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S
말씀
- 밥상에서 회복되는 인생시편 23:1-5우리는 살아가면서 상처를 받기도 하고, 때로는 남에게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어떤 상처는 너무 깊어서 내 삶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특히 가까운 친구나 가족에게 받은 상처는 오래도록 남아 아픔을 줍니다. 다윗의 삶을 돌아보면, 그만큼 많은 상처를 경험한 사람도 드뭅니다. 그는 평생 결핍과 분노, 그리고 상처에 묶여 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편 23편을 보면, 결핍과 분노, 상처의 그림자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풍성함과 만족, 기쁨이 흘러넘칩니다. 다윗은 어떻게 해서 결핍과 상처에 매이지 않고도 이렇게 풍성하고, 기쁨이 가득한 삶을 살 수 있었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채워져야 할 빈 잔 영화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을 ‘클라이맥스’라고 부릅니다. 시편 23편에서 그 절정은 바로 5절입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고백이 그 중심에 있습니다. 4절까지는 하나님을 목자에 비유했지만, 5절부터는 연회장의 주인으로 비유가 바뀝니다. 잔이 넘친다는 표현은 주인이 손님을 향해 베푸는 극진한 환대를 뜻합니다. 그런데 다윗의 현실을 보면, ‘내 잔이 넘친다’는 고백이 결코 쉽지 않은 삶이었습니다. 그는 사울의 살해 위협 속에서 10년을 쫓기며, 언제 죽을지 모르는 긴장과 불안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의 인생은 빈 잔과 같았습니다. 2. 밥상에서 채워지는 빈잔 그럼에도 다윗이 “내 잔이 넘친다”고 고백할 수 있었던 이유는 두 가지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차려 주심”과 “머리에 기름을 부으심”입니다. 여기서 ‘상’은 밥상을 의미합니다. 원수 앞에서 상을 차려 주셨다는 것은, 연회의 주인이 손님을 원수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모든 원수의 손에서 지켜주셨다는 사실은 사무엘하 22장의 승전가에서 잘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다윗만 아니라 우리도 왕의 식탁으로 초대하십니다(고전 1:9).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갈릴리로 돌아갔을 때, 예수님은 그를 왕의 식탁으로 부르셨습니다(요 21:9-10, 15). 그 자리에서 베드로의 무너진 삶은 회복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말씀과 기도로 우리를 식탁에서 만나길 원하십니다. 빈 잔 같은 우리의 인생은 그 식탁에서 채워지고, 상처는 치유를 넘어 영적 회복으로 나아갑니다. 3. 기름 부으심으로 채워지는 빈 잔 다윗이 “내 잔이 넘친다.”라고 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부으셨기 때문입니다. 기름을 붓는 것은 연회에 초대받아 온 손님을 환대하는 뜻이기도 하지만, 구약에서는 왕·제사장·선지자를 세울 때 하나님께서 택하셨음을 나타내는 표식이기도 했습니다. 다윗은 절망과 두려움 속에서도 이 ‘기름 부으심’을 통해 하나님의 평안, 기쁨, 은혜, 보호를 경험하였기 때문에 잔이 넘친다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영접하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은 성령의 기름을 부으십니다(요일 2:20). 기름 부으심은 사명을 주신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고후 1:21 개역개정, 새번역). 하나님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시고 고난을 지나게 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가 되는 가문으로 세우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기름 부으심을 받은 사람답게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할 때, 하나님의 평안과 기쁨, 은혜가 충만하게 되고,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4. 개인 적용
- 염려 대신 신뢰시편 23:1-6다윗은 광야를 지나온 것과 같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고백합니다. 다윗은 어떻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양이 하지 않아도 되는 염려 양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풀과 물입니다. 하지만 양은 내일 먹을 풀이 있을지 걱정하지 않습니다. 목자가 언제나 좋은 풀밭으로 인도할 것을 믿고 따르기 때문입니다. 양의 염려는 목자의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달랐습니다. 광야 40년 동안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염려하며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는 염려는 필요 없는 염려를 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2. 광야에 없는 3가지 1) 길이 없습니다. 광야에는 정해진 길도, 이정표도 없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앞서 가셔서 갈 길을 보여주셨습니다(신 1:33). 하나님은 우리보다 앞서 행하시며 길을 예비하시는 목자이십니다. ‘쉴만한 물가’라는 표현은 원어로 ‘잔잔한 물가’를 뜻합니다. 양은 털이 젖으면 가라앉기 때문에 빠르게 흐르는 물을 무서워합니다. 목자는 그 약점을 알고, 잔잔한 물가로 인도해 물을 마시게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가장 알맞은 방법으로 인도하십니다. 2) 먹을 음식과 마실 물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 후 한 달 만에 식량이 떨어지자 모세를 원망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원망을 들으시고 한 달 동안 메추라기를, 그리고 40년 동안 만나를 공급하셨습니다(신 2:7). 