고 일어나 나가 버렸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의 길로 발을 들여놓은 것입니다. 많은 경고가 있었고,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많았지만 끝까지 회개하지 않다가 결국 멸망의 길로 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때는 밤이었습니다.(30절) 경고를 하는데도 듣지 않고 끝까지 버티고 고집하는 사람이 문을 열고 나가는 곳에는 어두움이 깔려 있다는 것입니다. 멸망의 길은 어두운 길입니다. 경고를 받을 때에는 겸손히 그것을 받아들이고 회개하여 주님이 치유하시는 축복을 누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섬김의 본요한복음 13:1-17오늘날은 자기중심적인 사고가 정상적인 사고방식처럼 통하는 시대입니다. “내가 싫으면 안 한다. 내가 싫다는데 왜 그래?” 이런 말들은 현대가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으로 흐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어린아이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그와 같은 말들을 자연스럽게 할뿐 아니라 그대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자꾸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예수님은 듣기에 조금 거북하고 어색한 교훈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계십니다. “서로 발을 씻어주는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본문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처럼 나도 발을 씻어주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새롭게 다짐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서로 발을 씻기라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마지막으로 보내게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리에 앉으신 후에 제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을 들려주셨습니다. “주이며 선생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남의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과 같이 너희도 이렇게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14-15절) 다시 말해 “주이며 선생인 내가, 제자요 종인 너희의 발을 씻겼다면 너희끼리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 아니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선생이 발을 씻기는데 제자가 발을 씻기지 않고 뻣뻣하게 앉아있으면 그것은 자기가 선생보다 높다는 이야기밖에 되지 않습니다. 제자는 선생이 하는 대로 따라 해야 합니다. 이것을 잘 알고 행할 때 복이 있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17절) 높아질수록 낮아져라 예수님께서 발을 씻기신 행동에 내포되어 있는 구체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첫째는, 겸손의 표현입니다. 이제 하룻밤만 지나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시게 됩니다. 그리고 나흘이 지나면 예수님은 죄와 사망을 깨뜨리고 부활하시는 영광의 주님이 되십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영광과 권세가 자기에게 다시 돌아오는 것을 아는 그 순간에, 오히려 제자들 앞에 엎드려 대야에 물을 떠서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그야말로 겸손의 극치입니다. 사람이 높아질수록 낮아져야 되는 것이 주님의 교훈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본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영적 지도자가 될 때 가장 위험한 시험이 있다면 그것은 교만입니다. 진짜 겸손은 나에게 손해를 끼치는 자의 발, 염치없는 사람의 발도 씻겨줄 수 있습니다. 진짜 겸손은 교만한 자의 발을 씻길 수 있는 겸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겸손입니다. 예수 믿는 삶의 본질은 섬기는 것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첫째는, 겸손의 표현이고, 둘째는, 섬김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들어오면 모두가 다 예수님의 몸의 일부가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몸이요 다 그 지체입니다. 지체 중에 자기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는 지체는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몸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내가 섬기지 아니하면 내가 죽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에게 이 섬김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합시다. 예수님이 발을 씻겨주셨듯이 우리 모두 발을 씻기는 삶을 삽시다. 우리가 겸손하게 다른 사람을 섬기며 살 때 마음속에 기쁨의 샘이 솟아나고, 마음에 있던 병을 말끔히 씻어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많은 것들을 이미 받아 누리고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남의 발을 씻겨줄 때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당신의 가정, 직장,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이와 같은 복을 누리는 축복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Options
- 예수님의 ’끝까지’ 사랑요한복음 13:1예수님에게는 이제 제자들을 떠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하나님 나라로 다시 올라가실 날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 시간은 점점 짧아지고 사랑하는 제자들을 두고 가야 한다는 사실 앞에 예수님도 마음이 아프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까지 제자들을 사랑해 주셨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야 할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1절) 아직 하나님의 사랑을 잘 모르고 있다면, 오늘 본문 1절을 마음에 잘 담아두십시오. 