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S
말씀
- 광야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이유출애굽기 16:1-4올 한 해를 돌아보면 성도님들 가운데는 감사할 일도 있었지만, 고통과 어려움을 지나온 분들도 있습니다. 기쁘고 좋은 일이 있을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감사하게 됩니다. 그러나 어려움 속에서 감사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성경에서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들으면 마음 한편이 불편해지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감사하기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우리는 어떻게 감사할 수 있을까요? 오늘 이 질문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 이집트를 떠난 지 한 달쯤 되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 광야에 도착했습니다. 광야는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곳입니다. 이백만 명에 가까운 백성들은 굶어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차라리 이집트에서 죽었다면 나았을 것이다”라며 모세와 아론을 향해 원망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불과 몇 주 전, 하나님께서 홍해를 마른 땅처럼 가르시고 그들을 죽음에서 건져내신 기적을 직접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신’ 구원의 은혜라는, 홍해의 기적보다 더 큰 일을 행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런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기보다, 이집트를 떠난 것을 후회하며 지도자를 원망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왜 광야로 인도하셨는지에 있지 않았습니다. 오직 지금 배고픈 현실만 바라보았고, 결국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 채 원망만 쏟아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2. 시련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이유 하나님은 원망하는 이스라엘에게도 만나를 주어 굶지 않게 하셨습니다(출 16:35). 그리고 광야 40년 동안 그들의 옷이 해어지지 않고, 신발이 닳지 않으며, 굶주림 속에 버려지지 않도록 보호하셨습니다(신 29:5-6).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을 신뢰했다면 신 광야에서도 감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믿음을 굳게 하여 감사가 넘치게 하라”(골 2:7)고 권면합니다. 진정한 감사는 환경이나 조건에서 나오는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믿음에서 열리는 열매입니다. 3. 시련 가운데 하나님을 신뢰한 사람 호레이시오 스패포드(Horatio G. Spafford, 1828-1888)는 시카고의 변호사이자 법대 교수, 그리고 D.L. 무디의 사역을 돕던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에는 욥과 같은 시련이 이어졌습니다. 마흔 중반에 네 살 난 아들을 선홍열로 먼저 떠나보냈고, 몇 달 뒤 시카고 대화재로 전 재산을 잃었습니다. 충격 속에서 가족과 유럽 여행을 계획했지만, 급한 일로 인해 아내와 네 딸을 먼저 보냈습니다. 그러나 일주일 후, 배가 대서양에서 충돌해 침몰했다는 소식과 함께 아내만 살아남고 네 딸이 모두 세상을 떠났다는 전보를 받습니다. 아내를 만나러 가는 배가 사고 지점을 지날 때 그는 밤새도록 통곡했습니다. 그런데 아침 햇살이 선실로 들어올 때, 한 말씀이 그의 마음을 붙들었습니다. “너는 평안하냐? 네 남편이 평안하냐? 아이가 평안하냐?”(왕하 4:26).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그의 마음은 다시 평강과 감사로 회복되었습니다. 우리가 감사할 수 있는 이유는 환경이 좋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 때문이며,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 때문입니다. 4. 개인 적용
- 율법이 말하는 것, 복음이 말하는 것갈라디아서 4:21-27하나님은 복음의 진리를 구약성경, 곧 율법 곳곳에 담아두셨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그 율법 안에 감추어진 복음의 의미를 하나씩 끄집어내어 설명합니다. 만약 우리가 율법이 실제로 말하고 있는 것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율법을 잘못 해석하여 복음의 길에서 벗어나는 일을 막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창세기의 아브라함 가정에 나타난 두 아들의 이야기를 통해, 율법이 말하는 것과 복음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율법이 들려주는 이야기: 아브라함 집의 두 아들 (21-23절) 바울은 “율법을 의지하기 원하는 사람들아, 율법이 무엇을 말하는지 깨닫지 못하느냐?”(21절)라고 묻습니다. 다시 말해, 율법이 진짜 무엇을 말하는지를 알면 결코 율법을 의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두 아들(이스마엘과 이삭)을 통해 율법이 말하는 바를 설명합니다. 이스마엘은 여종 하갈에게서 태어났고, 이삭은 본처 사라에게서 태어났습니다(22절). 단순히 어머니가 다르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탄생 방식이 다르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스마엘은 육신을 따라 태어난 아들이었고, 이삭은 약속을 따라 태어난 아들이었습니다(23절). 육신을 따라 태어났다는 것은 인간의 힘과 계획, 즉 자연적이고 인간적인 방법을 의미합니다. 반면 약속을 따라 태어났다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와 은혜를 뜻합니다. 