목자가 양을 푸른 풀밭으로 인도하듯이 오늘날도 하나님은 우리의 먹을 것과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마 6:31) 하나님은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돌보시듯 우리도 돌보십니다. 우리가 정말 신뢰해야 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3) 쉴 곳과 숨을 곳이 없습니다. 광야에는 맹독을 지닌 불뱀과 전갈이 있습니다. 낮에는 40도가 넘고, 밤에는 영하로 떨어지기도 합니다. 숨을 곳도, 쉴 곳도 없는 환경입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이 살아남은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안고 인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1장 31절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사람이 자기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 치열한 세상 속에서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안고 가시기 때문입니다. 양은 염려하지 않습니다. 양에게는 돌보는 목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목자되신 하나님이 양과 같은 자신을 알고, 필요를 채우시며, 연약함을 품고 인도하신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3. 개인 적용
-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려면시편 23:1-6윤동주의 「서시」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 중 하나입니다. 이 시가 많은 사랑을 받는 이유는, 일제 강점기라는 고난의 시대에 감옥에 갇혀 고문당하던 시인의 고뇌와 갈등, 그리고 신념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짧은 한 편의 시에 시인의 생애가 담겨 있듯이, 시편 23편 역시 다윗의 삶이 녹아 있는 시입니다. 이 시편이 정확히 언제 쓰였는지는 알려지지 않지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원수의 목전”,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같은 표현을 볼 때, 왕이 된 후 죽음의 위협을 여러 차례 겪고 난 뒤에 기록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1) 여호와는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유대인들은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죄악된 입술로 발음하는 것은 불경한 것으로 여겨 주님(아도나이), 또는 하나님(엘로힘)으로 바꾸어 부릅니다. 이것을 잘 아는 다윗이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언급한 것은 자신과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목자’ 대신 ‘나의 목자’라고 한 것은 개인적인 체험에서 나오는 고백입니다. 2) 나의 목자시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고백은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고 경험해야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려면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찾으면 만날 것이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만날 수 있습니다(렘 29:13-14). 3) 우리는 양과 같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목자라고 고백했다는 것은, 자신을 양으로 여겼다는 뜻입니다. 양은 시력이 약해 방향감각이 없고, 맹수의 공격에 스스로 방어할 능력이 없으므로 자신을 지키고 인도해 줄 목자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성경은 우리도 양과 같다고 말씀합니다(마 9:36). 그런데도 목자되신 하나님 없이 혼자 힘으로 살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다행히 양은 청각 능력이 뛰어나서 목자의 음성을 잘 듣고 따릅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목자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것은 마치 어두운 밤길을 등 없이 걷는 것과 같습니다(시 119:105). 2.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다윗의 삶에는 정말 부족한 것이 없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왕이 되기 전부터 10여 년 동안 장인인 사울 왕의 암살 위협을 피해 도망다녔습니다. 왕이 된 후, 밧세바 사건으로 하나님께 징계를 받았고, 그로 인해 태어난 아이가 죽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딸 다말은 이복오빠 암논에게 성폭행을 당했고, 압살롬이 암논을 죽이고 그술로 도망칩니다. 나중에 압살롬은 왕위를 노리고 쿠데타를 일으켜 다윗은 다시 도망자 신세가 되었고 말년에는 또 다른 아들 아도니아가 왕위를 찬탈하려고 반역을 일으킵니다. 다윗의 삶에는 부족함이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한 것은 그의 상황이 평탄했기 때문이 아니라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신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광야에서 40년을 살았습니다. 그곳은 물과 음식이 없고, 낮에는 40도가 넘고 밤에는 영하로 떨어지며, 맹독을 가진 불뱀과 전갈이 우글거리는 곳입니다. 적이 공격하면 숨을 곳조차 없는 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부족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고 말씀합니다(신 2:7).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끊임없이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며 모든 것이 부족하다고 불평했습니다.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의 차이는 상황의 차이가 아니라 믿음의 차이였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목자’라는 것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차이입니다. 3. 개인 적용