그리고 “세상에 있는 나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이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고백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든든한 팔이 당신을 꽉 껴안아 주시는 은혜를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독점적 사랑 여기서 우리가 먼저 살펴보아야 할 내용은, ‘자기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자기 사람들’이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우리 모두를 일컫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이와 같은 엄청난 특권을 입은 자들입니다. 요한일서 4:10을 보십시오. “사랑은 여기에 있으니,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 주시고, 우리의 죄를 속하여 주시려고, 속죄제물이 되게 해주신 것입니다.” 진짜 사랑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해서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제물로 내어줄 정도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 자식이기 때문에 특별히 주시는 그런 사랑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우리를 사랑하신다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에서 ‘세상’이라는 말은 ‘이 세상’을 말합니다. 이 세상은 예수님께서 늘 안타깝게 여기시며 대단히 고통스러운 눈으로 보시던 세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도 양심의 가책조차 받지 않는 포악한 세상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수고와 슬픔이 존재하고, 그 속에서 한평생 살면서 한숨짓고 눈물 흘리면서 떠나야하는 그런 세상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죄 때문에 얼마나 고민하고 고통스러워하는지 잘 알고 계십니다. 수고와 슬픔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눈물과 한숨, 고통이 떠날 날이 없는 이 세상에서 내가 남모르게 울기도 하고 탄식하기도 하는 것을 주님이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있는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끝까지’ 사랑 이 ‘끝까지’라는 말은 ‘생명이 다하기까지’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라는 뜻도 되고, ‘제자들이 이 세상을 사는 마지막 날까지’라는 뜻도 됩니다. 더 나아가서는 ‘어떤 형편에서든지’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완전하게 사랑하시고, 영원히 사랑하신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깨달은 사람은 그 사랑을 힘입어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온전히 깨달은 사람은 그 용서를 힘입어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용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 때문에, 도저히 인간적으로는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고,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우리는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당신을 치료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끝까지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 거짓 믿음, 약한 믿음요한복음 12:34-43지난 3년 동안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오셔서 권세 있는 말씀을 전하시고, 이적과 표적을 베푸셔서 사람들의 모든 질병들을 치유하시고, 심지어 죽은 자까지 살리시는 엄청난 일을 보여주셨는데도 예수님을 믿고 돌아온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그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 행하셨으나, 그들은 예수를 믿지 않았다.”(37절) 왜 예수님 당시의 세대는 이적 기사를 보고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까요? 사람들은 예수님이 눈앞에 있어도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죄로 인해서 그 눈이 어두워져 있었습니다. 본문에는 두 가지 믿음이 나옵니다. 하나는 거짓 믿음에 대한 것이고, 또 하나는 약한 믿음에 대한 것입니다. 거짓 믿음 예수님 주변에 몰려 있는 많은 청중들은, 예수님께서 말씀 한마디로 일으켜 무덤에서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는 것을 눈으로 본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 중 다수는 그 기적을 보자마자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입니다.(11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들이 믿지 않았다”(37절)고 말합니다. 겉으로는 믿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들의 믿음은 거짓 믿음이었습니다. 분위기를 따라서 믿는 것처럼 행세하는 것은 다 거짓 믿음입니다. 이와 같은 거짓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잘 따진다는 것입니다. 질문이 많고 끝없이 논쟁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바른 말을 하면 잘 듣지 않고 자기 생각에 빠져 자기 말만 합니다. 마음은 닫아놓고 계속 의심에 사로잡혀 질문만 던지며 시비만 걸면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약한 믿음 또한 42절을 보면 매우 흥미로운 내용이 나옵니다. “지도자 가운데서도 예수를 믿는 사람이 많이 생겼으나.” 여기에서 지도자(관원)라고 하면 상당히 높은 계층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그 다음에 따라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바리새파 사람 때문에, 믿는다는 사실을 드러내지는 못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회당에서 쫓겨날까봐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믿기는 믿는데 바리새파 사람들이 두려워 자신의 믿음을 드러나게 말하지 못했습니다.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재산상의 손해를 입을 수 있고, 결국은 사회적으로 고립이 되는 핍박을 당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보다도 사람을 영광을 더 사랑하였다.”(43절)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이 항상 그 마음에서 가장 우선순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자신을 예수님보다 앞세웠고, 하나님보다 앞세웠습니다. 참 믿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 때문에 손해 보는 삶이라도 감수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 땅에서 환난을 당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순종과 열심을 가지고 예수님 알기를 사모하며 하나님 말씀 앞에 나오면, 그리고 그 말씀을 통해서 성령의 은혜를 체험하면, 당신의 작은 믿음이 큰 믿음으로 바뀌게 됩니다. 