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S
말씀
-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요한복음 4:21-30예수님은 수가성의 여인과 두 가지 주제를 가지고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하나는 영생에 관한 것이었고 또 하나는 예배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밑바닥 인생을 살고 있던 그 여인의 처지에서는 자신의 죄와 고통을 들고 가서 하소연할 수 있는 진지한 예배의 대상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가 큰 관심사가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세상에서 버림받고 기댈 언덕을 찾지 못하면 하나님의 품을 그리워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런 자들을 만나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자의 예배를 받기 원하시며 그런 자의 마음의 상처를 싸매시기 원하십니다. 예배자의 조건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자는 성령으로 중생한(거듭난) 사람이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그의 자녀로 태어난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어떤 사람도 하나님을 진정으로 예배할 수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 중생한 확신이 없는 사람이 있다면, 죄 씻음 받은 확신이 부족하다면, 그리고 참 예배를 드리기 원한다면 간절히 기도합시다. “주여, 나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주님의 십자가를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주시옵소서.”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요,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높이고 찬양하고 영광 돌려야 할 하나님이십니다. 예배의 유일한 대상, 하나님 그러면 어떻게 예배해야 할까요? 바른 예배는 어떤 것일까요? 우선 예배하는 대상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 예배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주님이 가르쳐주신 진리를 명심해야 합니다. 먼저 신령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24절) 신령이란 말은 예배가 영적이란 의미입니다. 신령한 예배는 형상이 없는 예배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예배의 본질은 공동체로 드리는 것 신령한 예배는 본래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 드리는 것이 예배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한 개인의 예배 대상으로 머물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구원 얻은 모든 백성이 경배드려야 할 만유의 주가 되십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자들은 그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성도와 함께 모이기를 원하는 본능적인 갈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함께 모여서 우렁차게 찬송하고 기도하는 그 아름다운 시간을 사모합니다. 예배의 본질은 혼자 드리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부름 받은 거룩한 성도가 함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고 드리는 예배 끝으로, 진정한 예배는 하나님을 바로 알고 드리는 예배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해주셨습니까? 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가 무엇입니까? 이런 문제에 대답할 수 있는 지식을 가지고 드리는 예배라야 하나님이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가 바로 주님이 찾으시는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는 믿음으로,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헌금은 감사함으로, 찬양은 진심으로. 이 세상 다할 때까지 주님만을 찬송하는 자가 됩시다.
- 영혼 구원에 대한 예수님의 열정요한복음 4:1-10요한복음을 가장 잘 요약하고 있는 구절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3:16)일 것입니다. 이 말씀에는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열정이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가지신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 한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열정이 본문에 나타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님을 찾기 전에, 주님께서는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사랑은 이 사실에 있으니,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보내어 우리의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요일 4:10)라고 표현했습니다. 1. 구원에 대한 관심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로 통행하실 뿐만 아니라, 사마리아 여자에게 “마실 물을 좀 달라.” 하신 데에는, 사마리아 여인과 그 동네 사람들을 구원하시려는 예수님의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수가 성의 여인과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아야 할 사마리아 사람들의 구원에 대해 가지셨던 관심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구원코자 하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유대인은 통과하지 않던 사마리아 땅을 일부러 가기로 작정하신 것이 확실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하심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을 최우선순위에 두고 계셨습니다. 2. 가까이 다가오심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증오하고 멸시하며 그들과의 접촉을 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이 여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 뜨거운 사막 길을 걸어오셨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것처럼 결혼을 다섯 번이나 한 부끄러운 경력을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자연히 동네 사람들을 피해 다녔을 것이고, 사람 만나는 것이 두려워 뜨거운 대낮을 이용하여 먼 길을 걸어 도둑질하듯 물을 길러 왔을 것입니다. 우물가에 앉으셨던 예수님은 물을 길러오는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선생님은 유대 사람인데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질문을 할 정도로 이것은 어색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수가 성 여인과 사마리아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기꺼이 그런 장벽들을 허물어 버리신 것입니다. 3. 분명한 전달 주님께서는 수가 성 여인에게 자신이 누구이신지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인은 마셔도 또 목이 마를 우물물을 길러 왔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다시 목마르지 않을 ‘생수’를 주실 분이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그 여인에게는 생수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말씀하신 생수는 천국에 들어가는 구원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생수는 목마른 사람의 목을 축여주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그때까지 안고 씨름하던 문제에서 자유할 수 있습니다. 마음속에 갈증이 있다면, 생수되신 주님을 꼭 만나시기 바랍니다. 수가 성의 여인처럼 온전히 치유 받는 은혜가 여러분 가운데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한 누구에겐가 관심을 가지고, 가까이 다가가, 분명하게 전달을 해주면 그곳에서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납니다. 주님을 모르고 복음을 몰라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들을 찾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지금은 목말라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가까이 다가가 복음을 분명하게 전할 때입니다.