- 예수님 재림을 준비합시다.요한계시록 22:18-20많은 사이비 이단 종교들이 시한부 종말론을 악용해 사람들을 미혹하고 갈취해 왔습니다. 1992년 10월 28일 예수님이 재림한다고 주장했던 이장림의 다미선교회는 대표적인 사례로, 한국 교회에 큰 혼란과 상처를 남겼습니다. 그후로 ‘예수님 재림’에 대한 말을 꺼내는 것이 꺼려지는 분위기가 생겼지만, 신약성경은 예수님 재림을 300번 이상 언급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마지막 책, 계시록의 결론 부분인 22장 20절에서도 예수님은 ‘틀림없이 속히’ 오겠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 재림은 확실하며 가까이 다가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분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1. 예수님이 언제 다시 오실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 장면을 바라보던 제자들에게 천사들은 “하늘로 올라간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행 1:11). 하지만 그 ‘때’는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모릅니다(마 24:36).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이 살아있을 때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재림이 지연되자 하나님이 약속을 더디 지킨다고 여겼습니다(벧후 3:9). 이에 대해 베드로후서는, 하나님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과 다르며, 지금은 겨우 이틀이 지났을 뿐이며(벧후 3:8),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는 이유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벧후 3:9). 예수님은 재림이 마치 도둑처럼 예상하지 못한 때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계 16:15, 마 24:42-44). 그렇기에 우리는 항상 깨어있어야 합니다. 2. 달란트 비유 예수님은 달란트 비유(마 25:14-30)를 통해 깨어서 재림을 준비하는 삶이 무엇인지 알려주셨습니다. 어떤 주인이 세 종에게 다섯, 두, 한 달란트를 맡기고 여행을 떠난 후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에 돌아와서 맡긴 돈을 결산합니다. 여기서 한 달란트는 노동자 15년치 품삯에 해당하는, 오늘날로 따지면 4-5억에 달하는 큰 금액입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두 사람은 2배의 이익을 남기지만,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그것을 땅에 묻어둡니다. 재산을 불린 두 사람은 남긴 수익의 액수와 관계 없이 ‘잘했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라고 칭찬하였고,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하며 바깥 어두운 곳으로 내쫓았습니다. 3. 재림을 준비하는 삶이란 달란트는 단순한 돈이 아니라 우리 각자에게 주신 기회와 책임을 말합니다. 세상은 얼마나 많은 달란트를 받았고 얼마나 많은 성과를 내었는지로 평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열매의 크기보다 충성을 보십니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똑같은 칭찬을 받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책망받은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주인을 오해했고, 둘째 자신의 잘못과 책임을 주인에게 떠넘겼기 때문입니다. ”나는 가진 것도 없고, 직장도 변변찮고, 능력도 부족한데, 하나님은 나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신다.“는 태도가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은 열매가 아니라 충성하였는지를 보시고 상 주십니다. 충성은 하나님이 있으라고 한 곳에서, 하나님이 하라고 한 일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열매나 사람들의 평가에 상관없이 감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삶은 충성된 삶입니다. 4. 개인 적용
- 이것이 영생입니다.요한계시록 22:1-51. 육신과 영의 생명 병원 응급실에 교통사고를 심하게 당하여 다리뼈가 개방골절이 된 환자가 오면 의료진이 제일 먼저 하는 것은 골절 수술이 아니라 생명과 관련된 혈압, 맥박, 호흡과 같은 생명징후(vital sign)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혈압이 떨어지면 즉시 원인을 찾고 조치를 해야 합니다. 찾지 못하면 사망하게 됩니다. 성경은 우리 영(spirit)도 생명이 있고, 죽어 있는 사람, 살아있는 사람이 있다고 말씀합니다(엡 2:1). 그러므로 교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응급실처럼 죽은 영혼을 살리는 일입니다. 영과 육의 죽음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의 죄로 시작되었지만(창 3:19), 누구든지 예수님을 영접하면 다시 살아나 생명을 얻게 됩니다(롬 8:10). 성경이 말하는 생명은 영생을 말합니다. 