우리 모두에게 이런 은혜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마음속에 하나님보다 세상을 사랑하고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을 더 앞세우는 잘못된 것들이 완전히 뿌리 뽑히고 오직 예수, 오직 하나님,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일에 마음이 집중되는 참 믿음의 사람,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요한복음 12:20-33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 나라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땅에서 들려 올라갈 때에, 나는 모든 사람을 나에게로 끌어올 것이다.”(32절) ‘땅에서 들려 올라간다’는 말씀은 일차적으로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이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실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하여 재림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족속 중에서 구원받은 백성들이 구름 떼와 같이 주님 앞으로 몰려들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찌 입으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섬기고 따르십시오.”라는 말을 부담스러워할 수 있겠습니까? 종이 되라 예수님은 자기를 둘러싼 무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섬긴다’는 말은 헬라어로 ‘집사가 된다’라는 뜻으로, 집사는 시종을 드는 종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에는 첫째로, 예수님 자신처럼 종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 보좌에서 하나님으로서 누리던 그 모든 영광을 다 버리고 사람의 몸을 입고 종의 모양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죄와 사망에 짓눌리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친히 종의 모습으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계실 동안 아버지 하나님께 죽도록 충성하는 종으로 사셨습니다. 스승 되신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한평생을 종으로 사셨다면, 그의 제자 된 우리 역시 종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제자라면 당연히 스승을 본받아야 합니다. 주를 위해 포기하라 둘째로,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주를 위해 포기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모든 재산을 바치거나 선교사로 파송을 받는 것만이 헌신은 아닙니다. 헌신은 우리의 가정이나 일터나 교회에서 우리의 자아(ego)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이 그렇다면 그런 줄 알고, 성경이 그렇지 않다고 하면 그렇지 않은 줄을 아는 것입니다. 성경이 하라면 하고, 성경이 하지 말라면 하지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생활 속의 헌신이요 경건의 삶이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밀알 하나가 열매를 맺으려면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그와 같이 헌신에는 반드시 희생이 따릅니다. 그러나 밀알 하나가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습니다. 그와 같이 헌신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상급이 따릅니다. 썩는 밀알이 되라 셋째로,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예수님 자신처럼 썩는 밀알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실 때 한 알의 썩는 밀알로 하나님을 섬기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죽도록 충성하셨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24절) 이것이 예수님이 종으로서 충성하신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우리도 예수님처럼 썩는 밀알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위해 죽도록 충성해야 하는 종입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썩는 밀알로 희생하신 것처럼 우리도 희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많은 열매를 맺으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그 신분에 걸맞은 인생을 살다가 주님 앞에 서야 합니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하시는 칭찬을 꼭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 어린 나귀를 타신 왕 예수요한복음 12:12-19예수님은 베다니 나사로의 집에서 조용히 하루를 쉬시다가 그 다음날 한 가지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님은 성경 말씀에 따라 사셨고, 말씀에 따라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예언하신 대로 말씀을 이루고자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신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예수님께서 며칠 후에 처형되시기 전에, 유대 지도자들과 유대 백성들에게 자기들이 누구를 죽였는지 분명히 알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가심으로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만왕의 왕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겸손하신 왕 첫째로, 예수님은 겸손하신 왕입니다. 스가랴가 예언에서 특별히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셨다는 것입니다.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공의로우신 왕, 구원을 베푸시는 왕이시다. 그는 온순(겸손)하셔서, 나귀 곧 나귀 새끼인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슥 9:9) 겸손은 자신의 높음을 드러내지 않고 상대방의 처지로 내려앉아 함께 울고 함께 웃기를 기뻐하는 마음가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바로 이와 같이 겸손하고 온유한 왕이십니다. 