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S
말씀
- 교회가 가야 할 길계 11:7-13교회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을 때와 교회가 가야 할 길이 어딘지 분명하지 않을 때, 교회는 위기를 맞게 됩니다. 교회는 세상 속에 던져졌고, 증인으로 증언하는 것이 교회가 해야 할 일이라고 지난 주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교회가 가야할 길이 어딘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1. 두 증인의 죽음: 교회의 고난 요한계시록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함께 회람하며 들었던 편지입니다. 6절까지 하나님이 교회를 보호하시고 권세를 주셨다고 하다가 7절에서 갑자기 두 증인이 짐승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장면에서 성도들은 충격과 혼란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 짐승은 사탄이 아니라 사탄의 하수인 역할을 하는 왕과 나라를 의미하며, 교회 시대 동안 활동하지만, 세상의 끝이 다가오면 더욱 극심하게 대적합니다. 두 증인의 시체가 묻히지 못하고 조롱당하는 모습은 당시 성도들이 실제로 겪은 박해와 연결됩니다. 사도요한은 두 증인이 겪는 고난이 곧 예수님이 가신 길과 같음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듯이, 교회도 고난과 희생의 길을 가야 함을 보여줍니다. 신앙생활이 단순한 축복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가는 십자가의 길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2. 두 증인의 부활과 승천: 교회의 승리 두 증인의 시체가 조롱당하던 중, 사흘 반 후에 하나님 생명의 기운이 들어가 다시 살아나자 사람들은 큰 두려움에 빠집니다. 이 장면은 에스겔 37장의 마른 뼈가 살아나는 환상과 연결되며, 하나님이 죽었던 이스라엘을 다시 살리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두 증인의 부활은 교회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따르는 것을 의미하며, 이후 예수님처럼 하늘로 올라갑니다. 이는 문자적 휴거로 해석되기도 하고, 교회의 영적 승리를 의미하는 상징적 표현으로 보기도 합니다. 결국, 교회는 예수님과 같은 길을 가게 됨을 강조합니다. 3. 행복한제자교회가 가야 할 길 두 증인의 죽음과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은 두려움 속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이는 봉인심판, 나팔심판으로 회개하지 않던 사람들이 교회가 십자가의 길을 따라갈 때 회개와 변화를 끌어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사랑과 희생을 통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합니다. 다른 사람의 지적이 아니라, 밝은 빛과 같은 사랑이 비칠 때 자신의 어둠을 깨닫습니다. 이재철 목사님의 간증을 통해, 그의 아내가 조건 없는 사랑과 희생으로 그를 섬겼을 때, 그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한 영혼을 섬기고 전도할 때도, 시간이 없고 바쁜 가운데서,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가운데서, 건강이 썩 좋지 않은 가운데서, 능력이 모자라고 신앙연륜도 부족한 가운데 다른 사람을 섬길 때 오히려 사랑과 희생이 전달되고 마음이 열리는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희생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 사랑과 희생으로 섬기는 삶을 살기를 축원합니다. 4. 개인 적용
- 사탄의 실체를 압시다.계 8:13-9:11사람은 몸으로 느낄 수 있는 다섯 가지 감각인 오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오감의 범위를 벗어나면 우리는 인식하지 못합니다. 사탄을 포함한 영적인 세계도 분명히 존재하지만, 오감을 벗어나기 때문에 대부분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르고 삽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을 믿게 되면서 영적인 세계에 눈을 뜨기 시작하고, 사탄이 어떤 존재이고 어떤 힘을 가졌는지 알기 시작하면서 사탄과 하나님의 관계에 대한 그림을 그립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과 사탄이 서로 자신의 영역을 많이 차지하기 위해서 치열한 힘겨루기를 하는 그림을 그립니다. 오늘 살펴볼 내용은 ▶사탄은 정말로 하나님과 힘겨루기하는 위치에 있는지 그리고 ▶사탄을 따르는 자의 마지막 결과가 무엇인지 ▶우리가 진짜로 싸워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살펴보겠습니다. 1. 사탄은 하나님의 통제하에 있습니다(9:1-4).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은 사탄을 말합니다. 그 별은 아비소스를 열 수 있는 열쇠를 하나님에게 받습니다. 하나님이 사탄에게 권한을 주신 것입니다. 아비소스는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은 곳을 말하는 헬라어입니다. 성경에서는 죽은 자들이 있는 지옥, 또는 사탄이 갇혀있는 곳이라고 설명합니다. 아비소스가 열리자 전갈과 같은 권세를 받은 메뚜기들이 나와 땅으로 퍼지고 이마에 하나님의 도장이 찍히지 않는 사람들을 해합니다. 사람을 해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사탄은 하나님과 힘겨루기할 대상이 못 됩니다. 하나님의 통제 아래에서 허락하신 한도 내에서 움직이는 영적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2. 사탄은 마지막에 극심한 고통을 줍니다(9:5-6). 메뚜기가 주는 고통은 다섯 달 동안 전갈이 쏠 때와 같은 극심한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전갈에 쏘이는 고통은 너무나 극심하여 죽기를 원하지만 죽을 수도 없는 고통입니다. 이것이 사탄이 주는 마지막 결과입니다. 사탄은 처음부터 고통을 주지는 않습니다. 행복을 약속하면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와 관련된 3가지, 자기 자신, 돈, 쾌락을 사랑하도록 만듭니다(딤후 3:2,4). 