많은 사람은 영생을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것’ 정도로만 생각하지만 오늘 본문은 더 본질적인 2가지 의미를 말해 줍니다. 바로 저주가 없는 삶, 그리고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삶입니다. 2. 영생은 저주가 없는 삶입니다. 저주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하는 곳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직후입니다. 죄의 결과로 땅이 저주받고, 인간은 평생 수고해야만 먹고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창 3:17). 그러나 이사야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집을 지은 사람들이 자신이 지은 집에 살며, 포도나무를 심은 사람들이 자신이 기른 나무의 열매를 먹을 것이라고 말합니다(사 65:21-22). 즉 노력한 대로 누릴 수 있는 세상이 저주가 없는 세상입니다. 이 말씀은 계시록에서 성취됩니다. 영생은 새 예루살렘에서 저주가 없이 영원히 사는 삶을 말합니다. 3. 영생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삶입니다. 죄가 들어오기 전,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얼굴을 마주 보며 대화하였습니다. 그러나 죄를 범한 이후 사람은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영 없게 되었습니다. 모세처럼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나간 사람조차, 하나님의 뒷모습만 볼 수 있었습니다(출 33:23). 하지만 요한계시록은 새 예루살렘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눈으로 보는 것을 넘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 회복된다는 뜻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만, “거울을 통해 희미하게 보는 것”에 불과합니다(고전 13:12). 그러나 그날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는 온전한 교제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복중의 복, 영생의 핵심입니다. 새 예루살렘에서 영원히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막힘없이 교제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4. 영생의 공급원, 생명수의 강 이러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생명수의 강입니다(계 22:1-2절). 이 강은 하나님의 보좌와 어린 양의 보좌에서 흘러나와 새 예루살렘 한가운데를 흐릅니다. 이것은 이 도성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을 공급받으며 산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새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이 영생의 근원입니다.
- 새 예루살렘은 완성된 교회 모습입니다.요한계시록 21:9-21천국을 다녀왔다며 황금길, 열두 진주문, 열두 보석에 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도 요한계시록 21장을 근거로 천국을 그런 곳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21장은 죽은 후 가는 천국을 묘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장은 예수님이 재림하신 후, 이 땅에서 이루어질 새 하늘과 새 땅, 즉 완성된 천국에 대한 말씀입니다. 성경은 이곳을 “새 예루살렘”이라 부릅니다. 새 예루살렘이 어떤 곳인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새 예루살렘은 교회를 상징합니다. (9-11절) 사도 요한은 성령에 이끌려 높은 산 위로 올라가 예수님의 신부를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가 본 신부는 바로 새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즉, 새 예루살렘은 실제 도시가 아니라 예수님의 신부이며, 사람, 즉 교회를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도 교회를 건물에 비유하며, 교회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져 자라간다고 표현했습니다(엡 2:20-21). 신약성경은 교회를 물리적인 건물로 언급한 적이 없습니다. 믿는 성도들이 곧 교회이며 성전입니다(고전 3:16). 사도 요한이 본 새 예루살렘의 모습은 글로 표현하기 어려운 장면이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찬란한 보석에 비유하여 묘사합니다. 2. 교회는 예수님의 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곧 하나님의 임재를 뜻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이 함께 나타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단순히 복음을 듣고 이해한다고 해서 쉽게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교회가 보여주는 사랑과 능력을 통해 마음이 열립니다. 기독교가 로마 제국을 변화시킨 것도, 세상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랑과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교회를 예수님의 몸으로 비유했습니다(엡 1:22-23). 이것은 교회가 생명을 가진 유기체임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세상에 드러내야 하는 존재라는 뜻도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섬김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줄 수 있고, 기도 응답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인생의 문제들 속에 하나님의 임재보다 문제에 더 집중하기 쉽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그분의 임재를 사모할 때, 우리는 세상 속에서 예수님의 몸으로서 예수님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3. 