이 두 아들의 출생은 우리에게 중요한 영적 교훈을 줍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인간의 노력과 방법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과 은혜로 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영에서 난 것은 영이니”(요 3:6)처럼, 이스마엘의 출생은 육에서 난 것이고, 이삭의 출생은 성령의 역사로 태어난 새 생명을 예표합니다. 2. 율법이 말하는 것: 종의 자녀 (24-26절) 바울은 “이것은 비유로 표현한 것입니다”(24절)라고 말하며, 하갈과 사라는 여인이 아니라 상징임을 밝힙니다. 하갈은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을 상징하고 이스마엘은 율법 아래 종으로 살아가는 자들을 대표합니다. 반면 사라는 약속을 따라 자유케 되는 새 언약의 은혜를 상징합니다. 바울은 율법에 매여 사는 사람은 하갈의 자녀, 곧 이스마엘의 후손과 같고, 복음을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사라의 자녀, 곧 약속의 자녀, 자유인의 후손이라고 말합니다. 율법이 말하는 것은 “율법을 의지하는 자는 종이 된다.”는 것입니다. 3. 복음이 말하는 것: 약속을 따라 웃게 하시는 하나님 (27절) 바울은 이어서 이사야 54장 1절을 인용하며, 복음이 말하는 바를 밝힙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여, 즐거워하여라. 해산의 고통을 모르는 여자여, 소리를 높여서 외쳐라!” 아이를 낳지 못하고 해산의 고통을 모르는 여인은 절망과 수치, 버림받음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 여인을 통해 기적의 탄생과 노래의 기쁨을 이루십니다. 이 말씀은 90세에 아들을 낳은 사라의 기적과 연결됩니다.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한 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하신 일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복음의 진리를 보여줍니다. 누가 이 여인에게 노래하라고 명할 수 있습니까? 오직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죽은 자 같은 사라의 몸에 생명을 주셨다면, 그분은 오늘 우리의 삶에도 새 생명과 소망을 주실 수 있습니다. 복음이 말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도 약속을 이루시고, 절망의 자리에서 찬송을 회복시키신다.” 이것이 율법이 줄 수 없는 자유와 기쁨, 곧 복음의 능력입니다. 4. 개인 적용
- 해산의 고통갈라디아서 4:12-20목장에서 가장 큰 기쁨은 기도하던 VIP가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VIP는 구원의 기쁨과 확신 가운데 믿음이 잘 자라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처럼, 믿음이 흔들리거나 잘못된 길로 빠지기도 합니다. 그럴 때는 목자 목녀, 그리고 목장 식구들 모두가 함께 마음 아파하며 고통을 겪게 됩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로 인해 겪은 고통이 바로 그런 고통이었습니다. 오늘은 바울이 그 고통을 어떻게 바라보고, 감당했는지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갈라디아 교회의 변심 바울은 첫 선교지인 갈라디아를 방문했을 때, 그는 병든 몸이었지만, 갈라디아 교회는 그를 멸시하거나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천사와 예수님처럼 환영하며, 자신들의 눈이라도 빼줄 만큼 바울을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거짓 교사들의 선동에 넘어가자, 그 사랑의 관계가 원수 관계로 변하게 되었습니다(16절). 2. 영적 부모가 겪는 고통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염려가 된다’(11절), ‘당황스럽다’(20절)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염려가 된다’는 것은 두려움의 마음을, ‘당황스럽다’는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만큼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로 인해 깊은 심적 고통 가운데 이었습니다. 바울이 세운 교회가 위기에 처하고 고통받는 일이 일어난다면 우리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바울이 고통을 받았다면 우리도 고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고통을 당하면 도망가고 싶지만 바울은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했습니다(19절). 그가 고통을 회피하지 않은 이유는, 자신이 갈라디아 교인의 ‘영적 부모’였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형상이 너희 안에 이루기까지 해산의 고통을 다시 겪겠다”고 고백합니다. 다른 사람을 섬기다가 고통을 겪는다면, “나는 누구인가?”를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는 영적인 부모다’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럴 때 고통을 마주할 힘이 생기며, 하나님은 감당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십니다. 남자인 바울이 해산의 고통을 말한 이유는, 출산 과정이 영적 생명이 태어나고 자라는 과정과 닮았기 때문입니다. 청년이 된다는 것은 전신갑주를 입고 스스로 영적 전쟁을 할 때이고, 부모가 된다는 것은 해산의 고통을 감내할 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영적인 부모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3. 소쩍새의 울음 서정주의 시 ‘국화꽃 옆에서’에는 봄부터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밤새 울었던 소쩍새의 울음이 나옵니다. 사람들은 피어난 국화꽃에 주목하지만, 시인은 그 꽃을 피우기까지 울었던 소쩍새에 주목합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가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뒤에서 고통의 울음을 삼킨 소쩍새와 닮았습니다. 만약 소쩍새가 국화꽃을 피운 것을 인정받기 위해 울었다면, 그 울음은 시 속에 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17절에 등장하는 거짓 교사들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들의 동기는 갈라디아 교회를 세우기 위함이 아니라 바울과 교회를 이간질하고 자신들의 영향력을 키우려는 악한 의도였습니다. 다른 사람을 도울 때, 내가 영적인 부모라는 것을 기억할 때 우리는 올바른 동기를 지킬 수 있고, 그리스도의 형상이 다른 이 안에 이루어지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4. 개인 적용
