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S
말씀
- 약속 있는 첫 계명에베소서 6:1-4신앙생활의 핵심은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이며, 다음으로 이웃과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가장 가까운 이웃은 가족, 즉 부모와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바른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부모와 자녀 사이의 건강한 관계가 매우 중요합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에 대해 말하면서, 부모에게 순종하고 공경하라고 말합니다. 왜 부모에게 순종하고 공경해야 하는지 세 가지 근거를 듭니다. 1. 약속 있는 첫 계명 첫 번째 이유는 ‘옳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이든 아니든, 모든 사람에게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성경의 명령입니다. 십계명 중 다섯 번째 계명인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은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과 연결되는 중요한 명령이었습니다. 세 번째 근거는 부모를 공경할 때,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입니다. “그리하면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는 말씀처럼, 부모를 공경할 때 삶의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실제로 부모와의 건강한 관계가 자녀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의학적으로도 입증된 사실입니다. 2. 공경하기 힘든 부모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자녀로서 당연한 도리이지만, 쉽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특히 부모가 도덕적으로 문제를 일으켰거나, 자녀를 방임하고 상처를 준 경우에는 더 그렇습니다. 이런 경우 자녀는 깊은 정신적·육체적 아픔 속에서 살아가며,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큰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 속에서도 용서를 선택할 것인지, 아니면 거리를 둘 것인지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선택이고 책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부어지고, 그 사랑으로 마음이 채워질 때, 우리는 사랑을 흘려보낼 수 있고, 용서할 힘도 생깁니다. 3. 자녀 양육 4절에서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자녀를 화나게 하지 않으면서도 주님의 교훈과 훈계로 잘 양육할 수 있을까요? 자녀와의 관계가 충분히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성경 말씀과 진리로 행동을 바로잡으려 하면, 자녀는 분노하거나 반항할 수 있습니다. ▶행동은 가치관에서 나오기 때문에, 가치관이 바뀌면 행동이 바뀝니다. ▶가치관은 믿음에 의해서 형성이 되고 ▶믿음은 부모와 자녀간의 친밀한 사랑의 관계 안에서 세워집니다. 그러므로 자녀의 행동이 변화되려면 친밀한 관계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자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마음을 공감해 줄 때 친밀한 관계가 형성이 됩니다. 또한 부모, 특히 아버지가 삶 속에서 신앙의 본을 보여야 합니다. 본을 보인다는 것은 완벽한 부모가 되는 것이 아니라, 실패해도 다시 일어나는 모습을 자녀에게 보여주는 것을 말합니다(고전 4:16). 4. 개인 적용
- 성경적인 세계관요한계시록 17:1-9‘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느냐’ 하는 것이 바로 ‘세계관’입니다. 세계관이라는 말이 다소 거창하게 들릴 수 있지만, 우리 모두는 저마다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적인 세계관’이란, 하나님께서 세상을 보시는 관점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성경적인 세계관을 가질 수 있을까요? 바로 하나님이 세상을 바라보시는 시선으로 우리도 세상을 바라볼 때, 우리는 성경적인 세계관을 갖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시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1. 여인의 정체 1절에 물 위에 앉은 큰 창녀가 등장합니다. 여기서 물은 백성들과 무리, 민족들과 언어들을 의미합니다(15절). 즉 이 여인은 수많은 나라와 민족을 지배하고 있는 존재입니다. 이 여인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해 있다고 말하는데(6절), 이는 기독교를 박해하는 세력임을 보여줍니다. 여인이 타고 있는 빨간 짐승은 로마 황제를 상징하며 짐승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붉은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은 붉은 용이나 빨간 짐승과 같은 사악한 세력과 같은 소속임을 나타냅니다. 여인의 이마에는 ‘큰 바빌론’이라는 이름이 적혀있으며(5절), 세상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통치권을 가진 큰 도시로 묘사됩니다(18절). 