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 세대 차이를 줄이고, 세대 통합을 이루려면
며칠 전에 한가위 명절을 지냈습니다. 며칠 연휴를 지내면서 십여 년 전의 일이 생각났습니다. 이 글을 쓰면 며느리가 창피스럽게 생각하면 어쩌나 하고 염려할 분이 계실까 보아 미리 말씀을 드립니다. 저는 사람에 관한 예를 들 때는 그 예와 연관된 사람에게 허락을 받고 합니다. 이 예도 제 며느리에게 허락을 받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긴장을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 첫 아들이 결혼한 지가 벌써 12년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그의 첫 아들이 초등학교 3학년입니다. 그의 아내인 저의 첫째 며느리는 세 살 때 선교사인 부모를 따라 태국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16년을 보내고 19살에 한국에 있는 한동대학교에 입학하여 4년을 보내고, 졸업 후 서울에 올라와 제가 담임을 하고 있던 다운교회에 3년을 다닌 후에 저의 아들과 결혼을 하였습니다. 워낙 성품이 단순하기도 하거니와 결혼 후 몇 년 동안은 한국의 문화를 잘 모르는 편이었습니다. 어느 날인가 그 다음날이 휴일이었습니다. 제 아들의 이름이 명철인데, 며느리의 이름이 마침 지혜입니다. 며느리는 다운교회의 청년이었기 때문에 교회에서 이름을 부르던 것이 버릇이 되어 그 날도 저의 며느리를 “지혜”라고 불렀습니다. 아들네 집은 걸어서 다닐 정도로 가까운 곳에 있었기 때문에 “지혜야 내일은 휴일인데 아침은 9시에 우리 집에서 먹자.”고 초대를 하였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 8시 반이 되어도 아들 부부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깊이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아마 9시에 밥을 먹자고 하면 늦어도 8시 반에는 나타날 것으로 제가 기대를 했던 모양입니다. 저는 시어머니인 아내 보기가 민망하여 열심히 부엌일을 도왔습니다. 그런데 정말 9시가 되니까 아들 부부가 나타나더군요. 문을 들어서는 그들에게 제가 넌지시 한 마디를 했습니다. “9시에 밥 먹으로 오란다고 9시에 오는 사람은 너희들 밖에 없겠다.” 이런 스트레스를 주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렇게 시댁에 오기 싫어하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아들 부부는 전혀 긴장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밥을 먹다가 한 마디를 더하였습니다. “오늘은 요리도 내가 했는데 설거지도 내가 할게.” 그랬더니 며느리가 바로 두 손을 들며 “와우!” 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조금 당황을 하였지만, 곧 ‘맞다. 쟤가 틀린 것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9시에 오라니까 9시에 왔고, 설거지를 다른 사람이 한다니까 “와우!”히며 좋아했고.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그리고 지금까지) 비슷한 일이 있으면 가족 카톡으로 보내거나, 아니면 두 아들 부부에게 문자를 보냅니다. “내일 아침에는 8시까지 와서 아침 준비를 같이 하자.”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배웠습니다. “세대 차이를 없애거나 세대 통합을 이루려면, 신세대가 기성세대에게 적응해야 한다고 요구할 것이 아니라, 기성세대가 신세대에게 적응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지금은 두 아들 부부가 여름휴가 때가 되면, 저희 부부에게 휴가를 같이 가자고 요청을 해올 정도로 관계가 좋습니다. 첫째 며느리는 친정 부모님이 선교사로 여전히 태국에 계시기 때문에 저희 부부를 의지할 수밖에 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시댁이라는 것이 그리 마음 편한 곳은 아닙니다. 그래도 제가 은퇴한 후에 교회에서 한 정거장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갔는데, 같은 아파트 단지로 두 아들 부부가 이사를 온 데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신세대가 기성세대에게 적응해야 한다고 요구할 것이 아니라, 기성세대가 신세대에게 적응을 해야 한다.”는 원칙을 지키고 있어서.(자랑처럼 들리면 용서하세요.)