- 말씀으로 견고해지는 신앙갈라디아서 3:6-14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성령을 받을 때 놀라운 체험을 하였고, 기적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 때문이냐, 아니면 복음을 듣고 믿었기 때문이냐?” 이 질문은 갈라디아 교회가 복음의 본질로 돌아오게 하는 결정적인 물음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체험에 머무르지 않고, 말씀 위에 굳게 선 견고한 신앙으로 세워지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은 어떻게 그들을 세우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말씀에 근거한 이신칭의 (6-9절) 바울은 6절부터 13절까지 무려 여섯 번이나 구약 말씀을 인용합니다. 이는 갈라디아 교회를 말씀 위에 다시 세우려는 바울의 의도를 보여줍니다. 6절의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은 창세기 15장 6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네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는 약속을 믿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롭다 하셨습니다. 이때는 아브라함이 아직 할례를 받기 전이었기에(롬 4:10),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의 진리가 이미 창세기에서부터 드러납니다. 또한 아브라함은 할례받지 않고도 믿는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되었고(롬 4:11), 바울은 이를 통해 갈라디아 성도들이 참된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말씀으로 확증해 줍니다. 8절의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창 12:3, 22:18)는 말씀은 복이 유대인만이 아니라 모든 이방인에게까지 전해지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체험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씀 위에 확신을 세우는 것입니다. ‘삶공부’는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적용하고, 암송하는 종합선물세트와 같습니다. 2. 말씀에 근거한 율법의 저주 (10절) 10절은 “믿음이 아니라 율법에 의지해 사는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라는 문제를 다룹니다. 바울은 신명기 27장 26절,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를 인용하여, 율법의 행위에 의지하는 사람은 결국 저주 아래에 있음을 지적합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소유한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부했고,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은 저주받은 자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율법 아래에 있는 모든 사람이 저주 아래 있음을 선언합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롬 3:10, 23). 오늘날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만약 그 동기가 하나님께 드림이 아니라 내 만족과 인정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 역시 율법적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자유를 누리는 길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갈 5: 16, 18). 3. 말씀에 근거한 그리스도의 속량 (13-14절) 유대인들은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라”(신 21:23)는 말씀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고난받고 멸시받는 메시아의 모습을 인정할 수 없었기에, 회당에서 이사야 53장을 건너뛰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과 내가 받아야 할 죄의 대가와 율법의 저주를 메시아가 대신 받으신 것이라는 것을 깨달으면 메시아의 고난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바울은 14절에서 결론을 내립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에게까지 전해졌고, 우리는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성령을 받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4. 개인 적용
- 장사하러 갑시다마태복음 25: 14~30마태복음 24장은 예수님께서 종말에 관해 묻는 제자들에게 종말의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말씀하셨다면 25장에서는 여러 비유의 말씀을 통해 ‘종말을 준비하는 성도의 자세’ 즉 다시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3가지 비유를 통해 가르치십니다. 먼저 ‘열 처녀 비유’, 그리고 ‘달란트 비유’ 끝에는 ‘양과 염소의 비유’가 나옵니다. 오늘은 달란트 비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다시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각 사람의 능력을 따라 달란트를 맡긴 주인 주인은 먼 길을 떠나면서 세 명의 종들에게 각자의 능력을 따라 달란트를 맡기면서 자신이 돌아올 때 가지 이것으로 장사해보라고 했습니다. 