이 여인은 당시 세상의 중심이었던 로마를 상징합니다. 2. 하나님이 보시는 세상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로마는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최고의 번영을 누렸습니다. 지중해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화려한 건축과 예술로 찬란한 문화를 자랑했습니다. 우리가 만약 당시의 로마를 보았다면, 4절에 나오는 자주색과 붉은 옷, 금과 보석, 진주로 꾸민 화려한 모습에 감탄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로마를 어떻게 보셨을까요? 큰 창녀로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이 아닌, 금잔 속에 담긴 더러움과 음행을 보십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세계관입니다. 세상을 볼 때, 하나님의 시선으로 보는 것이 성경적인 관점입니다. 화려하고 강력한 로마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시고 있는 나라, 음행하는 나라로 보는 것입니다. 바벨론과 로마는 오늘날 세상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이미지입니다. 겉으론 여전히 화려하고 사람들을 유혹하지만, 그 속은 탐욕과 타락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바빌론과 로마의 결말은 멸망입니다. 3. 바빌론의 결말 구약의 바벨론은 BC 539년, 벨사살 왕이 연회를 열던 중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쓰인 글로 멸망을 예고받았습니다. 그날 밤 바벨론은 메대와 페르시아 연합군에게 무너졌습니다. 강으로 둘러싸인 철옹성 같던 바벨론, 삼중 성벽으로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도시도 하루아침에 무너졌습니다. 마찬가지로, 로마 또한 멸망할 것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로마를 떠나라고 하십니다(계 18:4). 이 시대의 세속적인 풍조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살라는 말씀이며(롬 12:2)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요일 2:15-16). 결론적으로, 성경적인 세계관이란 세상을 하나님이 보시는 방식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4. 개인 적용
- 마지막 심판 앞에선 우리요한계시록 16:10-21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겉으로 볼 때는 평온해 보입니다. 그러나 진짜 평안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때가 가까워지고 있고, 영적 전쟁이 격렬해지며 하나님의 최후 심판이 임박하였다고 경고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대접 심판은 최후 심판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최후의 심판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는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 짐승의 나라에 임한 어두움 (16:10-11) 다섯 번째 대접 심판은 짐승의 나라가 어두워지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출애굽기의 아홉 번째 재앙과 같습니다. 계시록에서 출애굽 재앙이 반복되는 것은 이집트가 이스라엘 백성을 핍박하고 하나님이 이들을 구원하시는 것과 바벨론인 로마가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고 바벨론이 심판을 받는 것과 닮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어둠은 물리적으로 눈에 보이는 빛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사랑, 용서가 완전히 사라진 상태를 상징합니다. 회개란 죄를 자백하고 하나님의 기준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죄의 본질은 하나님 대신 자신이 주인이 되려는 교만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어서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죄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 아마겟돈, 최후의 전쟁 (16:12-16) 여섯 번째 대접 심판은 유프라테스 강이 마르고 해돋는 곳(동방)의 왕이 오는 길이 마련되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젖줄인 유프라테스 강이 마른다는 것과 동방의 왕들이 오는 길이 마련되었다는 것은 바벨론 즉 로마의 멸망을 의미합니다. 용, 짐승, 거짓 예언자의 입에서 나온 개구리 같은 더러운 영은 거짓과 혼란을 퍼뜨립니다. 이 더러운 영들은 세상의 왕들을 미혹해 하나님의 큰 날의 전쟁을 준비시킵니다. 문맥상 이 전쟁은 물리적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백성과 사탄 사이의 영적 전쟁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또한 아마겟돈도 지리적 장소를 말하지 않고 마지막 영적 전투가 벌어지는 곳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마지막 영적 공격이 가장 강할 때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하고 자기 옷(믿음과 정결함)을 지켜야 합니다. 예수님은 도둑처럼 오시기 때문입니다. • 바벨론의 멸망 (16:17-21) 일곱째 대접 심판은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지진이 발생하는 것으로, 큰 도시 바벨론(로마)이 세 조각으로 무너지고, 민족들의 도시들인 로마제국들도 파괴되며, 섬과 산들이 사라지는 마지막 심판입니다. 무게가 45~50kg에 달하는 큰 우박이 내려 사람들을 심판하지만,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모독합니다. 이러한 심판들은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들을 가리기 위한 경고이며, 믿는 자들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소망하며 경건하게 살아야 합니다. • 개인 적용