-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요한복음 3:22-36세례 요한은 선지자로서 대중 앞에 두각을 나타낼 때까지 광야생활을 하였습니다. 삼십 대 초반에 벌써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주목하는 위대한 선지자의 위치에 올랐지만 그 인기도 잠깐이었습니다. 일 년 남짓한 아주 짧은 기간 동안 혜성처럼 나타났다가 초라하게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는 헤롯의 부도덕함을 직설적으로 나무랐다가 투옥되었고, 얼마 후 간교한 헤로디아에 의해 목이 베여 그 머리가 쟁반에 담겨, 많은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비극적인 생을 놓고 왜 예수님께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하셨을까요? 분수를 아는 사람 세례 요한을 존경하고 따랐던 제자들은, 아무리 세례 요한이 증언했던 예수님이지만,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몰려가는 것을 기분이 좋았을 리가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면 지도자의 입장에서는 중대한 위기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지도자의 입장에서 견디기 어려운 일 가운데 하나는 제자들이 경쟁자를 질투하는 것을 보는 일일 것입니다. 이럴 때 지도자가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진정 큰 인물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입니다. 외모가 똑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듯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능력이나 역할도 사람마다 다릅니다. 누구든지 받은 것만큼 일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분수가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야말로 지혜 중에 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크게 기뻐하는 사람 예수님께서 요한을 세상에서 가장 큰 자라고 극찬하신 이유가 바로 29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신부를 차지하는 사람은 신랑이다. 신랑의 친구는 신랑이 오는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신랑의 음성을 들으면 크게 기뻐한다.”(29절)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면서 기쁨이 넘쳤습니다. 예수님은 곧 세례 요한 자신의 기쁨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처럼 예수님을 진정으로 기뻐하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큰 자입니다. 세상에서 누리는 명예보다도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오신 예수님 때문에 기뻐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큰 자로 보십니다. 예수님보다 크신 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이는 예수님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 크신 예수님을 기뻐하는 자도 예수님처럼 큰 자가 되는 것입니다. 낮아지는 사람 예수님께서 요한을 큰 자라고 하신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30절입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30절) 이 말은 “그는 더 커져야 하겠고 나는 더 작아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 한 마디에서 세례 요한의 간절한 소망이 무엇인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서, 영원히 경배 받으실 하나님으로서 높임을 받는 것이 요한의 소망이었습니다. 이것을 위해 자기가 작아져야 한다면 얼마든지 작아지기를 원했습니다. 인생은 들의 풀과 같고 그 영화는 들의 꽃과 같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렇게 허무한 인생이 역전되어 엄청난 영광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례 요한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기 위해 자기는 철저하게 쇠하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 “이처럼”의 사랑요한복음 3:14-21하나님은 하늘보다 높으신 분입니다. 그렇게 높으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구원을 필요로 하는 모든 인류를 가리킵니다. 구원을 받지 않으면 안 될 모든 사람들을 일컬어서 세상이라고 말합니다. 이 세상은 거룩하시고 높은 곳에 계시는 하나님에 비하면 너무도 낮고 천한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저 높으신 하나님께서 이 낮은 세상,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이 사실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높으며 얼마나 깊은가를 실감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확고하고 변치 않는 영생의 약속 하나님은 한 사람도 그 무서운 영원한 형벌에 집어넣지 않기 위해서 아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은 한 사람도 멸망시키지 않는 것입니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18절)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을, 베드로후서 3:9은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는 데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실증하셨습니다.”(롬 5:8)라고 하나님의 사랑을 기록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에 대해 이보다 더 큰 실제적인 증거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인자도 들려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왔다고 불평을 하고,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만나에 대해 “이 보잘것없는 음식은 이제 진저리가 납니다.”