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S
말씀
- 예수님의 죽음과 장례요한복음 19:31-42영국의 유명한 신학자인 마이클 그린이 예수님의 죽음을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비교하여 쓴 글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소크라테스는 몇 가지 점에서 유사합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어디까지나 한 개인의 죽음으로서 선한 죽음이요, 감동을 주는 죽음에 지나지 않은 것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인간의 어떠한 이론으로도 설명할 수 없고, 증명할 수 없는 깊은 진리를 담은 유일한 죽음, 오직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임을 우리는 분명히 믿습니다. 신비한 구약예언의 성취 빌라도는 군인들을 보내어 죄수들의 다리를 꺾도록 하였습니다. 다리를 꺾으라는 명령을 받은 그들로서는 예수님의 다리를 꺾었어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이 성취되는 기가 막힌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메시아를 찌른 자들이 그를 볼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에 예수님을 찌른 죄인들이 예수님을 볼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예언대로 군인들은 예수님의 허리를 찔렀습니다. 구약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한 모든 예언들이 이렇게 성경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군인들의 생각 없이 하는 행동을 통해서 하나하나 성취되는 것을 보면 신비하기까지 합니다. 확실히 돌아가셨다 군인들이 예수님의 허리를 창으로 찌르자 거기에서 피와 물이 쏟아져 내렸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흘리신 물과 피는 우리를 용서하시는 피와 우리를 씻는 물을 상징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피와 물을 쏟으셨다는 것을 요한이 특별히 증언하는 그 배후에는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확실히 죽으셨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가장 비참하게 죽으시면서도 원망 한마디 하지 않으셨고, 금방이라도 십자가에서 뛰어내릴 수 있는 능력과 권세를 가지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죄 짐을 다 담당하기 위해서 끝까지 참으셨으며, 결국에는 자기 생명까지 송두리째 제물로 드리신 주님의 그 놀라우신 사랑과 은혜를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가득 담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요셉과 니고데모를 통한 하나님의 섭리 요셉 때문에 예수님은 부자가 들어갈 무덤에 장사되었습니다. 이것은 이사야 53:9의 예언대로 부자 요셉이 새 무덤을 파두었다가 예수님을 거기에 묻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던 그날, 니고데모는 향료를 백 근이나 가지고 왔습니다. 니고데모가 이렇게 많은 양의 향료를 단시간 내에 준비할 수 있었던 것도 기적이고, 한 번도 사람을 묻지 아니한 새 무덤을 십자가가 있던 골고다 주변에 갖고 있었다는 것도 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들도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믿는다고 말하지 못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함으로 우리의 삶의 지표를 바로 정하고, 십자가의 은혜를 아는 사람답게, 그 은혜에 감격한 사람답게, 십자가를 통해 쏟아지는 그 하나님의 사랑에 흠뻑 젖은 사람답게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에게 이와 같은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 다 이루었다요한복음 19:17-30로마 군인들의 마음은 칠흑 같은 무지의 어두움으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분이 누구인지 또 그분이 왜 죽으셔야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저주스러운 무관심이 온통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로마 군인들이 모습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우리가 이렇게 소망이 없을 만큼 악했기에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그 고결한 피를 흘리며 죽으셔야 했습니다. 왜 하필이면 십자가를 율법을 범하여 율법의 저주 아래 놓여있는 우리를 구해내기 위해 예수님이 우리 대신 저주를 받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늘 나와 같은 죄인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죽음을 당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선한 구석이 남아있었다면 주님이 그렇게 십자가에 죽을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볼 때마다 이 사실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전혀 소망이 없을 만큼 악했기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 고결한 피를 흘리며 죽으셔야 했습니다. 내가 목마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여러 시간을 고통하시다가 신음처럼 한마디를 하셨습니다. “내가 목마르다.”(28절) 흔히들 목이 탈 때의 고통을 일컬어 죽음의 고통이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예수님께서 당하셨던 그 고통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나의 기력이 옹기처럼 말라버렸고, 나의 혀가 입천장에 붙어 있으니, 주께서 나를 흙속에서 죽도록 내버려 두셨기 때문입니다.”(시 22:15) 물이 귀한 광야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이 갈증의 고통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자주 체험합니다. 