-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여인요한복음 20:1-18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쉽게 믿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부활이 비과학적이라며 받아들이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과학의 정의를 오해한 데서 비롯됩니다. 과학은 동일한 환경과 조건 속에서 반복적으로 관찰되는 현상을 통해 일정한 법칙을 발견하는 학문입니다. 부활은 반복되는 사건이 아니기 때문에 과학적 방법으로 입증할 수 없습니다. 법정에서 판결이 증인의 증언과 증거를 통해 이루어지듯, 부활 역시 증인의 증언과 기록을 통해 접근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으로 목격한 여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목격한 부활 사건을 통해 부활이 한 사람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사라진 시신 (20:1-10) 어떤 중요한 사건을 재구성할 때는 장소, 시간, 목격자라는 세 가지 요소가 중요합니다. 이 사건의 장소는 예수님의 시신이 안치된 무덤이며, 시간은 안식 후 첫날 이른 새벽입니다. 첫 목격자는 막달라 마리아와 몇몇 여인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무덤은 일반적으로 바위나 굴을 파서 시신을 안치하고, 큰 돌로 입구를 막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무덤의 입구를 막았던 돌이 옮겨져 있었고, 시신은 사라졌습니다. 놀란 마리아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달려가 이 소식을 전했고, 두 제자는 무덤으로 달려가 직접 확인합니다. 무덤 안은 비어있었고, 삼베와 머리를 쌌던 수건은 따로 정돈되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를 보고 이상히 여겼고(눅 24:12), 요한은 ‘믿었다’고 기록되지만(20:8),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온전히 이해한 믿음이라기보다는 당시 유대인들이 일반적으로 믿던 ‘의인과 악인의 부활’ 정도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결국, 빈 무덤과 둥그렇게 말린 수건만으로는 부활의 기쁨 가운데 부활을 증언하는 사람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부활의 첫 목격자 (20:11-17)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 앞에서 눈물 흘리며 통곡하고 있을 때 뒤에 서 계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동산지기인 줄 알고 시신이 어디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마리아야!” 하고 이름을 부르실 때, 예수님을 알아보고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만나게 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에 들렸다가 치유 받은 여인입니다. 자신의 삶을 회복시켜 주신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갈릴리에서부터 예루살렘까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신 예수님을 보며 그녀는 큰 슬픔과 절망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런 그녀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이 만남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과 기쁨이었을 것입니다. 평생동안 이 날의 감격적인 순간을 기억하였을 것이고 이것이 그녀의 삶을 바꾸어 놓았을 것입니다. 3. 부활의 첫 증인 (20:17-18)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제자들에게 가서 자신이 하나님께로 올라가신다는 소식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우리와의 새로운 관계를 선포하십니다. 이제 예수님의 아버지가 우리의 아버지가 되고, 예수님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자신이 예수님을 보았다는 것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전합니다. 그녀는 첫 증인이 됩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부활의 생명을 경험할 때, 변화된 삶을 살아가며 그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증인의 삶을 살수 있습니다.