나귀 새끼를 타고 죽음의 현장인 줄 알면서도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만왕의 왕이라는 것을 선포하셨던 예수님,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예수님, 그분이 내 곁에 계시다는 믿음 때문에 남이 울 수밖에 없는 자리에서도 우리는 웃을 수 있고, 남들은 불평하는 자리에서 우리는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희생하시는 왕 둘째로, 예수님은 희생하시는 양입니다. 유월절이 되면 수많은 양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끌려갑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던 날이 바로 그때였습니다. 수많은 양들이 예루살렘 성전 안으로 끌려들어가 따로 설치된 특별 구역에서 기다리다가 한꺼번에 다 죽임을 당해서 하나님의 제단에 올려지게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던 바로 그날, 그 양들 역시 죽임을 당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물로 바쳐지는 어린양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어린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모든 어린양들이 죽임을 당할 때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심으로 마지막 유월절 양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바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바로 나의 고통과 나의 형벌, 나의 저주를 대신 받아주시고 나를 거기에서 해방시켜 주시는 대속의 죽음이었습니다. 구원을 주시는 왕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왕이십니다.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것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24절) 예수님이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했습니다. 많은 열매는 세상의 구원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영원한 저주를 받고 멸망으로 치닫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습니다. 겸손하신 왕이요, 희생하신 왕이요, 구원하신 왕이신 예수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사랑하는 자여,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와서 쉬어라. 나는 너를 너무 사랑해서 너를 위해 죽었단다. 사랑하는 자여, 나는 너를 구원하기를 원한다. 영원한 생명을 네게 주기 원한다.” 주님의 이 음성을 여러분 모두가 들을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사랑의 헌신요한복음 12:1-11본문에는 헌신의 세 가지 모델이 나옵니다. 먼저 마르다입니다. 마르다는 주님을 위해 몸으로 헌신하는 전형적인 인물입니다. 둘째는, 나사로입니다. 그는 예수님 덕분에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입니다. 따라서 그는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사람들에게 자신을 살려주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입장에 서게 됩니다. 마지막은, 마리아입니다. 마리아는 자기가 애지중지하던 그 값비싼 향유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씻겨 드렸습니다. 참으로 독특한 헌신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떤 스타일이든 주님께 드려지는 헌신이기 때문에 아름답고 가치가 있습니다. 오늘은 마리아의 헌신을 살펴보겠습니다. 사랑은 값을 따지지 않습니다. 첫째는, 사랑으로 하는 헌신이기 때문에 마리아는 주님께 최고의 것을 드렸습니다. 진정한 사랑을 하면 상대방에게 최고의 것을 주게 됩니다. 마리아는 자신이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향유 옥합을 깨서 예수님의 머리와 발에 부었습니다. 마리아는 당시 노동자가 일 년 동안 수고해서 벌 수 있는 금액에 해당되는 300데나리온을 주님께 드린 것입니다. 사랑은 값을 묻지 않습니다. 계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다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네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나를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우리 자신의 최고의 것을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최고의 것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분이십니다. 그 자신이 우리를 위해 모든 것, 최고의 것, 완전한 것을 다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둘째로, 사랑으로 하는 헌신이기 때문에 마리아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주님께 드렸습니다. 마리아는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와 발에 부은 뒤 자기의 머리털로 그 발을 씻었습니다. 이것을 보고 가룟 유다는 속에서 분을 내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미지근한 태도에 맞추려고 자신의 뜨거운 열정의 온도를 낮춰서는 안 됩니다. 입으로는 ‘주여, 주여’ 하면서 자신의 옥합을 주께 드리는 데는 인색하기 그지없는 그런 사람들의 헌신과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면 남의 이야기에 신경 쓸 것 없습니다. 우리 마음을 주께 드리면 그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그것을 받으신 주님께서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엄청난 축복을 주실 것을 믿으십시오. 이 축복은 주님께 드린 자만이 알 수 있는 놀라운 은혜요 축복입니다. 사랑의 우선순위 셋째로, 사랑으로 하는 헌신이기 때문에 마리아는 주님께 최우선으로 드렸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 조금이라고 동참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고 찬양하고 예배하고 높이는 일을 가장 앞세웁니다. 예수님을 예배하는 것과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것을 혼동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최우선순위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바로 이와 같은 소중한 교훈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 드리기에 주저하게 되는 것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주님은 여러분에게 아직 덜 중요한 분이시라는 증거입니다. 여러분이 아직 주님을 덜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랑하는 주님, 나를 사용하여 주십시오.” 하는 마음으로 여러분의 옥합을 깨뜨리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