하고 불만을 터뜨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끝내 불뱀을 그들에게 보내셨습니다. 한번 물려 독이 퍼지면 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오르고 나중에는 퉁퉁 부어 죽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습니다. 원망하던 사람 중에 수많은 사람이 이 불뱀에 물려 죽어갔습니다. 모세가 이런 참상을 보고 너무나 가슴이 아파서 하나님께 그들을 살려달라고 매달렸습니다. 그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장대에 달려있는 구리 뱀만 쳐다보면 살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장대 위에 높이 들린 구리 뱀에 비유해서 자기가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입니다. “이처럼”의 사랑을 받으려면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이처럼”의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면 사람의 마음은 조급해집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면 불만이 생기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불평불만 가득한 백성들에게 불뱀을 보내셨지만, 그들을 다시 불쌍히 여기시고 단지 장대 위에 달린 구리 뱀을 쳐다보기만 하면 다 살아나도록 하셨습니다. 장대 위에 달린 구리 뱀을 본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 사랑을 체험하도록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하여 그의 사랑을 우리 마음속에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롬 5:5) 소낙비처럼 퍼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물밀 듯이 밀려오는 것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의 특성요한복음 3:8-13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바람을 비유로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바람에는 두 가지 성격이 있는 것을 예수님의 비유에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신비성입니다. 바람은 신비한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람이 어디서 생겨서 어디로 불며 어떻게 소멸하는지 그 당시 사람들로서는 도무지 추적할 수 없는 자연 현상이었습니다. 바람은 신비스러운 존재이면서 동시에 사실성을 갖고 있습니다. 아무리 미미한 바람이 지나가도 우리는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거듭난 사람에게도 이 신비성과 사실성이 동시에 존재합니다. 거듭남의 신비성 거듭남은 너무도 신비스러운 사건입니다. 성령님이 심은 말씀의 씨앗이 나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님과 말씀이 우리 안에서 어떻게 작용하여 그처럼 놀랍고도 신비스러운 일이 일어나는지 아무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알고 계시는 신비임에 틀림없습니다. 시편 저자는 자기가 태어나게 된 것이 너무도 신비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빚어진 것이 오묘하고 주님께서 하신 일이 놀라워, 이 모든 일로 내가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시 139:14) 오묘하다는 말은 너무나 신비하여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육신으로 태어난 것도 이토록 신비한데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이 거듭남의 신비스러움 때문에 다시 한 번 머리를 숙이고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거듭남의 사실성 거듭남은 신비성뿐만 아니라 사실성도 가지고 있습니다. 거듭난 자에게도 비슷한 사실성이 꼭 따라옵니다. 그것은 삶의 변화입니다. 거듭나서 새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따라오는 변화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세상의 빛(마 5:14)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부릅니다.(고후 2:15) 거듭난 사람은 그 변화된 삶을 통해서 모든 사람에게 자기를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중생 그 자체는 신비스럽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이 모릅니다. 심지어 중생 받는 사람 자신도 잘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나 중생 받고 거듭난 사람에게 나타나는 삶의 변화는 모든 사람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확인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땅의 일이요, 세상에서 볼 수 있는 사건입니다. 변화의 특징 거듭난 사람은 그 변화를 숨기지 못합니다. 처음에는 자신이 거듭났는지 잘 모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자라면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변화되어갑니다. 세상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합니다. 선악을 분별할 줄 압니다. 거듭난 사람은 죄에 대한 태도가 단호해집니다. 하나님의 씨가 우리 속에 있어서 죄를 범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거듭난 사람은 삶의 목표를 세울 때 전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 초점을 맞춥니다. 우리 자신을 중심에 두고 살던 삶이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난 사람이 세상 사람들 눈에 다르게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기독교의 능력은 변화된 삶에서 나옵니다. 기독교의 힘, 기독교의 권위, 기독교의 신뢰성, 이런 것들은 바로 거듭난 사람들의 변화된 삶에서 오는 것입니다. 변화된 삶이 기독교의 능력이요, 기독교가 이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비결입니다.