- 추수 때가 임박했습니다.계 14:14-20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수많은 악이 존재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악을 보면서 묻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계시고, 그분이 전능하시고 선하신 분이라면, 왜 악을 보고만 계시는가? 하나님이 아예 안 계시거나, 계신다 해도 악을 해결할 능력이 없거나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런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은 정말로 악을 보고만 계시는가? 해결할 능력이 없고 관심이 없으신가에 대해서 분명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1. 곡식 추수의 의미 (14:14-16) 14절에서 예수님이 손에 날이 선 낫을 들고 계신 모습이 등장합니다. 이는 추수가 임박했음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곡식을 추수하는 장면은 세 가지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1)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모으는 것 2) 악에 대한 심판 3) 악에 대한 심판과 택한 자의 구원, 두 가지 모두 어느 해석이든 본문의 큰 흐름에는 무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본문의 문맥과 요한계시록 14장의 전후 내용을 살펴보면 ‘심판’에 초점이 맞춰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사도 요한이 이 장면의 배경으로 사용한 요엘 3장 13절 역시 심판의 장면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곡식 추수는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2. 포도 추수의 의미 (14:17-20) 이스라엘에서는 포도를 주로 포도주를 만들기 위해 재배했습니다. 수확한 포도는 술틀에 넣고 발로 밟아 즙을 짜내고, 이를 발효시켜 포도주를 만듭니다. 본문에서 언급된 술틀은 성 밖에 위치합니다(20절). 여기서 ‘성’은 하나님의 백성이 거하는 예루살렘 성을 의미하며, 성 밖은 하나님의 보호에서 벗어난 장소, 즉 심판의 장소입니다. 포도를 밟는 행위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상징합니다. 그 심판의 엄중함은, 술틀에서 수억 명의 피가 흘러나오는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그 피의 양은 포도 추수는 곧, 교회를 핍박하고 죽였던 짐승,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 우상 숭배자들이 받게 될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3. 하나님은 세상의 악을 보고만 계시지 않습니다. 도미티안 황제의 박해로 순교한 성도들이 하나님께 하소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심판을 왜 그렇게 더디 하십니까? 언제 복수해 주시겠습니까?” 이는 오늘날 우리가 던지는 질문, “왜 하나님은 악을 보고만 계시는가?”와 같은 질문입니다. 하나님은 추수 비유로 답하십니다. “나는 침묵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심판이 더딘 것이 아니다. 추수할 때가 되면, 신속하고 두렵게 심판이 이루어질 것이다.” 예수님의 손에는 이미 날 선 낫이 들려 있습니다. 심판은 준비되어 있고, 곡식이 익으면 추수할 것이며, 포도가 익으면 술틀에 던져질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지는 일입니다(히 10:31).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만을 강조하다 보면, 우리는 분노에 찬 무서운 하나님, 무자비한 재판자만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가 회개하고(벧후 3:9).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딤전 2:4). 하나님은 지금도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 우리를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4. 개인 적용
- 인생을 잘 살려면계 14:6-13사람들은 누구나 한 번뿐인 짧은 인생을 잘 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종교를 갖거나 책을 읽고 진리를 찾습니다. 행복과 기쁨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세상은 점점 더 다양하고 복잡해지며, 불확실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어떻게 사는 것이 인생을 잘 사는 것인지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설령 찾았다고 해도, 그 길이 과연 올바른 길인지 확신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계시록은 우리에게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인생인지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14:8). 8절에서 천사는 바빌론의 멸망을 선언하는데, 이는 당시 로마 제국을 가리키는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로마는 바빌론처럼 거대한 제국이었으며,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고 우상 숭배를 강요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로마의 멸망을 확정적으로 말씀하시며, 세상의 모든 나라와 모든 권세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이 세상을 ‘장망성(將亡城)’, 즉 장차 망할 성으로 경고하며,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고 언젠가 세상의 모든 것이 사라질 날이 올 것이라고 말씀합니다(벧후 3:7,10). 세상이 영원하지 않고, 사라 없어진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본향이 천국이며 이 땅에서는 나그네로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입니다(벧전 2:11). 