솔로몬이 이런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마지막은 후회와 고통뿐입니다(전 12:8, 13-14). 3.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사탄입니다(9:11). 메뚜기 떼는 대장이 없이 무리로 이동하지만, 본문의 메뚜기 떼는 히브리 말로 ‘아바돈’, 그리스말로 ‘아볼루온’이라는 이름의 왕이 있습니다. 둘 다 ‘파괴자’라는 뜻입니다. 사도 요한이 왜 그리스말을 추가하였는지는 아볼루온의 원래 그리스어 발음이 ‘아폴뤼온’이라는 것을 알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폴뤼온은 그리스 신 아폴론과 발음이 같습니다. ‘아바돈’이라는 히브리어를 70인 역이나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말로 번역할 때, ‘아폴뤼온’이 아니라 ‘아폴레이아’(파괴자)라고 번역하였지만 사도 요한만 아폴뤼온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이것은 도미티안이 자신을 ‘아폴론’이라 불렀기 때문에 도미티안을 연상시키기 위한 의도입니다. 또한 도미티안은 사탄의 하수인에 불과하고, 진짜로 맞서 싸워야 할 대상은 도미티안이 아니라 배후에서 그를 조정하는 사탄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도 엡 6장 12절에서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악한 영들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을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미 승리하셨고, 우리의 승리가 보장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요 16:33). 4. 개인 적용
- 흔들리지 않는 나라계 8:6-12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셨고 피조물들의 생존은 자연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자연이 파괴되면 자연히 피조물의 생존이 위협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세상을 파괴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왜 하나님은 세상을 파괴하려고 하시는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1. 나팔을 부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구약에서 사용한 나팔은 은 나팔과 양각 나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은나팔(히, 하초츠라)은 진영 백성들을 소집할 때, 이동할 때, 전쟁 때 신호를 전달하기 위하여 사용하였습니다(민 10:1-10). ▶양각나팔(히, 쇼파르)은 나팔절과 같은 절기나 제사 때 불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사람들 가운데 나타나실 때(출 19:16), 전쟁에서 공격 신호(렘 51:27)로, 재앙이나 전쟁이 닥칠 것에 대한 경고(겔 33:3-4) 목적으로 사용하였습니다. 본문에서 천사들이 나팔을 분 것은 재앙에 대한 경고입니다. 2. 네 나팔 재앙 1) 우박과 불이 땅에 떨어져서 땅과 나무와 풀 3분의 1을 태웁니다(7절). 나무가 타고 푸른 풀이 탄다는 것은 농산업이 타격을 받고, 풀을 먹고 사는 짐승들 먹이가 줄어들어서 축산업이 타격을 받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3분의 1이 피해를 본다는 표현은 3분의 2가 남아 있다는 것이고, 회복할 수 있는 여지가 있으며 아직 최종 심판이 이르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우박과 불이 떨어지는 재앙을 핵무기와 미사일이라고 하기 쉬운데 모든 시대 모든 파괴가 여기에 속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한 해석입니다. “이것이 무슨 재앙인가?”, “언제 일어나는가?”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은 이 재앙에서 우리를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출 9:26). 2) 불타는 큰 산이 바다에 던져져서 바다의 3분의 1이 피가 되고 바다 생물 3분의 1이 죽고, 배 3분의 1일이 파괴됩니다(8~9절). 이것은 로마가 멸망할 것과 수산업이 타격을 받고 로마가 지중해 지배권을 잃어버리게 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3) 쑥이라고 부르는 큰 별이 강들과 샘물들 위에 떨어져 물 3분의 1이 쑥이 되고 많은 사람이 물을 마시고 죽습니다(10~11절). 큰 별은 악한 영들을 말하며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우상을 섬기고 이들의 조종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고통이 임할 것을 말합니다. 4) 해와 달과 별 3분의 1일 타격을 입고 어두워져서 낮과 밤 3분의 1일 어두워집니다(12절). 이 재앙은 출애굽기 9번째 재앙과 같은 재앙입니다. 3. 네 나팔 재앙이 주는 교훈 네 개의 나팔 재앙은 모두 자연과 관련되어 있고 사람의 생존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하나님은 사도요한을 통해서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는 자들이 얼마나 엄청난 심판을 받게 될 것인지 매우 단호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뿐만 아니라 하늘도 흔드십니다(히 12:26-27). 이 땅의 모든 것은 마지막에 다 사라집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 흔들리고 사라지는 것을 붙들고 거기에 소망을 두고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흔들리지 않는 나라 붙들고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도록 섬기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히 12:28). 4. 개인 적용