-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요한복음 2:12-22우리는 하나님의 속성이 보여주는 양면성을 잘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아버지이신 동시에 거룩하신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항상 용서하시지만 종종 징계하십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품은 항상 열려있지만 때로는 마음을 닫아 버리시는 무서운 하나님이십니다. 본문은 주님의 첫 번째 성전 정화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유월절이 되면 절기를 지키기 원하는 사람들이 원근 각처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왔습니다. 이곳에는 희생제물용 가축들로 붐볐고 그늘 밑에는 돈 바꾸는 상인들이 앉아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성전정화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서 현장을 보시자마자(14절)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채찍을 손에 쥐고 휘두르기 시작하셨습니다. 주님은 짐승들을 성전 마당에서 쫓아냈습니다. 그리고 환전하는 사람들의 돈 상을 뒤집어엎으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드러내놓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유대 나라에서는 아무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 그 사람은 성전모독죄를 범한 자로 다스렸습니다. 그러니 성전 안에서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말하는 것은 엄청난 문제를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렀습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보이는 형상이었기 때문입니다. 탐욕의 누룩을 채찍질하시는 주님 유월절이 다가오면 유대 나라 사람들은 집안에서 누룩을 전부 치웁니다. 또 누룩을 넣어서 찐 빵도 다 없애버립니다. 예루살렘 성전에도 누룩이 절대 보이지 않도록 싹싹 쓸어내 버립니다. 그러나 사람 눈에 보이는 누룩은 치웠지만 진짜 치워야할 보이지 않는 누룩은 그대로 남아있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5:10에서는 누룩을 탐욕이요 우상숭배이며 음행이라고 해석합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매매하는 사람들만 보신 것이 아닙니다. 그 성전 지도자들의 마음속에 쌓여있는 묵은 누룩, 즉 탐욕을 보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탐욕을 회개하지 않은 채, 겉으로 거룩하게 유월절을 지킨다고 하는 사람들에 대해 주님은 참지 못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비슷한 문제가 남아있지 않은지 두려운 마음으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배를 사모하는 열심 우리가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높이고 그분만을 경배하는 예배를 드린다면 주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 때문에 성전을 더럽히는 그 어떤 것도 생명을 걸고 막았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그 열심을 가져야 합니다. 예배를 더럽히고 예배를 예배답지 못하게 타락시키고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이면 어떤 값을 지불하고서라도 막겠다는 뜨거운 열심을 마음속에 간직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부활하셔서 영으로 이 자리에도 계시고 전 세계 어디에서나 그에게 예배하는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십니다. 두세 사람이 모였든지, 수천 명이 모였든지 예배를 받으시기 위하여 주님이 영으로 우리 중에 임하시는 영광스러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제 이 영광스러운 예배가 부패하거나 변질되지 않도록 주님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탐욕을 멀리해야 합니다. 뜨거운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변질되지 않는 예배자가 되어 영원토록 그분만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Options
- 가나의 혼인잔치요한복음 2:1-11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손님은 계속 오는데 포도주가 동이 났습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왜 예수님을 찾아갔는지 얼른 납득이 가지는 않습니다. 그때만 해도 예수님은 복음 사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이라 아직 예수님께서 무슨 표적을 행하신 일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예수님을 찾아가서 포도주를 만들어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마리아는 30여 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살면서, 예수님에 대한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잉태했을 때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특별한 증거들을 잊지 않았고, 예수님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남다른 일들을 기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여자여’에 담긴 의미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예수님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메시아적 권능을 은근히 기대한 것으로 보입니다. 5절, “그 어머니가 일꾼들에게 이르기를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한 말을 보다도 그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부탁을 받은 예수님은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대답을 하셨습니다. “여자여, 그것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직도 나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이 말씀은 의미상 “당신이 내게 대하여 무슨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까?”라는 권위를 묻는 문장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은 어느 사람의 요구에 의해서 표적을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는 말의 의미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영원 전부터 계획되었던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한걸음 한걸음씩 인도함을 받으셨고, 정해진 때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는 것을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복음서에는 대부분이 이런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하실 때에는 대개 어떤 요구를 거절하실 경우였습니다. 