새예루살렘은 완성된 교회 모습입니다. (12-21절) 새 예루살렘은 완성된 교회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1) 새 예루살렘은 순금으로 되어있고(18절), 일만이천 스타디온의 정육면체(16절)입니다. 순금은 순결함을 의미하며 정육면체는 성막의 지성소처럼 충만한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냅니다. 일만이천은 하나님의 모든 백성이 하나님을 만나는 공간을 나타냅니다. 2) 성벽(12절)은 완전한 안전을 의미합니다. 높이가 144 규빗(17절)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차별이 없음을 뜻합니다. 3) 열두 대문(12절)은 누구든 자유롭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음을 상징합니다. 문에 새겨진 12지파는 구약의 하나님 백성을 나타냅니다. 4) 성벽 주춧돌(14절)은 열두 사도의 이름이 새겨져 있으며, 신약의 하나님 백성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열두 문과 열두 주춧돌은 하나님의 모든 백성이 구원받고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상징합니다. 주춧돌은 모두 보석으로 되어 있고, 대제사장의 흉패에 달린 보석과 유사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백성은 새 예루살렘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4. 개인 적용
- 하나님의 마스터플랜, 에덴의 회복요한계시록 21:1-8오늘날 우리는 참혹한 재난, 자연재해, 전쟁뿐만 아니라 환경 파괴와 대기 오염으로 인한 기후 위기를 경험하며 지구 종말이 가까워졌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을 보면서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하늘과 땅, 아담과 하와, 그리고 그들을 두신 에덴동산이 실패한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마스터플랜의 궁극적인 결말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에덴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에덴을 회복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나와 있습니다. 1.하늘과 땅의 회복 (1절) 사도 요한은 이전의 하늘과 땅이 사라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나타나는 것을 봅니다. 새로운 하늘과 땅이 생기는 것은 새로운 창조가 아니라 본질이 새로워지는 ‘갱신’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바다가 없더라’는 표현은 물리적인 바다의 소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계시록에서 바다가 상징하는 ‘혼돈과 악의 세력’이 완전히 제거되었음을 뜻합니다. 이는 죄와 죽음이 들어오기 전의 원래 에덴의 모습이 회복된다는 의미이며, 하늘과 땅이 나누어지지 않고 연결되며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2. 하나님과 연합의 회복 (2-3절) 2절의 ‘새 예루살렘’은 교회 공동체를 말합니다. 믿는 성도와 하나님과 관계가 신랑과 신부의 관계처럼 친밀한 사랑의 관계로 회복됩니다. 3절에서는 하나님은 거처를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표현합니다. 함께 하신다는 것을 레위기 26장 11-12절에서는 너희 중에 ‘행한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이것은 살피고 돌보고 축복해 주신다는 의미가 있는 표현입니다. 이 땅에 완성된 천국이 임할 때 에덴에서처럼 하나님과의 온전한 연합이 회복됩니다. 3. 망가진 인생의 회복 (4-5절) 지금 우리 인생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생과 다른 모습입니다. 죄가 에덴에 들어온 이후, 인간의 삶에는 변명과 비난, 고통과 수고, 죽음이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4절에서 하나님은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시며, 더 이상 사망도,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원래 계획하신 인생의 모습으로 우리를 회복시키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완성될 때, 우리 인생은 본래 창조된 모습으로 회복될 것입니다. 4. 결론(6-8절):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 곧 처음과 마지막이십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심으로 역사를 시작하셨고, 천국이 이 땅에 임함으로 끝이 납니다(6절). 그래서 하나님은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에덴의 회복은 믿음을 지키며 이기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상속입니다(7절). 여기서 ‘이긴다’는 것은 고난과 핍박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믿음을 저버리는 자들은 결국 불과 유황이 타는 둘째 사망에 이르게 된다고 경고하십니다(8절). 하나님의 마스터플랜은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그 계획의 결말은 에덴의 회복이며, 이기는 자로 설 때,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새 하늘과 새 땅, 하나님과의 온전한 연합의 회복, 망가진 인생의 회복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5. 개인 적용