-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마태복음 4:18~251.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시 반응하는 제자들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첫 사역의 시작으로 먼저 자신과 함께 할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갈릴리 바닷가를 걸어가시다가, 두 형제,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와 형제간인 안드레가 그물을 던지고 있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나는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삼겠다.”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예수님이 첫 번째 부르신 제자가 놀랍게도 어부입니다. 이때 이 어부가 ‘많은 배를 가진 부유한’ 어부도 아니고, ‘똑똑하고 존경받는’ 어부도 아닌, 그 어떤 수식어도 없는 ‘그들은 어부였다’ 이 한마디 밖에 없습니다. 지극히 평범한 자신들을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실 때 “그들이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자신들의 어떠함이 아닌 ‘자신들을 부르신 분’이 누구인지 집중하고 시선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2. 텅 빈 배가 축복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러 가실 때, 그중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던 베드로를 부르시는 장면이 참 인상적입니다. 베드로가 평소처럼 물고기를 잘 잡고 있었다면 과연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을까요? 아닐 겁니다. 그렇다면 베드로에겐 물고기가 한 마리도 안 잡히던 그 밤이, 그 실패의 시간이 오히려 축복의 시간이 되었던 겁니다. 계획했던 일들이 실패하고 나 자신이 초라해지는 그 ‘빈 배’에서 예수님을 만나기를 사모하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3.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 20절, 22절에 “그물을 버리고.. 배와 아버지를 놓아두고 예수를 따라갔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이 어부들이 더 이상 물고기 잡는 일이 싫어서? 혹은 그물과 배와 아버지가 소중하지 않아서? 다 버린 것이 아닐겁니다. 더 중요한 일을 위해서 내게 없어서는 안될 절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들도 내려놓을 수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기 위해 내가 버릴 것은 무엇입니까? -어부들이 배와 그물을 버려둔다는 것은 더 이상 내가 가진 물질, 내가 가진 재능을 의지하지 않겠다는 결단입니다. 이것 없으면 죽을 줄 알고 놓지 못하고 있는 배와 그물이 우리에게도 있을 것입니다. 제자로 산다는 것은 그것을 내려놓고도 하나님이 나를 살게 해주신다는 것을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버려둔다는 것은 ‘익숙한 환경’, 내가 살아온 고집스런 ‘자기 방식’, 그리고 ‘내 경험들’을 더 이상 의존하지 않겠다는 결단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익숙한 것들’과의 결별을 두려워하지 않고 무엇이든 순종하겠다는 믿음의 결단입니다. 4. 기적이나 성공이 아닌 ‘사명’을 좇는 삶을 선택하는 제자들 베드로는 예수님께 순종하고 기적을 체험합니다. 순종에 따른 결과로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고, 그 복을 구하며 사는 인생이 될 수도 있었지만, 베드로는 부유함이나 성공의 복이 아니라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자신의 사명을 따라 사는 인생을 선택합니다. 마태복음 5장 1절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그에게 나아왔다. 성경은 예수를 따른다고 다 제자로 부르지 않습니다. 무리와 제자를 분명히 구분합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을 선망하고 환호하지만 정작 예수님과 인격적인 사귐이 없고 절대적인 복종과 희생적인 헌신이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예수님의 팬이지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제자는 기적이나 성공이 아니라 사명을 따라 섬기는 사람입니다. 5. 개인 적용
- 어린 양의 승리계 5:1-7우리는 하나님이 계신 하늘 영역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보여주시므로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여주시는 것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방식이 세상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힘으로 승리하지만, 하나님의 승리는 다르게 이루어집니다. 세상 방식과 다른 하나님의 승리가 어떤 것인지 살펴보겠습니다. 1. 봉인된 두루마리와 요한의 울음 (5:1-5) 요한은 하나님의 오른손에 두루마리를 들고 계신 것을 봅니다. 이 두루마리의 특징은 안팎으로 글이 적혀 있고 일곱 인으로 봉인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지만, 구약에서 에스겔에게 앞뒤로 조가와 탄식과 재앙의 글이 적힌 두루마리를 보여주셨기 때문에 요한이 본 두루마리에도 비슷한 내용이 담겨있을 것이라고 미리 알 수 있습니다. 봉인된 두루마리는 이사야(사 29:11)와 다니엘(단 12:4)에게도 보여주셨습니다. 다니엘에게 봉인을 떼는 때는 마지막 때(단 12:9)라고 하였기 때문에 천사가 “이 봉인을 뗄 사람이 누구인가?” 묻는 것은 마지막 때가 이르렀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봉인을 떼고 두루마리를 펼친다는 것은 그 안의 내용이 드러난다는 것을 말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이 집행되는 것도 의미합니다. 그러나 두루마리를 펴거나 볼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집행되지 못하는 것을 말하고 요한이 직면한 교회의 위기와 핍박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은 절망적인 상황에 슬피 웁니다. 2. 