- 감사의 반대말은 “당연함” (대양주 가사원장 강승찬 목사님 글 요약)
감사는 목회 현장에서 붙잡아야 할 중요한 단어 중 하나입니다. 또한 우리의 가정과 일상을 행복하게 만드는 중요한 단어이기도 합니다. 마음이 닫힌 VIP들에게 마음을 열게 하는 열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 주간에 있었던 감사한 일을 한 가지씩 나누겠습니다”하고 목장모임에서 나눔의 시간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코로나 재난시대를 맞이하여 감사의 고백이 쉽지 않습니다. 감사하고 싶은데 성도들이 직장을 잃기도 하고, 대면예배를 드릴 수가 없는 상황이 되거나 시시각각 변하는 코로나 바이러스 재확산 소식과 정부의 방역 방침의 변화로 인해 스트레스가 더 심해져서 그런지 한 주간의 목회현장을 되돌아보면 감사의 흔적이 좀처럼 보이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감사라는 단어는 모두 알고 있지만 감사를 삶에 적용하며 산다는 것이 쉽지 않은 시대입니다. 감사의 반대말이 무엇일까요? 불평일까요? 원망일까요? 아니면 무관심일까요? 기도의 자리에서 감사의 반대말은 ‘당연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식사대접을 받게 되면 누구나 대접하는 사람에게 고맙다고 말하면서 감사를 표현하지만, 날마다 밥 해주는 아내에게 날마다 고맙다고 고백하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있을까요? 아내에게 진정으로 감사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내가 밥 해주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우리가 감사를 상실해 버린 이유는 ‘당연함’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이 ‘당연함’을 ‘특별함’으로 바꾸어야 일상에서 감사하는 기적이 일어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당연함을 보석 같은 특별함으로 바꾸기 위해서 우리는 항상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시선으로 삶을 관찰하는 습관을 가져야 함을 우리는 목회 현장에서 배우고 있습니다. 불평과 원망은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못하는 불신앙에서 발생하지만, 감사는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게 하고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고 성숙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또한 감사는 우리를 영적으로 깨어있게 하여 분별력을 갖게 합니다. 다니엘은 감사를 통해 늘 깨어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교부인 크리소스톰은 “죄 중에 가장 큰 죄는 감사하지 못하는 죄”라고 말했고, 마르틴 루터는 “마귀는 항상 원망하고 불평할 뿐, 마귀의 세계에는 절대 감사가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결국 감사를 잃어버렸다는 것은 사단이 원하는 불평을 선택했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불평은 나를 영적으로 잠들게 하고 깨어있지 못하고 영적 게으름에 빠진 내 모습을 반영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큰 황소를 제물로 드리는 것보다 진정한 감사를 제물로 드리는 것이 하나님이 더 기뻐하신다(시 69:30-31)는 시편기자의 고백처럼, 감사가 우리 인격에 체질화되어 당연함을 특별함으로 바꾸어 목장모임 때마다 감사를 더 많이 고백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를 고백하는 성도들과 목장모임이 하나 둘 더 늘어간다면 코로나 재난 시대에 그 어떤 위기의 순간에도 믿음을 지키며 교회의 존재목적을 위해 헌신하는 성도들이 늘어날 것이고, 가정교회는 건강하게 세워질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힘든 상황일수록 상황을 잘 분별하고 감사로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지혜를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해 봅니다.
- 세례 간증문 (김하람 군)
안녕하세요? 매일 다른 분들 간증하는 것만 보던 제가 간증을 하게 될 줄은 몰랐네요. 저는 아주 어릴 때부터 교회를 나왔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어릴 때 나올 때는 아무 생각 없이 부모님이 가자니까 따라갔었던 것 같습니다. 또 교회 목사님의 설교는 무슨 말씀인지 이해하기 어려웠고, 제가 살고 있는 현실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라 목사님께서 설교를 하시면 10이면10, 100이면100, 항상 졸기 일쑤였습니다. 어릴 때는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갔었는데 조금씩 머리가 크면서 이럴 것이면 교회를 왜 가지? 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교회를 다니던 중 병원에서 예배를 드릴 때 말씀을 전하러 오셔서 이경준 목사님이 하루 설교를 하셨는데 그때 제가 설교를 듣고 느낀 생각은, 내가 살고 있는 현실과 거리가 먼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현실과 더욱 가까운 말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나에게는 항상 어려웠던 설교가 어렵지 않고 이해하기 쉬웠습니다. 오히려 설교가 재미있었습니다. 설교를 들으며, 세상에나 설교가 재밌다니!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똘망똘망한 눈으로 졸지 않고 설교를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 이후 이경준 목사님이 우리 행복한제자교회에 오셨습니다. 그때부터 설교를 들을 때에 졸지 않고 열심히 들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좀 흐르고 나서 제가 중학교 3학년 때 아빠와 함께 밤늦게 집에 가던 중 문뜩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이대로 계속 탁구를 치면 미래에 어떻게 될까?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생각을 하게 된 것이 저의 인생의 터닝 포인트였던 것 같습니다. 그 이후로 목사님의 말씀을 빌리자면 비본질적인 것에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긴다고 생각하여 게임을 끊고 만화 SNS 유튜브를 끊고 목사님에게 공부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께서 밤늦게까지 공부를 알려주시는 모습, 밤 1시에 교회에서 집까지 데려다 주시는 부모님의 모습, 도와주시고 기도해 주시는 형제자매님들의 모습에 저 때문에 고생하셔서 죄송하기도 하고 자기 일처럼 도와주셔서 감사하기도 합니다. 공부를 배우면서 지식만 쌓인 것이 아니라, 도덕적 신앙적으로도 많이 배운 것 같습니다. 하루는 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환자가 살려면 세 가지를 해야 한다. 첫째는 자신이 환자인 것을 인정해야 한다. 둘째는 의사를 믿어야 한다. 마지막 셋째는 수술대 위에 올라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비유와 마찬가지로, 저는 먼저 제가 죄인인 것을 시인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치러야 할 저의 죄 값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써 저를 대신하여 치르셨다는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예수님을 제 마음에 구주와 주인으로 영접했습니다. 그날 이후로 저는 예수님이 제 안에 계신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매일 한 장씩 성경을 읽고 매일 큐티도 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앞으로 저는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재능을 따라서 제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일, 제일 좋아하는 일,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유익이 되는 일을 통해서 값진 삶을 살도록 노력하고자 합니다.