2.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14:9-12). 세 번째 천사는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이 받을 심판에 대해서 말합니다. 이들은 첫째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게 되고, 둘째, 불과 유황의 연기로 고통받으며, 셋째, 밤낮으로 쉼을 얻지 못합니다(10절).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은 이 땅에서 잠시 편안하였을지 모르지만, 결국 죽음 이후에는 영원한 고통 속에서 쉼을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죽음 이후에 영원한 삶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 인생을 잘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을 때, 이 땅에서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주안에서 죽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14:13). 짐승과 우상에게 절하기를 거부하고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순교를 당한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말씀합니다(13절). 그 이유는 성도의 죽음은 믿지 않는 자의 죽음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는 자의 죽음은 심판이고 영원한 형벌의 선고이지만 믿는 자의 죽음은 수고를 그치고 영원한 안식을 누립니다. 그리고 그들이 행한 일이 그들을 따라다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땅에서 행한 일이 천국에서도 기억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믿을 때 우리는 믿음 안에서 당하는 고난에 대해서 새로운 관점을 가지게 되고, 죽음에 대해서도 담대해질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습니다. 4. 개인 적용
- 뜻을 정하는 제자들다니엘 1:1~9남유다 나라는 망하고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은 바빌로니아 땅에 포로로 끌려옵니다. 그러나 운(?) 좋게도 그들은 왕궁에서 바빌로니아의 최고 교육을 받습니다. 하지만 갈대아 땅의 낯선 문화와 교육들, 그리고 갈대아 신들을 숭배하는 이름으로 개명까지 당하였기에 그 땅에서 ‘뜻을 정하여’ 하나님의 백성다운 모습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그들이 받게 되는 교육과 그들이 먹고 마시는 음식들까지 대부분이 우상숭배와 연결되어져 있습니다. 이 때에 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선택은 어떠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거부한 다니엘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이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먹지 않은 이유는? 첫째 고통받는 유다 백성들을 두고 자신들만 배부름과 즐거움을 누릴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세상의 법칙은 나만 성공하면 되고, 나만 살아남으면 된다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이들과 함께 가야하고, 다른 사람을 성공시켜 주는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둘째 죄와 유혹에 대한 경계심 때문입니다. 왕의 화려한 진미를 즐김으로 그 땅의 쾌락을 사랑하게 될까봐 두려워 하고 경계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셋째 율법이 금하는 것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유대인의 율법에 명백히 금지된 음식(돼지고기)을 먹지 않으려 하였고, 또한 왕의 진미는 갈대아 신들에게 바쳐진 희생제물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컸습니다. 그로인해 자신들도 우상숭배에 동참하는 죄를 범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2. 호의와 동정을 받은 다니엘 다니엘에 환광장에서 호의와 동정을 받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의 환관장의 마음을 여서서 호의(은혜)와 동정(긍휼)을 받도록 하셨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이처럼 우리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감동시키셔서 은혜를 베풀게 하십니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왕의 명령에 정면충돌을 피하면서 동시에 그 땅의 악한 문화와 종교에 동화되지 않기위해 애를 썼고, 그런 다니엘과 친구들에게 하나님은 특별한 은혜와 긍휼로 그들을 보살피셨고 그 땅에서 가장 뛰어나게 하셨습니다. 3. 뜻을 정한다는 의미는? 첫째 어떠한 상황에도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정결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을 굳게 가지는 것입니다. 둘째 세상을 이기는 방법으로 나의 경험이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에만 전적으로 의지하겠다는 믿음의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셋째 세상적 즐거움을 탐닉함으로 영적, 도덕적 결심을 둔감하게 하기를 거부하려는 강한 의지적 결단입니다.마지막으로 우리의 싸움이 영적 싸움임을 알고 기도로 승부하겠다는 의지입니다. 그들은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창을 열고 하루 세 번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다니엘과 같이 어떤 상황에도 ‘뜻을 정하여’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행복한 제자교회 성도님들 되시길 소망합니다. 세상속에 살되, 세상에 점령당하지 않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믿음의 순결을 지켜내고자 결단하는 사람,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거룩한 주의 자녀 되시길 간절히 기도하고 축복합니다. 4. 개인 적용