유다의 사자와 어린 양 (5:5-7) 장로들 가운데 하나가 요한에게 울지 말라고 말합니다. 유다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승리 하였기 때문에, 일곱 봉인을 떼고 두루마리를 펼 수 있다고 말해 줍니다. 요한의 탄원이 응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의 탄원을 들으십니다. 히스기야 왕은 병에 걸렸을 때 눈물로 기도하여 응답받아서 15년 생명이 연장되었습니다. 유다 지파에서 난 사자, 다윗의 뿌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예수님이 승리하셨기 때문에, 일곱 봉인을 떼고 두루마리를 펼 수 있습니다. 두루마리를 편다는 말은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이 집행되는 것을 뜻합니다. 5절 유다의 사자, 다윗의 뿌리인 위대한 왕의 이야기에서 6절에서 죽임당한 어린 양으로 바뀝니다. 세상 방식은 악을 이기려면 그보다 더 큰 힘으로 제압해서 이기는 것인데, 예수님의 방식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땅에 계실 때 자신을 체포하러 온 사람들을 물리치고 얼마든지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스스로 체포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희생의 제물이 되십니다. 이것이 어린 양이 보여준 진정한 승리입니다. 세상이 보기에 십자가의 죽음은 패배로 보이지만, 하나님은 이것이 ‘승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본을 따르기를 원하십니다. 오늘날 세상의 문제들 폭력과 악, 고난, 갈등과 문제들을 해결할 때, 더 큰 힘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희생을 통해서 승리하기를 원하십니다. 7절, 예수님이 두루마리를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6장부터 두루마리가 펼쳐지면서 일어나는 재앙들은 다음 주에 이어집니다. 3. 개인 적용
- 세상을 이기는 힘을 얻으려면계 4:1-11우리가 사는 세상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할 뿐만 아니라, 치열하게 경쟁하는 경쟁 사회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인 것을 드러내고, 복음을 전하면서 산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계시록 편지를 읽었던 성도들은 우리보다 더 열악한 상황에서 계시록의 말씀을 통해 힘을 얻고 핍박에 용감하게 맞섰던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이들이 계시록 말씀을 통해서 힘과 용기를 얻었다면, 오늘날 우리에게도 같은 힘과 용기를 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새 힘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하늘 보좌를 보여주신 이유 (4:1-3) 예수님은 사도 요한에게 하나님의 보좌를 먼저 보여주십니다. 요한은 보좌에 앉아 계신 하나님을 봅니다. 요한에게 보좌를 보여주신 것은 세상의 통치자는 로마제국 도미티안 황제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말씀하기 위해서입니다. 극심한 핍박을 받던 초대교회 성도들은 두려움과 절망에서 벗어나서 믿음으로 맞설 수 있는 새 힘과 용기를 얻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두려움과 영적인 침체에서 벗어나려면 하나님의 보좌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앙망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 힘을 공급해 주십니다(사 40:31-32). 2.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은 무엇입니까? (4:4-8a) 4절에 24 장로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구약의 하나님 백성의 수 12와 신약의 하나님 백성의 수 12를 합한 24는 구약과 신약의 모든 하나님 백성을 상징합니다. 24 장로가 흰옷을 입고 금 면류관을 쓰고 보좌에 앉아 있다는 것은 교회가 믿음을 지키고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여 하나님의 보좌 옆에 함께 앉아 다스리는 것을 보여줍니다. 박해받던 성도들에게 24 장로 이야기는 핍박에 맞서는 힘과 용기를 주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계시록 말씀을 통해서 우리도 하나님의 보좌 옆에 앉을 것이고, 면류관을 씌워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6절에는 네 생물이 나옵니다. 7-8절에 네 생물의 묘사가 나오지만 이 땅에서 볼 수 없는 기괴한 모습의 생물이라서 계시록을 어렵게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네 생물이 문자적인 생물이 아니라 이 땅의 모든 피조물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눈이 가득하다는 것은 모든 것을 볼 수 있으며, 세상의 어떤 것도 이 눈으로부터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3. 하늘에서 드리는 예배를 보여주신 이유 (4:8b-11) 예수님이 요한에게 24 장로와 네 생물이 하늘에서 드리는 예배를 보여주십니다(8b-11). 요한에게 하늘 예배를 보여주신 것은 당시 카타콤에서 예배드리던 성도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기 위한 것입니다. 11절에 ‘우리의 주님이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박해받던 성도들에게는 도미티안이 자신을 ‘주 하나님’이라고 불러도 진정한 주님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이시라는 신앙고백을 하게 하는 구절입니다. 우리도 하늘 예배와 같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가 되려면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요 4:24). 형식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여 드리는 예배를 말합니다. 기도는 믿음으로, 찬송은 진심으로, 헌금은 감사함으로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결단하는 것이 마음을 다하여 드리는 예배입니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4. 개인 적용