주님이 일평생 당하신 고통과 마지막으로 십자가에서 한꺼번에 당하신 그 모든 고통은 바로 우리의 고통을 친히 체험하시는 과정이었습니다. 다 이루었다 “다 이루었다”는 짧은 한마디 안에는 엄청난 하나님의 진리가 들어있습니다. 십자가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게 이 한마디는 죽어가는 한 사람이 마지막으로 지르는 외마디 비명처럼 들렸을지 모릅니다. 한 맺힌 절규처럼 들렸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있어서 그것은 승리의 외침이었습니다. “나는 이겼노라. 나는 해냈노라. 드디어 나는 완주했노라.”는 승리의 외침이었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말에 담긴 의미 “다 이루었다”는 말에는 세 가지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첫째로, 타락한 세상을 구원하려고 하신 하나님의 영원하고 장대한 계획이 완성되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주님이 “다 이루었다”고 외치는 순간, 아무도 접근할 수 없게 막아두었던 지성소의 휘장이 둘로 갈라졌습니다. 그 결과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서 담대하게 지성소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셋째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리는 데 성공하셨다는 뜻입니다. “다 이루었다”는 말은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희생적이고 무조건적이고 영원한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분명히 보여주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 놀라운 사랑의 섭리요한복음 19:1-16우리는 십자가의 주님을 생각할 때마다 감격의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고난 주간에만 그럴 것이 아니라 한평생 나같이 저주받은 죄인을 구원해주신 십자가의 주님을 자랑해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기뻐해야 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마음을 쏟아놓아야 합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섭리 목적을 두시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과정을 미리 다 정하시고, 그 뜻을 따라서 이끌어 가시는 것, 이것이 바로 섭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도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요 섭리였습니다. 대제사장들과 그 추종자들의 악한 의도와 증오에 찬 행동을 통해, 하나님께서 미리 정해 놓으신 뜻이 하나하나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 신비스러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려고 강압적으로 그들을 충동질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자유의지를 모두 인정하여, 자발적으로 행동하도록 내버려두셨습니다.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사랑 이와 같은 사실을 놓고 깨닫게 되는 은혜가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은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은혜라는 사실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소리치면 칠수록 하나님의 사랑은 더 풍성해졌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지독하게도 미워한 나머지 그를 십자가에 못 박기 원했고, 또 그렇게 했지만, 하나님은 사람들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 원하셨고, 또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증오를 이겼습니다. 역전의 법칙 둘째는,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악을 선용하십니다. 하나님은 악을 다스리십니다. 사탄도, 악인도 모두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악인을 세상에 남겨놓으신 것은 그들도 쓸모가 있고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악이 선으로 바뀌는 사례는 인류역사 속에도 참 많이 나타납니다. 유명한 역사가 토인비는 이런 사실을 가리켜 ‘역사의 역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것을 ‘역전의 법칙’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없애기 위해 사용했던 십자가 처형이 오히려 세상을 구하는 능력이 된 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예입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자시다 셋째는, 예수님만이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하실 구원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는 은혜입니다. 예수님이 죄가 없다는 것은 재판석상에서 명백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죄가 없다는 사실을, 놀랍게도 예수님의 원수들이 자기 입으로 그것을 명백하게 증명했습니다. 먼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이 죄 없는 분이심을 증명했습니다. 또한 빌라도의 아내가 이 사실을 말했습니다. 빌라도 자신도 예수님의 무죄를 증명했습니다. 헤롯 왕 역시 예수님의 죄를 밝혀내지 못하고 자기에게 끌려온 예수님을 다시 빌라도에게 보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총지휘를 했던 백부장도 이를 증명했습니다. 십자가 사건이라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섭리를 통해서, 우리의 죄 값을 우리를 대신하여 치러 주신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확신할 수 있습니다.