오랜 뒤에 주인이 돌아와서 셈을 해보니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 받은 종은 그것으로 열심히 장사하여 각각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남겼고, 주인에게 ‘착하고 신실한 종’으로 칭찬을 받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종은 그 돈을 잃을까 두려워하여 땅에만 묻어 두었다가 받은 그대로 주인에게 꺼내 놓았고, 주인으로부터 ‘악하고 게으른 종’으로 책망 받습니다. 2. 달란트 비유의 바른 의미와 목적 주인이 종들에게 맡긴 달란트 이야기는 비유입니다. 그러므로 달란트를 단순한 돈의 많고 적음이나, 또는 각자가 가진 재능 같은 것으로만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달란트를 맡기고 떠난 주인은 예수님을 상징하고, 달란트를 받은 종들은 그의 제자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모든 공생애 사역을 마치시고 제자들을 떠나 가시면서 마지막으로 맡기신 명령(달란트)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마지막 부탁의 말씀(마태복음 28장, 사도행전 2장)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어라”입니다. 즉 우리 각자의 능력대로, 맡겨주신대로 복음을 위해 일하는 사명이 바로 우리의 달란트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착하고 신실한 종’이 되려면 먼저 우리에게 달란트(사명)를 맡겨주신 주인(예수님)의 마음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상황과 처지, 능력을 잘 알고 계시는 주님께서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사명을 맡겨주셨다는 것입니다. 둘째 달란트를 맡은자는 말씀에 순종하여 충성되게, 신실하게 장사하기만 하면 됩니다. 내 능력이 어떻고, 상황이 어떻다는 핑계나 변명으로 달란트를 숨겨두지 말고 결과가 어떻든 맡겨진 사명에 충성해야 합니다. 셋째 얼마나 많은 열매를 남겼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열심히 장사하다가 실패하고 아무것도 남지 않을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선 “니가 나를 위해 노력하고 충성한 것을 안다. 끝까지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해 주었구나” 칭찬하고 안아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힘들고 어려워도, 실패해도 포기하지 말고 충성되게 장사하는 행복한제자교회 성도님들 되시길 바랍니다. 4. 개인 적용
- 이신칭의(以信稱義)갈라디아서 2:11-21베드로는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이 되는 세 사도 가운데 한 사람으로, 유대인 선교의 핵심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바울을 만나 복음을 함께 나누며 아름다운 교제와 친교의 악수를 나눈 뒤 안디옥 교회를 방문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바울과 크게 충돌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이 일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안디옥에서 일어난 두 사도의 충돌 베드로는 안디옥을 방문해 이방인들과 식사하며 교제하던 중, 야고보에게서 온 몇몇 사람들이 도착하자 그들을 두려워해 자리를 피했습니다. 이 모습을 본 바울은 베드로를 향해 위선적이라고 공개적으로 책망했습니다(12-13절). 바울이 이렇게 공개적으로 책망한 이유는, 베드로의 행동이 이방인들에게 “당신들은 부정하다”는 잘못된 메시지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모든 사람이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복음의 진리를 왜곡하는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2. 베드로를 일깨우는 바울의 책망 베드로가 식사 자리에서 물러난 숨은 이유는 할례받은 사람들, 즉 유대인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12절). 이는 베드로의 연약함이 드러난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연약한 베드로를 여전히 사용하셨듯, 오늘 우리도 연약함 속에서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연약함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하는 기회가 될 수 있으며, 오히려 자랑할 이유가 됩니다(고후 12:9). 우리가 누군가의 실패를 볼 때 “당신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라고 정죄하기보다, 복음의 확신을 다시 붙들도록 격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울은 16절에서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진리를 선포하며, 베드로와 모든 사람에게 복음의 핵심을 다시 일깨워 주었습니다. 3. 이신 칭의(以信稱義) –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다 베드로의 행동은 유대인의 정결과 관련이 있었지만 바울은 ‘정결’보다 ”어떻게 의롭게 되는가?“하는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복음의 핵심은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고 이것을 전달하기 원하였기 때문입니다. 16절에는 2가지 핵심 기독교 진리가 담겨있습니다. 첫째,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있는가? 둘째, 우리가 어떻게 의롭게 될 수 있는가? 답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이신칭의(以信稱義)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종종 의롭다는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생각에 머무릅니다. 우리의 삶이 완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칭의, 즉 ‘의롭다 하심’은 우리의 완전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따라서 삶이 변화되어야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의롭다 하심을 받은 후에 삶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변화의 시작은 율법에 대해 죽는 데서 비롯됩니다(19절). 율법에 대해 죽는다는 것은 더 이상 율법이 나를 정죄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가 열리게 됩니다. 새로운 관계가 무엇인지는 20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할 때 옛 삶은 끝나고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단순히 베드로와 바울의 갈등을 넘어, 우리가 어떻게 의롭다 하심을 얻고 그 은혜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지를 분명히 보여 줍니다. 우리 역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로서, 새로운 삶을 기쁨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4. 개인 적용