- 이것이 이기는 것입니다.계 2:8-11예수님은 7개 교회에 형편을 알고 계시고 말씀하십니다. 행복한제자교회의 형편도 알고 계십니다. 우리 교회에 대해서 무슨 말씀을 하실지 알 수는 없지만, 우리 교회가 무엇을 힘써야 하는지는 알 수 있습니다. 교회가 힘써야 할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살다가 패배자가 되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습니다. 진정으로 이기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1. 세 부류의 교회 요한계시록은 7개의 교회에 보내는 회람 서신서입니다. 수신 교회의 순서는 우편도로가 지나가는 순서에 따라 정해진 것을 지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일곱 교회는 ▶칭찬받은 서머나, 빌라델비아교회, ▶책망만 받은 라오디게아, 사데교회 ▶칭찬과 경고를 함께 받은 에베소, 버가모, 두아디라교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 중에서 서머나교회를 살펴보겠습니다. 2. 서머나교회의 상황 서머나는 에베소에서 북쪽으로 80km 떨어진 인구 30만의 항구 도시입니다. 로마에 대한 충성심을 인정받아 독립 의회가 있었고 마을에 황제 반신상을 세우고 신전을 세우는 데 앞장섰습니다. 황제숭배를 거부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마을 조합에서 축출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상거래를 못 하게 되어 궁핍하였습니다(9절). 또한 서머나에는 강성 유대인들이 많았으며 이들은 기독교가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것에 대해서 신성모독으로 간주하고, 율법을 지키지 않는 종교집단이라고 비방하고 로마당국에 고발하였습니다(9절). 3. 교회 형편을 아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서머나교회에 “네가 당한 환난과 궁핍을 알고 유대인들에게 비방을 당하는 것을 알고 있다. 너는 가난한 것이 아니라 부자다. 유대인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사탄의 무리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머지 6교회에 대해서도 예수님은 알고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데교회와 라오디게아교회에게 “예수님이 안다.”라고 하신 것은 경고였습니다. 예수님은 행복한제자교회도 알고 계십니다. 어떻게 말씀하실지 궁금합니다. 무엇을 근거로 말씀하시겠습니까? 마태복음의 달란트 비유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실적으로 평가하지 않으시고 충성을 보십니다. 충성은 하나님이 있으라고 하는 곳에서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 일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는 것입니다. 4. 이것이 이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안다.”라고 하신 다음에 고난을 해결해주시겠다고 하시지 않고,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고 앞으로 환난을 당할 것이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죽도록 충성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믿으면 만사형통하게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난 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진정한 축복과 상급은 이 땅이 아니라 천국에서 받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기는 자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약속하셨습니다. 힘을 가진 권력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는 것이 세상이 보기에는 패배자로 보이지만, 천국에서는 이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승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다 이해할 수 없을 때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우리를 끝까지 책임져 주실 것이라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5. 개인 적용
-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계 1:1-84개의 복음서는 예수님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인간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것에 초점을 맞추어서 기록한 책이라면, 요한계시록은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록입니다. 고난받는 종이 아니라 만왕의 왕으로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으로서, 구원자가 아니라 심판자로서 오시는 분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오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려면 요한계시록을 읽고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계시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책의 성격과 역사적인 배경을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오늘은 이 두 가지를 살펴보고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생각해보겠습니다. 1. 3 장르의 책 요한계시록은 묵시, 예언, 편지 3개의 장르가 섞여 있습니다. ▶묵시는 상징을 사용하여 뜻을 전달합니다. 