- 아버지께서 주신 잔요한복음 18:1-11예수님은 자기가 당해야 하는 십자가 고난을 일컬어 ‘잔’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 너무나 고통스러운 잔을 목전에 두고 주님을 그 잔을 마시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꼭 해야 될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였습니다. 그 잔은 기도로 준비하지 아니하면 도무지 마실 수 없는 잔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 들어가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신 잔 십자가에 매달려 사형을 당하는 것은 몸의 진액이 다 빠져나가는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죄인된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아버지께 순종하여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또한 십자가에 매달려 주는 일은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로마 사람들도 자기 나라 사람들은 십자가에 매달지 아니하고, 다른 나라 사람들도 극악무도한 죄인에게나 처하는 사형방법이었습니다. 그만큼 십자가형은 매우 고통스러울 뿐만 아니라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히브리서를 기록한 사람도,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히 12:2)라고 기록을 하였습니다. 기꺼이 마시셨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목숨을 빼앗긴 것이 아니라 스스로 버리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다.”(요 10: 11) 또 10:18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도 내게서 내 목숨을 빼앗아 가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원해서 내 목숨을 버린다.나는 목숨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 이것은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명령이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기꺼이 자기 생명을 내놓으셨습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 저주와 심판의 잔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기꺼이 다 마시셨습니다. 홀로 마시셨다 예수님은 ‘혼자서’ 그 잔을 마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구원자로 지명하여 보내신 분은 예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외에는 이 세상의 죄를 씻어내기 위해서 피 흘릴 수 있는 어떤 자격자도 없습니다. 우리의 죄를 담당할 수 있는 어린 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오직 그분만이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의 잔이요, 심판의 잔인 십자가의 잔을 마실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도 나누어 마실 수 없는 잔입니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인간의 죄를 대신 담당하기 위하여 죽은 사람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러주시기 위하여 죄 없는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억울함에도 마시셨다 예수님은 ‘억울함에도’ 그 잔을 마시셨습니다. 주님은 우리 손에 있는 죽음과 진노의 잔은 자신이 마시고, 우리에게는 영생의 잔과 축복의 잔을 들려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그 죽음의 잔을 억울함에도, 기꺼이, 홀로 마시셨습니다. 내가 마셔야할 그 쓴잔을,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대신하여 마셔주셨다는 사실 앞에 우리는 얼마나 감격해 있습니까? 마음이 얼음장처럼 굳어있는 분이 있다면 십자가의 사랑으로 녹아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미 주님을 믿고 있는 우리 안에는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이 은혜를 보답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있기를 바랍니다.
- 예수님의 기도가 응답되는 교회요한복음 17:6-26본문은 예수님께서 배반당하고 잡히시기 전에 기도하시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기도하셨고, 이어서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하여 주십시오.” 기도하신 내용을 보면, 예수님의 기도의 요점을 알 수 있습니다. 11절, “우리가 하나인 것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17절, “진리로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주십시오.” 21절,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여 주십시오.” 하신 기도가 바로 그것들입니다. 1.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먼저 하나님의 관계에 대해서 기도하셨습니다. 그 요점은 “아들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 주십시오.”였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하라고 맡기신 일을 완성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고 생활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을 위한 기도 중 첫 번째는, 우리가 하나 되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하신 것처럼, 예수님은 먼저 아버지 하나님과 일체가 되셨습니다. 또한 그와 같이 우리 믿는 사람들이 하나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들이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되는 일은 반드시 이루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더구나 죄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 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2.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주십시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께 비셨습니다.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악한 자에게서 그들을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 순간,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데려가시거나 세상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예수님은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으로부터 구분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진리로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배가 산에 있으면 제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배는 물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배가 물에 가라앉아 있으면 역시 제 구실을 다하지 못합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들도 세상에서 떠나 있으면, 세상 사람들에게 영적 영향을 끼칠 수 없습니다. 세상에 있으되,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아니하고,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 때에 그들에게 거룩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습니다. 3. 세상이 믿게 하여 주십시오. 주님께서 우리를 주님의 자녀 삼아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는,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그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가지게 하여 주셨습니다.”(고전 1:9) 둘째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입니다. 주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을 믿고 거듭나게 되는 것을 원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로 택하심을 받은 족속, 왕과 같은 제사장, 거룩한 민족,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을 삼으신 이유는, 우리를 어둠에서 불러내어 주님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 분의 업적을, 우리가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한 마디로 하면, “영혼 구원하여 제자 삼는 일에 하나가 되자.”입니다. 이런 삶을 살 때에 우리는 예수님의 기도가 응답되는 교회를 이룰 수 있습니다.