- 승리의 노래계 14:1-5요한계시록은 2,000년 전, 우리와 다른 언어와 문화 속에서 기록된 책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황제 신상이나 우상에게 절하지 않는다고 박해받는 시대에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계시록을 읽거나 들을 때 큰 긴장감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성도들에게는 이 말씀은 그들의 현실이었습니다. 짐승은 시장과 경제를 지배하며, 기적을 통해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짐승의 표를 거부하는 자들은 죽임을 당합니다. 소아시아 교회의 성도들이 계시록13장의 짐승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저 무섭고 무자비한 짐승의 공격을 내가 이길 수 있을까?” 이 전쟁의 승패는 어떻게 될지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였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줍니다. 이 답은 우리에게도 중요합니다. 우리도 종류는 다르지만 비슷한 싸움을 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짐승의 표를 거부한 사람들, 황제 신상과 우상에게 절하지 않은 사람은 어떻게 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시온산에 선 승리자들 (14:1) 어린 양이신 예수님이 시온산에 서 있습니다. 여기서 시온산은 땅에 있는 산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상징합니다(히 12:22). 시 2:6에서 시온산에 ‘나의 왕’을 세웠다는 말씀이 성취된 구절입니다. “서 있다.”라는 말은 승리한 장수를 표현합니다. 어린 양옆에는 14만 4천명이 함께 서 있습니다. 이들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모든 백성을 상징합니다. 7장에서 나온 14만 4천명은 땅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모든 백성의 숫자인데 하늘에서 그 수는 변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마에 도장이 찍힌 백성을 끝까지 지켜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짐승의 표를 받지 않은 사람들의 마지막 결말이며 그것은 승리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십자가의 길은 ‘영혼 구원하여 제자삼는 일’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이 길은 쉽지 않지만, 승리의 길입니다. 사탄은 두려움으로 우리의 눈을 가려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승리를 볼 수 없도록 만듭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승리는 이 땅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 확인할 수 있으므로 우리는 어떤 형편 가운데 있더라도 소망 가운데 끝까지 인내할 때 시온산에 설 수 있습니다. 2. 승리자들의 노래 (14:2-3) 14만 4천의 셀 수 없이 수많은 구원받은 무리들이 시온산에서 새 노래로 찬양합니다. 이 소리는 거대한 폭포 소리와 같고, 천둥소리와도 같고, 거문고처럼 아름다운 소리입니다. 구약에서 새노래는 전쟁에서 승리를 찬양할 때 부르는 노래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의 찬양이 깊어질수록 천국에서의 찬양도 풍성해 질 것입니다. 3. 승리자들의 삶 (14:4-5) 4절에서 승리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의 3가지 모습이 나옵니다. ▶여자들과 더불어 몸을 더럽힌 일이 없는 정절을 지킨 사람들입니다. 평생 독신으로 지내는 성도가 아니라 황제숭배와 우상에 절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어린 양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다니는 사람입니다. 당시 박해상황을 고려할 때, 순교를 의미하는 걸로 볼 수 있습니다. ▶첫 열매로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첫 열매’는 모든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키는 상징입니다. 4. 개인 적용
- 666과 짐승의 표계 12:17-13:8지난주에, 용이 여인이 놓은 아들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지만 실패하였고, 하늘에서 미가엘과의 싸움에서도 패하고 땅으로 쫓겨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땅으로 쫓겨간 용(사탄 또는 악마)은 분노하지만, 사탄은 교회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작전을 수정하여서, 여자의 남아 있는 자손들 즉 성도들을 공격하는 걸로 계획을 바꾸고(계 12:17), 바다에서 나온 짐승과 땅에서 나온 짐승 두 짐승을 내세워서 공격하도록 합니다. 13장은 구체적으로 사탄이 어떻게 공격하는가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짐승의 수 666이 나옵니다. 사탄은 성도를 어떻게 공격하는지, 666이 무엇을 말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 666이 의미하는 것 요한계시록 13장의 짐승과 666은 악한 세력을 상징하며, 이는 다니엘서의 네 짐승과 연결되어 특정한 왕을 의미합니다. 짐승은 사탄으로부터 권세를 받았지만 사탄 자체는 아니며, 666이라는 숫자는 게마트리아(문자-숫자 대응법)를 통해 로마 황제 네로를 가리킵니다. 일부 고대 사본에서는 616으로 기록되었으며, 이는 네로의 철자 변형에서 비롯됩니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네로를 666으로 지칭하며 그의 잔혹한 박해를 경계했고, 후대 황제인 도미티안도 그 연장선에서 같은 은어로 불렸습니다. 