상징을 문자로 해석하면 잘못된 결론에 이릅니다. “그 집 남자는 늑대고 여자는 여우인데 딸은 토끼다.”라는 말을 듣고 그 집에는 짐승들이 산다고 해석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단들은 이것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자신들의 거짓 교리를 정당화합니다. ▶성경에서 예언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말하는 것보다 현재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메시지인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러므로 예언자는 점쟁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대언자로 보는 것이 맞습니다. ▶계시록은 7 교회에 보내는 편지입니다. 회람 서신서입니다. 한 사람이 전체 모임에서 읽으면 청중이 듣는 형식입니다. 당시 청중들은 편지 내용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처한 상황 때문입니다. 한국 사람이면 이육사의 ‘광야’시를 듣고 일제강점기에 광복을 희망하는 시라고 쉽게 이해하는 것과 같지만 역사적 배경을 모르면 해석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2. 역사적 배경 요한계시록은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되어서 AD 91-96년 사이에 쓴 책입니다. 이때 로마 황제는 도미티안(AD 81-96)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주 하나님(Dominus et Deus)’으로 바꾸고 하나님으로 숭배하도록 강요하였습니다. 황제숭배를 거부하는 많은 그리스도인이 잔인하게 처형당하였습니다. 도미티안 박해로 로마제국의 모든 교회가 극심한 고난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이 요한을 통해서 교회에 보낸 편지가 요한계시록입니다. 3. 누가 인생의 주관자인가? 1장 4절과 8절에서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앞으로 오실 전능하신 주 하나님”이라고 표현합니다. 과거 현재 미래 순으로 표현하지 않고 ‘지금도 계시고’를 먼저 말씀하신 것은 핍박당하는 교회에 대하여, “내가 너와 함께 하고 있다.”고 하시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8절, 알파와 오메가는 시작과 끝이라는 뜻입니다. 도미티안이 시작과 끝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관하고 계신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또한 5절에서 땅 위의 왕들의 지배자이신 것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누군가로부터 고난 당할 때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주관하고 계시고 시작과 끝도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것을 믿을 때 우리는 사람과 상황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 볼 수 있습니다. 4. 개인 적용
- 거리낌 없는 양심사도행전 24:10-16윤동주 시인의 ‘서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아하는 시일 것입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혼탁한 현실 상황 속에서 세속적 삶에 타협하지 않고, 양심에 부끄럽지 않은 순수한 삶을 살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있는 시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인이 힘써야 할 거리낌 없는 양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 부활을 염두에 두고 “용기를 내어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과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한다.(행 23:11)” 이 말씀은 주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주신 사명이며 격려의 말씀이었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바울은 로마에 복음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가이사랴는 로마의 총독관이 있는 곳으로 빌라도의 후임인 벨릭스가 총독으로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의 앞에서 “의로운 사람들과 불의한 사람들의 부활이 장차 있으리라는 것”을 소망하고 있다고 명확하게 전했습니다. 바울은 부활을 염두에 두고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양심을 가지려고 힘쓴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어머니 뱃속에서 1생, 또한 이 세상에서 2생, 그리고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사람은 3생을 영원한 형벌 가운데 지내게 됩니다. 우리는 부활하여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3생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을 염두에 두고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2. 하나님 앞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거리낌 없는 양심을 가지려고 힘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타락한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자기 아들의 피로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 사람들은 구속의 날까지 그 마음속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인치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낙관이 찍힌 삼위일체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에 거리낌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치르신 피 값에 거리낌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께 거리낌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언젠가 각각 자기 일을 하나님께 사실대로 아뢰어야 할 때가 올 것을 믿습니다. 3. 