- 복음을 지켜낸 아름다운 연합갈라디아서 2:1-9하나님은 바울을 사도로 부르셨지만, 예루살렘 사도들보다 늦게 부르셨습니다. 또한 그에게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맡기셨고, 복음도 직접 계시로 주셨습니다. 사람은 흔히 자기 무리에 속하지 않은 이를 인정하지 않거나 견제하려는 성향이 있습니다. 만약 예루살렘 사도들이 바울의 사도직을 부정하고 그가 전하는 복음을 거부했다면, 바울의 이방 선교는 큰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며 복음 자체도 공격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까지 그 복음이 변함없이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바울과 예루살렘 사도들 사이에 하나님께서 이루신 아름다운 연합 덕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사도들 간의 연합을 이루셨을까요? 1.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보내심 하나님은 바울을 부르신 지 14년이 지난 후, 계시를 통해 바나바와 디도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그곳에서 자신이 이방인에게 전하는 복음을 사도들에게 설명합니다. 이렇게 공개적이고 공식적인 자리에서 복음을 확인받는 것은, 훗날 거짓 교사들의 공격을 미리 차단하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또 바울이 할례받지 않은 디도를 데려간 것도 중요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이는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예루살렘 사도들과 교회로부터 실제로 인정받았다는 객관적인 증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보내신 것은, 단순한 방문이 아니라 사도들과의 연합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큰 계획 속에 있었습니다. 2. 바울이 율법의 본질을 깨닫게 하심 예루살렘에 도착한 디도는 할례를 강요받지만, 바울은 단호히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할례가 복음의 진리를 왜곡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할례를 고집하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을 상징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할례와 같은 율법적 행위가 결국 사람을, 죄를 종으로 묶어 두며(갈 2:4), 행위로는 누구도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합니다(롬 3:20). 율법은 죄책감과 좌절만 남기지만, 복음은 우리에게 자유를 줍니다. 또한 복음 안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아직 율법과 믿음에 대해서 정립이 안 되었을 때, 하나님은 바울이 율법과 복음의 차이를 분명히 깨닫게 하심으로써, 율법주의의 공격으로부터 복음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3. 예루살렘 교회와 사도들의 고정관념을 바꾸심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들은 사도들은, 그 위에 어떤 것도 더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입니다(6절). 이는 곧 디도와 같은 이방인도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한 형제로 인정했음을 의미합니다. 사실 예루살렘 교회와 사도들이 이방인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배경에는 고넬료 사건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처음에 이방인은 부정한 사람이라며 함께할 수 없다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로마 백부장 고넬료가 복음을 듣고 성령을 받는 것을 직접 목격하면서, 그 고정관념이 무너졌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와 사도들도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바울이 예루살렘을 찾았을 때 그가 전하는 복음과 이방인 선교 사역이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졌고, 사도들은 바울과 친교의 악수를 나누며 아름다운 연합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신 이 연합으로 말미암아, 바울에게 주신 복음이 변함없이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해지게 된 것입니다. 4. 개인 적용