- 재미와 편안인가, 기쁨과 평안인가?사사기 16:16-21삼손에 관한 이야기는 아이들과 읽기 민망할 정도로, 한 남자가 여자들에게 마음을 빼앗긴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딤나에 있는 한 여자, 가사에 있는 창녀, 소렉에 있는 들릴라가 바로 그 대상입니다. 그런데 그 귀한 성경에 왜 여러 장을 할애해서 이런 이야기를 기록하셨을까 궁금했습니다. 삼손의 약점이 바로 우리의 약점이고, 삼손이 만난 여자들의 간악한 마음이 바로 우리의 악한 마음이기 때문에 기록하셨을 것입니다. 1. 재미와 편안인가? 삼손이 소렉에 있는 어떤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는데, 그의 이름은 들릴라였습니다. 블레셋 통치자들이 삼손을 잡기 위하여 그 여자에게 엄청난 돈을 주며, 삼손을 꼼짝 못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내려고 하였습니다. “마음을 내게 털어놓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나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가 있어요?”라면서, 여자는 같은 말로 날마다 끈질기게 졸라댔습니다. 돈을 받고 자기를 팔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삼손은 재미 때문에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오래 전에 ‘불나비사랑’이라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얼마나 사무치는 그리움이냐, 밤마다 불을 찾아 헤매는 사연, 차라리 재가 되어 숨진다 해도, 아 너를 안고 가련다 불나비사랑.”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영원히 잡을 것이 없어서 그렇게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고, 나실인으로 구별된 삼손은 그러지 않았어야 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으로서 재미와 편안이 아니라 기쁨과 평안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2. 기쁨과 평안인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쁨을 주기 원하십니다. 그러나 사탄은 우리에게 그 모조품인 재미에 마음이 팔리도록 유혹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평안을 주기 원하십니다. 그러나 사탄은 우리에게 그 모조품인 편안을 추구하도록 유혹을 합니다. 하나님께 헌신된 그리스도인이라 하여 일부러 재미있는 삶과 편안한 삶을 멀리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기쁨과 평안이 빠진 재미와 편안한 삶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 아닙니다. 평생 재미와 편안을 추구했던 사람이라면 솔로몬을 들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는 “내가 시험 삼아 너를 즐겁게 할 것이니, 너는 네 마음껏 즐겨라.” 하면서 일생을 보냈습니다. 술로 육신을 즐겁게 하고, 낙을 누려보려고 했습니다. 궁전도 지어보고, 커다란 과수원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은과 금과 여러 보물을 모아 보았으며 남녀 가수들과 처첩도 많이 거느려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헛된 일이요, 미친 짓이요, 쓸데없는 것이었다고 그는 고백했습니다. 3.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인생 삼손은 일찍이 사자의 주검 속에 있는 꿀 앞에서 맥을 추지 못했습니다. 나실인으로서 삼손은 주검에 가까이 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꿀뿐만 아니라 달콤한 맛으로 유혹하는 이방 여인과 이방 문화와 이방의 삶의 방식을 멀리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나실인의 삶의 방식보다 이방인의 삶의 방식을 더 좋아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삼손을 떠나셨습니다. 신약시대인 지금은, 우리가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는 순간부터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하나님께서 우리를 떠나시거나,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리지는 않습니다.(요 10:28-29) 그러나 우리가 불경건한 삶을 살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삶을 살면,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를 통해 역사하실 수 없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교회에서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실 수밖에 없습니다. 육체의 욕망, 눈의 욕망, 세상 살림에 대한 자랑을 사랑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인생을 사시기 바랍니다.
- 진정한 우정과 기쁨요한복음 15:9-17서로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방편입니다. 세상을 이기기 위해서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18절 말씀대로 세상은 예수님을 미워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제자 된 우리도 증오합니다. 근본적으로 세상은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게 되어있습니다. 이와 같이 적대 세력들로 둘러싸여 있는 마당에 제자들이 서로 물고 뜯고 싸우면 어떻게 세상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복음으로 이 세상에 대해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형제 사랑은 하나님 사랑 첫째로, 형제를 사랑하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원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할 때 제자리를 찾게 되고 그 마음의 빈 곳을 채우게 됩니다.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미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가능한 한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은 것이 예수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공통된 바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내 곁에 있는 형제를 사랑하면 됩니다. 그럴 때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행복자가 될 수 있습니다. ’같이’의 은혜 둘째로, 형제를 사랑하면 ‘같이’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나의 계명은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15:12) 우리 중에 누가 이런 사랑을 할 수 있습니까? 아무도 못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신비스러운 원리가 작용합니다. 