사람 앞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뿐만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거리낌 없는 양심을 가지려고 힘쓰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지만, 사람 앞에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저 종교인이 되기 쉽습니다. 사람 앞에서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저 도덕군자는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나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지 않으면, 망나니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거리낌 없는 양심을 가지려고 힘쓰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신앙인입니다. 구약시대에 요셉이 그러했고, 다니엘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칭찬받고 흠잡을 데가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 모두가 거리낌 없는 양심을 가지려고 힘쓰는 바른 신앙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 목적이 이끄는 삶사도행전 23:1-11저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바퀴가 굵은 산악자전거를 타고 왕복 20km를 달린 적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몇 분 안에 달린다는 목표가 있는데, 가끔 나를 앞지르는 사람을 만나면 갑자기 제 속력이 빨라집니다. 게다다 자전거 바퀴가 제 것보다 조금 크고 가는 자전거를 보면 자전거를 한 대 더 사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그때 제 마음을 가라앉히는 질문은 “무엇 때문에 자전거를 타는가?”입니다. 저는 빨리 달리는 선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몸의 건강을 증진하는 것이 자전거를 타는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운동을 위해서라면 묵직한 산악자전거가 더 좋지!”라는 결론을 스스로 내리고 다시금 웃는 얼굴을 되찾습니다. 이와 같이 “목적이 이끄는 삶”은 우리의 삶을 단순하게 하고 우리의 마음을 평온케 해줍니다. 1. 하나님 앞에서 바른 양심을 가지고 바울은 “나는 이날까지 하나님 앞에서 오로지 바른 양심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4:16에서도 그는 “언제나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거리낌 없는 양심을 가지려고 힘쓰고 있습니다.”라고 자기 삶의 목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뿐만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만 양심에 거리낌이 없으면 ‘종교인’이 되기 쉽습니다. 사람 앞에서만 양심에 거리낌이 없으면 그저 ‘좋은 사람’이 될 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제멋대로 사는 사람은 ‘망나니’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진정한 신앙인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때로 실수할 때는 바울이 즉시 사과한 모습처럼 겸손하게 즉시 용서를 구할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2. 헛된 일에 시간을 쓰지 아니하며 당시 로마법에 의하면 로마시민은 정식 재판 없이 처벌하거나 고문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태어날 때부터 로마시민이었습니다. 바울이 이 사실을 지적하자 천부장은 바울을 채찍질하고 심문하던 것을 멈추고,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그를 고발하는지 진상을 알기 위해 바울을 제사장들과 온 공회 앞에 세웠습니다. 바울은 그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나는 바리새파 사람이요, 바리새파 사람의 아들입니다. 나는 지금, 죽은 사람들이 부활할 것이라는 소망 때문에 재판받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는 사두개인과 ‘다 있다.’라고 하는 바리새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어졌습니다. 때로는 이런 지혜가 필요합니다. 목적이 분명한 사람은 공연한 일에 시간을 쓰지 않습니다. 3. 하나님의 부르심을 이루는 삶 바울은 환경에 지배받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서 오로지 바른 양심을 가지고 사는” 분명한 삶의 목표를 가지고 주도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공연히 헛된 일에 휘말려 들어가지 않도록 우선순위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대로 이방인의 사도로서 로마에서 주님의 일을 증언하는 목표 중심의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가 모두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명령(Commandment)은 “서로 사랑하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사명(Commission)을 주셨습니다. 또한 우리 각 사람에게 소명(Calling)을 주셔서 그 일에 헌신(Commit)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여러분에게 헌신하기를 원하시는 소명은 무엇입니까? 그 소명을 위하여 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무엇입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