-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요한계시록 20:1-3요한계시록은 역사의 마지막이 어떻게 끝나는지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그중에서도 오늘 본문은 사탄의 최후가 어떻게 마무리되는지를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사탄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의 마지막까지 끊임없이 하나님을 대적하며, 죄와 죽음이라는 무기를 이용해 사람들을 멸망으로 몰아간 전과범입니다. 하나님께서 사탄을 어떻게 심판하시고, 궁극적으로 승리하시는지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사탄의 마지막 결말 성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 3장에는 죄가 어떻게 들어오게 되는지를 보여줍니다. 뱀은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죽지 않을 뿐만 아니라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된다고 유혹합니다. 하와는 그 말에 속아 선악과를 먹고 아담에게도 주어 함께 먹게 됩니다. 이로 인해 에덴동산에 죄가 들어오고 죽음이 시작되었습니다. 뱀은 에덴동산을 죄와 죽음으로 무너트리는데 성공한 것입니다. 이후에도 사탄은 하나님이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모든 민족에게 복을 주시려는 계획을 방해합니다. 성경의 마지막 책인 계시록 20장에서는 옛 뱀, 곧 사탄이 결박당하고(2절), 아비소스에 천 년 동안 갇히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3절). 2. 천년 왕국 사탄이 결박당하는 시점에 따라 신학자들은 크게 전천년설, 후천년설, 무천년설로 나눕니다. 전천년설은 예수님이 재림한 후에 사탄이 결박되고 천년 왕국이 시작된다고 주장합니다. 반면 후천년설은 천년왕국이 끝난 후 예수님이 재림하신다고 봅니다. 무천년설은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이 기간을 상징적인 천년왕국으로 이해하며, 사탄이 이미 결박되었다고 해석합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3장 27절과 마태복음 12장 29절에서 사탄이 결박되었음을 말씀하셨고, 누가복음 10장 18절에서는 사탄이 하늘에서 떨어졌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베드로후서 2장 4절과 유다서 6절에서도 사탄이 사슬에 묶였다고 증언합니다. 여기서 ‘결박’은 사탄이 모든 활동을 멈춘다는 문자적인 의미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인해 사탄이 더 이상 복음 전파와 믿는 자들의 구원을 방해할 수 없게 되었다는 영적인 의미입니다. ‘천년’ 역시 문자적인 숫자라기보다 매우 긴 기간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사탄이 결박되고 귀신이 쫓겨나는 것은 곧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였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입니다(마 12:28). 3.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 곧 천국은 죽은 후에 가는 곳이고 죽은 후에 경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 천국이 우리에게 임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2:28). 천국이 임하였다는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의미이며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할 때 예수님의 통치를 받는 삶, 즉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왕 되심을 고백하고 그분의 다스리심을 받아들일 때,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삶에 임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포로 된 자가 해방되고, 눈먼 사람들이 눈먼 자가 보게 되며, 억눌린 자가 자유를 얻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각자의 삶과 가정, 목장과 교회에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4. 개인 적용
-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창세기 22: 1~12하나님께 쓰임 받았던 사람들 대부분은 크고 작은 시험을 통과한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사명의 길로 들어서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여러 번의 시험에서 실패했지만 이런 시험들을 통해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게 되고 조금씩 믿음의 사람, 사명의 사람으로 준비되어 갔습니다. 1.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는 하나님 (1-2절)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아들, 자신의 전부와 같던 아들 이삭을 하나님은 모리아산으로 가서 번제물로 바치라는 엄청난 명령을 내리십니다. ‘네 자손을 통하여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하나뿐인 독자 이삭의 생명을 요구하십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지만 아브라함은 순종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이 시험을 통해 이제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하는 자’로 인정받게 됩니다. 경외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만 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기에 그 믿음 안에서 안식하며 순종하는 태도”입니다. 2.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의 신앙의 모습은? 1)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어떤 말씀에도 ‘즉각적인 순종’을 보이는 사람입니다. (3절)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내 생각과 판단으로 다 이해할 수 없는 명령에도 즉시 믿음으로 순종합니다. 