사랑을 명령하시기 전에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라는 전제를 단 것은 사랑이 먼저가 아니라 은혜가 먼저인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를 알고 체험하는 그 은혜 때문에 우리는 형제를 사랑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원수라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 사랑 안에 거하라 셋째로, 형제를 사랑하면 우리가 예수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있습니다. 15:4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내 안에 머물러 있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9절은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두 말씀이 어떻게 다를까요? ‘내 안에 머물러 있어라’는 것은 믿음으로 되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되면 가지가 나무에 붙듯이 자연스럽게 예수님께 붙게 됩니다. 그러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하신 것은 믿음만으로는 안 됩니다. 형제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할 때 가능한 경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주님의 명령을 순종하여 형제를 사랑하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진정한 우정과 기쁨 이와 같이 사랑 안에 거하는 자에게 예수님은 두 가지 특별한 복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하실 때에, ‘친구’란 서로 비밀이 없는 관계를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이렇게 모든 것을 다 터놓을 수 있는 관계가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내가 알 수 있고, 내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주님이 다 알아주십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에게 약속하신 또 한 가지 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쁨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사랑 안에만 그와 같은 진정한 우정과 기쁨이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 사실을 알고 복된 신앙생활을 누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열매 맺는 포도나무 가지요한복음 15:1-16하나님은 우리가 과실을 많이 맺기를 원하십니다. 많은 과실을 맺기 원하는 것이 바로 농부의 심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 믿습니다.’ 하는 그런 기초적인 신앙고백을 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우리 각 사람은 풍성한 과실을 기대할 수 있을 만한 포도나무의 가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과실을 많이 맺기 바라고 계십니다. 예수 열매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에는 포도가 열리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나무라고 한다면 우리의 열매는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예수 나무는 예수 열매를 맺게 마련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란 한 마디로 예수님을 닮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열매를 많이 맺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나뭇가지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더 많은 과실을 맺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어떤 방식으로 깨끗케 하실까요?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우리를 깨끗케 하시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징계하거나 연단하시는 것입니다. 징계나 연단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과실을 많이 맺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 안에 거하라 가지가 스스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나무에 붙어있기만 하면, 가지는 가만히 있으면서 나무로부터 영양분을 받아먹으면서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힙니다. 예수님께서 “과실을 많이 맺으라”고 하시지 않고 “내 안에 거하라”는 명령만 거듭 말씀하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안에 거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자녀가 생명 되신 그리스도와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무로 말하면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는 삶입니다. ‘예수 안에 거하는 삶’은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함께 먹고 마시는 삶이요, 마음을 터놓고 예수님께 사랑과 존경을 드리면서 즐거워하는 삶입니다. 말씀을 마음에 담으라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예수 안에 사는 삶을 살려면 어떤 노력을 해야 합니까? 말씀을 마음에 담고 묵상하는 삶은 예수 안에 있는 삶이요,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그의 말씀을 마음에 담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분석하거나 따지려 들지 말고, 다만 그 말씀을 즐거워하십시오. 그러면 그 말씀이 살아있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어 영혼을 살찌우는 양식으로 우리를 튼튼하게 세워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격과 삶의 과실들이 저절로 맺힐 것입니다. ’무엇이든지’의 기도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기 위해서 쌍방 의사소통은 필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말씀을 묵상하는 것과 동시에 해야 할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기도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묵상함으로 주님 안에 거하며 주님과 깊은 사랑의 교제를 하기 시작하면 기도의 말문이 열립니다. 그 기도는 제한적이지 않습니다.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십시오. 말씀을 묵상하면서 살아계신 주님과 깊은 교제를 하고 주님의 마음을 읽고 사랑에 흠뻑 젖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무엇이든지 주님 앞에 부담 없이 아뢸 수 있는 기도로 발전합니다. ‘무엇이든지’의 기도는 바로 이런 기도입니다.