-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려면갈라디아서 1:11-19바울은 자신을 파송한 안디옥 교회에 돌아와 선교 보고를 할 때만 해도, 사역이 성공적으로 진행된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불과 1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그의 사역은 무너질 위기에 처합니다. 갈라디아 교회가 바울의 사도직을 인정하지 않고, 복음을 버린 채 율법으로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이런 상황은 누구라도 큰 충격을 받고 낙심할 만합니다. 자칫 사람의 지혜와 방법을 의지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다른 길을 선택했습니다. 바울은 이 상황에서 어떻게 이 위기를 극복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바울에게 닥친 위기 상황 바울이 세운 갈라디아 교회는 거짓 교사들의 속임수에 빠져 바울의 사도직을 부정했습니다. 바울에게는 교회를 핍박하고 파괴하려 했던 과거가 있었고, 예수님이 땅에 계실 때 직접 함께한 경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바울이 전한 복음까지 부정되었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믿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고, 반드시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선동했습니다. 결국 갈라디아 교회는 복음에서 떠나 율법으로 되돌아가며 무너질 위기에 놓였습니다. 2. 부르심과 사명을 붙들어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이 자신의 사도직과 복음을 변호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예루살렘 사도들의 권위를 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전한 복음은 사람에게서 배우거나 전수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 받은 것임을 분명히 했습니다(11절). 이를 증명하기 위해 그는 자신의 간증을 들려줍니다. 간증은 부끄러운 과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교회를 핍박하고 파괴하려던 자신이 변화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고(롬 1:1, 갈 1:1, 고전 9:1), 사명 또한 예수님께 직접 받은 것임을 증언합니다(16절, 행 26:16-17). 바울이 위기의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명에 대한 확신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사람들의 인정이 부족하고 열매가 보이지 않을 때,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명을 붙들 때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3. 인맥보다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 당시 교회 안에서 사도들의 위치와 영향력은 매우 컸습니다. 그들과 좋은 관계를 맺어두면 앞으로 사역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을 때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가서 사도들과 인맥을 쌓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지 3년 뒤에야 베드로와 약 보름을 함께 보냈고, 야고보를 만난 것 외에는 다른 사도들을 만나지 않았습니다. 그 후 무려 14년이 지나서야 다시 예루살렘을 방문했습니다(2:1). 이는 바울의 사도직과 복음이 예루살렘 사도들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동시에 바울은 예루살렘 사도들과 같은 복음을 전하고, 같은 믿음 안에서 교제하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그는 사람이나 인맥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사람들의 인정이 없고 당장의 열매가 보이지 않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시고 부르셨다는 사실을 붙들 때 흔들리지 않고 견고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4. 개인 적용
-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갈라디아서 1:1-9마틴 루터의 삶을 다룬 영화 ‘루터’의 첫 장면은 번개와 폭우 속에서 바닥에 엎드려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루터의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롭지 못한 자신의 모습과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모습을 극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루터는 의롭게 되기 위해 금욕적인 삶을 살았지만, 오히려 죄를 더 깊이 자각하며 절망합니다. 죄사함의 복음을 듣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1500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복음이 왜곡되고 변질되어 수도사였던 루터조차 성경이 말하는 복음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성경에서 말하는 복음이 무엇인지, 그리고 다른 복음이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갈라디아 교회의 시작과 위기 안디옥 교회는 성령의 지시를 따라 AD 46년, 바나바와 바울을 첫 해외선교사로 파송합니다. 두 사람은 키프로스 섬을 거쳐 지금의 터키 남부지역, 곧 버가와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전합니다. 루스드라에서는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사람이 걷게 되는 이적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동시에 바울은 돌에 맞아 죽은 줄 알고 성 밖에 버려지는 박해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세워진 교회가 바로 갈라디아 교회입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이 전해준 복음을 떠나 다른 복음으로 넘어가는 위기에 빠집니다. 이 소식을 들은 바울은 큰 충격을 받았고(6절), 다른 복음은 없으며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하는 것일 뿐이라고 단호하게 선언합니다(7절). 2. 그리스도의 복음 그렇다면 왜곡되지 않은 복음, 곧 그리스도의 복음(7절)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이 우리를 악한 세대에서 건져 주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몸을 바치셨다(4절).”는 것입니다. 