따라서 666은 바코드나 현대적 개념과 관련이 없으며, 악한 권력에 대한 경고의 상징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 짐승의 표를 받는 것이란? 짐승의 표를 받는다는 것은 로마 황제의 소유가 되고 황제 신상에 절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요한은 짐승의 표와 다음 구절 14장 1절에서 어린 양의 이름이 이마에 적혀있다는 구절을 통해서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존재함을 설명합니다. 하나는 짐승의 표를 받아 세속 권력과 타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어린 양 예수님의 이름을 받아 그분의 소유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표를 가지려면 그분을 마음에 모셔야 합니다. • 짐승의 임무 용이 짐승에게 힘과 왕위와 큰 권세를 줄 때는 완수해야 하는 임무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경배하도록 만드는 겁니다. 역사적으로 도미티안 황제가 자신을 주 하나님이라고 이름을 바꾸고 경배하도록 요구하였습니다. 짐승은 기적을 통해 사람들을 미혹하며,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흉내 내어 경배받으려 합니다. 그러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고, 사로잡혀가서 칼에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듣고 열방에 복음을 전하는 나라가 된 것은 복음을 위해 헌신한 많은 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켄드릭 선교사는 24세의 나이에 조선에 와서 이듬해 맹장염으로 수술 후 회복하지 못하고 숨을 거둡니다. 세상이 보기에는 어리석은 삶을 살았다고 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켄드릭 선교사처럼 자신의 생명을 드린 수많은 순교를 희생제물로 받으셔서 조선 전국에 대부흥을 일으키셨고, 열방에 복음을 전하는 나라로 축복하셨습니다. 우리도 세상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께 인정받는 길을 걸어가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 개인 적용
- 교회가 고난받는 이유계 12:1-13지난 2주에 걸쳐서 세상 속에서 교회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고, 교회가 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교회가 고난받는 이유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성경에서 큰 주제가 고난입니다. 성경은 고난이 유익하므로 기쁘게 여기라고 말씀하지만 고난을 달가워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고난받는 이유를 알면 고난의 의미를 알게 되고 견디기가 쉬워집니다. 계시록 12장에서는 왜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고난받을 수밖에 없는지, 고난의 이유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여자, 아들, 용이 상징하는 것 (1-3절) 요한계시록 12장에 나오는 여자는 구약의 이스라엘,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 용은 사탄을 의미합니다. 여자의 해산 고통은 메시아 탄생을 위한 이스라엘의 고난을 상징합니다. 용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으로, 에덴동산에서 인간을 유혹했던 옛 뱀과 같은 존재로 묘사됩니다. 계시록의 사건들을 특정 시대의 역사적 사건으로 해석하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시대마다 해석이 달라질 위험이 있으며, 서구 역사에만 국한되는 문제도 발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계시록의 상징들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기보다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2. 교회가 싸워야 할 대상 (4절) 4절은 용이 아기가 태어나면 삼켜 버리려고 노리고 있었습니다. 사탄의 계획은 복음서에 예수님 탄생 당시 헤롯이 예수님을 죽이려 한 사건으로 기록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사람은 헤롯이지만 실제로는 사탄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도미티안 박해 때에도 교회는 극심한 박해를 당하였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도미티안이 교회를 말살하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탄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싸워야 할 대상은 도미티안이 아니라 사탄입니다.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상대와 싸워야 이길 수 있습니다(엡 6:12). 3. 교회가 고난받는 이유 (5-13절) 예수님은 여자에게서 태어나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 예수님을 죽이려던 사탄의 계획은 실패하였습니다. 1절에서 여인은 구약의 이스라엘을 상징하였지만, 예수님 탄생 이후에는 신약 교회 공동체를 동시에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승천 후, 하늘에서 미가엘과 천사들이 사탄과 전쟁을 벌여 승리하였고, 사탄은 땅으로 쫓겨났습니다. 이는 사탄이 하늘에서 힘을 잃었음을 의미합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해칠 수 없었기에, 대신 교회를 박해합니다. 이는 세상이 교회를 미워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사탄이 교회를 핍박하는 것은 자신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최후의 발악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사탄의 핍박에도 굴복하지 않고 예수님의 피와 성경 말씀, 그리고 예수님을 증언하는 삶을 살 때 사탄에게 승리할 수 있습니다. 4. 개인 적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