- 보혜사 진리의 영요한복음 14:16-20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기 위해 떠나시면서 성령님에 관한 말씀을 네 번이나 반복하셨습니다. 반복한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성령님이 누구십니까?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그에게 능력과 권세를 주신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그분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무덤에 장사되었을 때 그를 죽음에서 일으켜 주신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선지자와 사도들의 마음을 감동하셔서 신구약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의 영이 성령이십니다. 이 세상에 교회를 탄생케 하시고 그 교회에 생명을 불어넣으시고 하나님의 권세를 입혀주신 하나님의 영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또 다른 보혜사 성령님 주님은 성령님을 ‘보혜사’라고 칭했습니다. ‘보혜사’는 ‘돕는 자’라는 뜻입니다. 성령님이 오셔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우리를 위해서 하시는 일이 돕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천지를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케 하셨고 그를 죽음에서 일으키신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바로 이러한 분이 우리를 돕는 자로 와계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또 다른 보혜사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예수님이 지금 하늘에서 우리를 돕는 보혜사라면, 성령님은 땅에 오셔서 우리를 돕는 보혜사입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신 후에 약속대로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지금은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성령이 도우시는 모든 은혜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받아 누릴 수 있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시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다. 그러면 아버지께서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셔서,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실 것이다.”(16절) 세상에 오시는 성령의 숙소와 예약기간은 ‘너희와 함께’ 즉 ‘우리와 함께’ ‘영원토록’입니다.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성령이 거하시겠다고 예약해 놓은 숙소는 바로 우리 마음입니다. 예약기간은 “영원히”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가 영으로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됩니다. 이것은 제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도 동일하게 주시는 위로의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마음에 모시고 있는 성령을 우리도 모시고 있습니다. 그 성령을 통해서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제자들의 마음속에 계셨던 것처럼 지금 우리 마음속에도 거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아가 아닙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성령을 모신 자의 능력 신약성경조차 제대로 갖고 있지 못하던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렇게 능력 있고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그들은 자기 안에 살아계시는 예수님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와 함께 동행하시는 예수님과 성령님’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속에서 분출되는 힘을 마음껏 발산하면서 세상에 영향을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의 그 누가 그들의 기쁨을 억누를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 안에 계시는 예수님이 다시 한 번 분명히 확인시켜주시고 체험하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그들을 강하게 붙들고 계셨기 때문에 아무도 그들을 상대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대제국 로마도 300년이 채 안되어 그 가난한 그리스도인들 앞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그분이 주시는 능력만 입으면 아무도 나를 꺾지 못합니다.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은혜를 여러분에게.
-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요한복음 14:12-14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근심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근심을 덜고 싶으면 기도하라고 네 번 이상 권면하고 계십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을 오직 기도와 간구로 하고,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그리하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줄 것입니다.”(빌립보서 4:6-7) 이러한 약속의 말씀을 따라 기도하기를 힘쓰면, 근심이 더 이상 나를 흔들어 놓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그 강한 손으로 내 마음을 굳게 붙들어 주시는 것을 느낍니다. 그 손에 붙들려 기도하다 보면 문제가 하나하나 해결되는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할 이유에 대해 예수님은 세 가지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첫째,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기 때문에 기도는 근심을 없앨 수 있습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구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14절)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나 다 받게 하려는 것이다.”(15:16) “지금까지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 이름으로 구하지 않았다. 구하여라. 그러면 받을 것이다. 이것은 너희에게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16:24) 하나님은 예수라는 이름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예수의 이름은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줄 수 있는 유일한 이름입니다. 아버지가 그 누구이든 아들은 언제든지 그 앞에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 된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나가기만 하면 하나님은 절대 가만히 계시지 않으십니다. 무엇이든지 기도하라 둘째는, 무엇이든지 기도할 수 있기 때문에 기도는 근심을 없앨 수 있습니다. 주님은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이든지 기도하라는 말씀에는 무슨 기도든지 다 들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한다고 하지만, 몰라서 잘못 구하는 기도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 것도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롬 8:26)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성령께서 기도를 도와주셔야 될 만큼 우리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기도 목록을 한번 만들어 보십시오. 큰일부터 사소한 일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아니하는 마음속의 감정에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큰일까지 우리 기도가 얼마나 다양합니까? 이 모든 기도를 할 수 있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응답이 약속된 기도 셋째는, 기도하면 반드시 받을 것이기 때문에 기도는 근심을 없앨 수 있습니다. 주님은 자기 이름으로 기도하기만 하면 반드시 응답받을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기도해서 응답을 받고 기쁨이 넘치게 되면 근심은 금방 날아가 버립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내 근심을 해결해 준다는데 왜 걱정을 끌어안고 있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만물을 지으신 분이십니다. 모든 것을 다 소유하신 분이십니다. 능력이 너무 많아서 못할 일이 없는 분이십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예수의 이름만 가지고 나오면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신다고 하는데 무엇 때문에 근심을 끌어안고 얼굴을 찌푸리고 있습니까? 왜 기도하지 않습니까? 기도하십시오.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것처럼, 기도가 자연스러운 것이 되도록 열심히 노력하십시오. 예수의 이름을 붙들고 계속 기도하면 나중에는 희한한 세계가 열린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