순종이 나의 상식을 넘어설 때 우리의 신앙도 한 단계 더 성숙할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끝까지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8절) 번제할 어린양이 어디 있는지 묻는 이삭의 질문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손수 마련해주실 것이다.” 라고 대답합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예비하심이 분명 있을 것이라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고백과 기도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끝까지 신뢰하고 순종을 보일 때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예비하여 두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내 것을 고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12절)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자신의 가장 소중한 독생자를 아낌없이 보내주신 것처럼, 우리도 내 것을 고집하지 않고 내 마음의 중심에 있는 물질에 대한 욕심, 자녀에 대한 욕심까지도 하나님의 뜻에 맞게 올려드릴 줄 알아야 합니다. 3.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 우리가 자녀들의 영원한 부모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 자녀들이 영원한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을 그들의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가도록 도와야 합니다. 이를 위해 부모 된 우리가 삶의 자리에서, 가정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가는 모습을 자녀들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자녀들의 삶의 참 주인, 참 부모 되시는 하나님의 손에 자녀들의 삶을 내어 맡길 줄 아는 믿음의 가정,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이 되길 바랍니다. 4. 개인 적용
- 천국은 세상 마을 옆 동네입니다.요한계시록 19:1-10오늘날 ‘천국’이라는 단어는 ‘김밥 천국’처럼 일상에서 흔히 쓰이는 일반 명사처럼 여겨지곤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천국을 이 땅과 단절된, 죽어서야만 가는 아주 멀리 떨어진 장소로 생각합니다. 그곳에 가면 우리가 이 땅에서 겪은 기억이나 관계는 모두 사라지고, 천국에서는 그저 구름 위에서 하프를 연주하거나 끝없는 예배만 드리는 지루한 곳이라고 여기기도 합니다. 과연 천국은 그런 곳일까요? 요한계시록 말씀을 통해, 성경이 말하는 천국의 참모습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천국은 세상 마을의 일을 알고 있는 ‘옆 동네’입니다. (1-4절) 천국은 이 땅과 무관한 장소가 아닙니다. 천국에서는 이 땅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알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공의로 심판하실 때, 그곳의 성도들은 기쁨과 감격으로 반응합니다. 억울하게 죽임당한 이들의 기억과 감정이 여전히 살아 있으며, 하나님께서 정의를 이루실 때 천국은 찬양으로 가득합니다. 이 땅에서 예수님과 함께 동행한 이들은 천국에서도 그 관계를 이어가며, 예수님과 나눌 이야기가 많을 것입니다. 천국은 우리가 사모해온 곳이기에 낯설지 않고, 오히려 따뜻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2. 세상 마을은 옆 동네 천국으로 바뀝니다. (5-6절) 우리는 흔히 천국은 죽은 후에만 가는 곳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천국은 이미 이 땅 가운데 임하였습니다(눅 11:20). 비록 완전히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지금도 우리는 천국의 통치를 가정에서, 목장에서 교회에서 경험할 수 있습니다. 악과 사탄의 세력이 무너지고, 하나님께서 온전히 다스리시는 날, 천국은 완성될 것입니다. 세상 마을은 천국과 단절된 것이 아니라 천국의 영향권에 들어와 있습니다. 3. 천국에서는 혼인 잔치가 열립니다. (7-10절) 천국이 완성될 때, 거기서는 영광스러운 혼인 잔치가 열립니다. 신랑은 어린 양 예수님이시고, 신부는 교회 즉 우리입니다. 이 혼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입니다. 신랑이 신부에게 기대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정절입니다. 계시록 19:8에서는 이것을 ‘빛나고 깨끗한 모시 옷’으로 표현하는데, 이는 성도들의 의로운 행위를 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고 우상을 섬겼지만, 하나님은 끝까지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렘 31:32). 호세아서를 통해 그 사랑을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이 끝없는 사랑 덕분에 우리도 예수님의 신부가 될 수 있습니다. 신부가 입을 드레스는 우리의 노력으로 마련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옷과 의의 겉옷을 입혀주신 결과입니다(사 61:10). 결론적으로 천국은 이 땅과 단절된, 머나먼 공간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삶, 기억, 관계가 계속 이어지는 곳이며, 하나님이 직접 역사를 주관하시고 심판하시는 장소입니다. 천국은 지루하고 딱딱한 곳이 아니라 기쁨과 감격이 넘치고, 예수님과의 완전한 연합이 이루어지는 혼인 잔치가 열리는 영광스러운 곳입니다. 우리는 그날을 소망하며, 오늘을 살아갑니다. 4. 개인 적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