여기서 “건져주신다”는 말은 누군가의 도움으로 살아나는 것을 뜻합니다. ‘대속’은 원래 노예시장에서 쓰던 말로, 값을 지불하고 노예를 사서 자유를 주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노예가 자유를 얻기 위해 스스로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대가를 치른 예수님의 은혜만 있을 뿐입니다. 구원은 은혜로(by grace), 믿음을 통하여 (through faith) 받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믿음은 단지 구원의 통로일 뿐이며, 구원은 전적으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몸을 바치신 대속의 은혜로 주어집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3. 다른 복음 그러나 갈라디아 교회에는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율법도 지켜야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거짓 신도들이 들어왔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거짓 신도들의 주장에 쉽게 넘어갔습니다. 복음에 무엇인가를 더하는 것이 복음을 왜곡시키는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도 연옥설과 면죄부로 복음을 왜곡시켰습니다. 그러나 마틴 루터는 갈라디아서 말씀을 붙들고, ”오직 성경“과 ”오직 믿음“이라는 진리를 통해 왜곡된 복음을 바로 잡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복음에 무언가를 덧붙이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서 ”정말 이것만으로 구원이 가능한가?“라는 의문을 가집니다. 그러나 성경은 구원이 철저히 하나님의 선물임을 선포합니다. 만일 구원이 선물이 아니라 자격에 따른 것이라면 아무도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4. 개인 적용
- 염려없이 살려면시편 23:1-6다윗은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언제 잡혀 죽을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도망 다녀야 했고, 자녀들 간의 갈등으로 마음 아픈 일을 겪었으며,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생명의 위협까지 당했습니다. 그 누구보다 염려가 많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시편 23편에는 염려가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윗은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라고 고백합니다. 누가 보아도 불안하고 염려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다윗은 어떻게 염려 없이 살 수 있었을까요?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내 속의 뿌리 깊은 염려 다윗의 고백은 인생 마지막 순간에 남긴 말이 아닙니다. 아직 살아갈 날이 많이 남아 있는 때에 한 말입니다. 곧, “앞으로 살아가는 모든 날 동안 나는 염려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우상을 섬기게 된 것도 먹고 사는 문제, 즉 생계에 대한 염려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경고하셨습니다(신 11:16-17). 그러나 그들은 비를 내려 준다고 믿었던 바알, 그리고 다산을 준다고 여겼던 아세라에 마음을 빼앗겨 결국 하나님을 떠나고 말았습니다(겔 20:28). 나라가 멸망한 이유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 불신과 염려’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치열한 경쟁 사회 속에서 직장, 건강, 결혼, 자녀, 학업,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늘 염려하며 살아갑니다. 2.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다윗이 염려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거나, 마치 깨진 그릇처럼 깨어진 삶을 경험하거나, 간절한 기도에 응답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 “하나님은 선하시지 않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반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면 그때는 “하나님은 선하시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처럼 ‘내 욕망을 채워주는 우상’을 섬기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인자’는 룻기에도 등장하는 ‘헤세드’로,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말씀하시면서도 늘 회개와 용서, 회복과 소망을 함께 약속하셨습니다. 다윗은 이를 “눈물 골짜기를 지나갈 때 샘물이 솟아난다”(시 84:6)고 표현했습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아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고 신뢰한다면, 우리 역시 다윗처럼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른다”는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3.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다윗은 마지막으로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라고 고백합니다. 이는 단순히 편안히 먹고 산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하나님과 늘 함께 살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의 표현입니다. 거의 마음은 역대상 15장에 잘 드러납니다. 다윗은 언약궤를 모셔올 때 왕의 옷을 벗고 베옷을 입었으며, 악기 연주에 맞춰 기쁨으로 춤추었습니다. 왕의 체면보다도 하나님의 임재를 기뻐하고 사모한 것입니다. 시편 마지막 구절,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만약 이어서 우리가 한 구절을 더 적는다면, 무엇이라고 고백하시겠습니까? 4. 개인 적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