예수님은 메시아 사역을 수행해 나가시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의 때에 따라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서두르시거나 회피하지 않으시고 작정된 때에 작정된 하나님의 일을 하나하나 완벽하게 이루어 나가셨다. 물로 포도주를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하인들은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물이 가득 채워지자 주님께서는 이제 떠서 잔치를 책임지고 있는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마시고 너무나 놀라서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좋은 포도주를 먼저 내놓고, 손님들이 취한 뒤에 덜 좋은 것을 내놓은데, 그대는 이렇게 좋은 포도주를 지금까지 남겨두었구려!”(10절) 이와 같이 예수님은 처음으로 갈릴리 가나에서 하나님이신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신랑 신부는 물론 잔칫집 손님들을 기쁘게 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거절을 하시다가도 허락하시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주님이 잘 안 들어주실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수록 더 매달리십시오. 주님은 우리 기도가 너무 지나쳐서 들어줄 수가 없다고는 절대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이 제일 싫어하는 사람은, 주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하는데 구하지 않고 뻣뻣하게 버티는 사람입니다. 오히려 처음에는 거절하시는 것처럼 보여도 때가 되면 주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 와서 보시오요한복음 1:35-46가나안 곧 팔레스타인 땅에 살던 유대인들의 삶을 가장 고달프게 했던 것은 무거운 세금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당시에는 두 부류의 저항세력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에세네파였습니다. 또 하나는 열심당이었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답답해하던 사람들은 세례 요한에게서 새로운 희망을 보았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그의 메시지에 매료되어 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무엇을 찾고 있느냐? 세례 요한의 제자들 중에 예수님을 좇아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보시며 “무엇을 찾고 있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 이 질문은 오늘도 주님을 찾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질문입니다. 왜 예수님을 믿습니까? 잘못된 목적을 가지고 주님을 좇는 사람은 결국은 떠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주 확인해야 합니다. “나는 왜 예수님을 좇고 있는가?”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드디어 눈이 열렸습니다. 자기들과 마주하신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바로 그들이 그토록 대망하던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요한과 안드레를 보십시오. 얼마나 흥분했으면 날이 새자마자 자기 형제 베드로에게 달려가서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소.”(41절)라고 소리를 질렀겠습니까? 그날 두 제자가 엄청난 감동을 받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일입니다. 십자가만이 진정한 해결이다. 우리가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될 진리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 나라를 위해 오신 메시아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세상을 비참하게 만든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우리를 그 비참함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메시아입니다. 요한과 안드레는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시는 것을 보고, 또 성령을 받아 영의 눈을 뜨고 나서, 십자가만이 그들의 가슴에 남아있는 모든 문제의 진정한 해결책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서 제도나 사회의 구조를 다시 재건한다는 말은 아무 효과가 없다는 것을 역사를 통해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십자가를 통해 사람을 바꾸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영광스러운 주님이 다스리시는 새 하늘 새 땅이 이 땅 위에 그 모습을 드러낼 때, 우리는 지금까지 씨름하던 모든 문제들로부터 해방됩니다. 귀한 전도자 안드레와 빌립 안드레는 베드로를 예수님께로 인도한 사람입니다.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는 소년을 발견하고는 그를 예수님 앞으로 인도했습니다. 또 헬라 사람들이 예수님을 면회하고 싶어 찾아왔을 때, 안드레는 그들을 주님 앞으로 조용히 인도하는 안내자가 되었습니다. 안드레가 했던 일은 이처럼 사람들에게 드러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빌립은 성격이 그다지 적극적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난 후 그토록 기다렸던 메시아를 찾았다는 감격에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그는 가장 가까운 나다나엘을 찾아갔습니다. 빌립은 예수님에게서 배운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와서 보시오.”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발견한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 그 무엇을 가지고 있습니다. “와서 보시오.”라고 자신 있게 초청할 수 있는 이유를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의 영광을 보고 변화된 사람이라면 우리도 안드레가 될 수 있고 빌립이 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 충성된 증인 세례 요한요한복음 1:19-34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여자가 낳은 사람 가운데서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마 11:11)라고 칭찬을 하셨지만, 그는 예수님의 등장 직후에 그 모든 인기를 송두리째 예수님에게 넘겨드리고 삼십 대의 젊은 나이로 감옥에 갇힌 뒤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매우 동정이 가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역사에 등장한 누구보다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세례 요한의 외침이 워낙 능력이 있어서 그의 주변에는 이스라엘 사방에서 경건한 사람들이 참 많이 몰려들었습니다.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저분이 우리가 지금까지 기다리던 메시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으로서의 영광을 본 사람은 절대로 자기를 자랑하거나 높이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는 말라기 선지자가 예언한 엘리야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선포하기 위하여 세례 요한은 물로 세례를 준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만 바라보게 만들었습니다. 오직 예수만을 증거한 선지자 세례 요한의 말과 자세를 보면, 그는 오직 하나님 되신 예수님을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알려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어떻게 하든지 작아져서 사람들 앞에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비치기를 원했습니다. 15절에서 그는 예수님을 자기보다 앞선 분, 자기보다 먼저 계신 분으로 묘사했습니다. 30절에서도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태초부터 계시는 분임에 틀림없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세례 요한은 주님을 위해서 생명을 걸고 마지막까지 충성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철저히 낮아질 수 있으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세례 요한처럼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까? 그렇다면 우리도 세례 요한처럼 작아질 것입니다. 예수님만 크신 분이 되기를 원할 것입니다. 자신은 철저하게 낮아지고 겸손해질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죽도록 충성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다면, 우리도 언더우드처럼 주님을 증거하고 높이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와 같은 삶을 살기 원한다면 주님의 영광을 보게 해달라고 간절히 매달리시기 바랍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예수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계속 증거했습니다. 또 요한은 예수님을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으로 증거합니다.(33절) 성령은 예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성령 세례는 주님이 모든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받는 성령의 은혜가 바로 성령세례입니다. 이것은 체험적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체험이 있든 없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하나님의 소유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 예수님, 누구십니까?요한복음 1:1-8벌써 새해의 셋째 주일입니다. 한 해를 시작하면서 내가 믿는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다시금 확인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내가 아는 분이 누구인가에 따라 그분을 대하고 만나는 태도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친구를 만날 때는 다정하고 친밀하게 격의 없이 만날 수 있습니다. 평소에 사랑하고 존경하는 분을 만나면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예우를 다하여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시몬 베드로는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십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그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기 위해서도 우리는 예수님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1. 태초부터 계신 말씀 성경에서 ‘태초’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시간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다른 하나는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과거를 의미하는데, 이것이 요한이 말하는 태초입니다. 태초부터 계신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으므로, 말씀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들’이라고 해서 아버지보다 낮으신 분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하나님이시고 아들이신 예수님도 하나님이시며,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영원하시며 변함이 없으시고,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한결같은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신뢰하고, 그분께서 하신 말씀을 신실하게 이루실 것을 믿습니다. 2. 창조주 하나님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 성령 하나님과 만물을 창조하는 일에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예수님 없이 창조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처럼 태초부터 계신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 하셨고,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세상 종교는, 사람들이 신이나 초자연적인 절대자 또는 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인간 생활의 고뇌를 해결하고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추구하기 위하여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만든 신은 진정한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이 만든 종교는 철학이거나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볼 수 없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입으로 숨도 쉴 수 없습니다. 오직 모든 것을 만드시고 사람을 만드신 분만이 진정한 하나님이십니다. 3. 생명의 빛 말씀이신 예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분인 동시에, 그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그분은 생명의 원천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가시는 곳마다 생명이 태어나고, 그분을 만나는 사람마다 생명을 얻습니다. 또한 그분은 사람들의 빛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가시는 곳에는 어두움이 물러갑니다. 이 빛은 생명이 있게 하는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생명의 빛이 있는 곳에는 고통이 변하여 즐거움이 됩니다. 그곳에는 흑암이 사라지고 빛이 있게 됩니다. 그곳에서는 멸시 당하던 것들이 영화로운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신기함을,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주님의 영광을 보는 새해가 되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