- 사람들이 원하는 리더십
지난 토요일은 다운교회 담임목사가 위임목사가 되고 새로운 장로 여섯 분이 세워지는 임직식이 있었습니다. 가슴 뿌듯한 일은 새로운 장로 여섯 분 중의 세 분이 제가 결혼식을 주례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은 대학생일 때부터 제자훈련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늘 말했던 것처럼, 세상에 영원한 것은 세 가지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제 곁에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계시고,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그리고 영원한 하나님의 사람이 열매로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주일에 행복한제자교회에서 말씀을 전해야 하기 때문에, 축하 및 권면의 말씀은 영상으로 보냈습니다. 축하 및 권면의 말씀을 하려고 준비하는데, 빌립보서 3:1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내가 같은 말을 되풀이해서 쓰는 것이 나에게는 번거롭지도 않고, 여러분에게는 안전합니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말을 다시 하기보다는, 리더십에 대해 제가 자주 했던 이야기를 다시 생각나도록 영상으로 촬영해서 보냈습니다. 수년 전에 어느 회사의 신입사원 200명 앞에서 “비전과 꿈”에 대해 강의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강의 시작에 무선마이크를 한 사람씩 넘겨가며, “신입사원 교육이 끝나고 브랜드에 배치되었을 때 어떤 상사 밑에서 일하고 싶은가?”에 대한 대답을 하나씩 말하도록 했습니다. ‘마음이 따뜻하신 분’, ‘실력이 쟁쟁한 분’, ‘나의 의견을 잘 들어주는 분’, ‘내 사정과 형편을 잘 이해해 주는 분’, 그리고 가장 실속이 있게 ‘나를 승진시켜주고 내 연봉을 올려주실 수 있는 분’ 등의 대답이 나왔습니다. 대답을 모두 정리해보니, 결국은 실력 있는 상사, 성품 좋은 상사, 나를 잘 되게 섬겨 주실 상사로 요약이 되었습니다. 세 단어로 요약을 한다면 “실력, 성품, 섬김”이 되는 셈입니다. 아울러 신입사원들이 그런 상사를 원하는 것처럼, 수년 후에는 그들의 부하직원들이 같은 요구를 할 터이니, 이 세 가지를 갖춘 리더가 되는 것을 비전과 꿈으로 삼으라는 강의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로마서 15:14이 이와 똑같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여러분 마음에 선함이 가득하고, 온갖 지식이 넘쳐서, 서로 권면할 능력이 있음을 확신합니다.” 즉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닮은 선함이 가득한 인격,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영혼 구원하여 제자 삼는 사역에 대한 지식이 넘치고, 이를 바탕으로 서로 권면하여 다른 사람들을 능히 세워주는 섬김을 할 수 있는 리더가 되라고 권면의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에게는, 베드로전서 5:5-6 말씀대로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고 권면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리더에게 겸손하게 순종하는 일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지름길입니다. 아울러 히브리서 13:17도 같이 나누었습니다. 리더들이 기쁜 마음으로 인도할 수 있도록 하고 탄식하면서 하지 않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리더들이 한숨을 쉬면서 인도하는 일을 하면 리더 자신들도 힘들겠지만, 따르는 사람들에게도 유익될 것이 없을 것은 뻔한 노릇입니다. 우리 행복한제자교회 성도들에게도 동일한 말씀을 드립니다. 리더들은 “실력과 성품과 섬김”을 갖추어 나가시고, 성도들은 그들이 기쁨으로 인도할 수 있도록 겸손하게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 세례 간증문 (장진호 형제)
제가 이렇게 행복한 제자교회에서 마이크를 잡고 간증을 한다는 것이 저 자신 아직 어리둥절하기만 합니다. 저는 초등학교 1-2학년 때 부산 영도 영선동에 있는 조그만 마을교회에, 크리스마스 때 빵과 과자를 얻어먹기 위해 친구들과 한번 씩 가본 것이 전부입니다. 어린 시절 주로 어머니와 함께 절에 가서 앉아 있다 오는 것을 종교 생활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결혼을 하고도 초파일에 어머니와 장모님이 다니시는 절에 가서 연등을 달고 오곤 했었습니다. 1995년 5월, 아버지께서 사고로 돌아가시고 난 뒤 창원의 한 사찰에서 49제를 드렸는데 마지막 제삿날 어떤 여승의 회심곡을 들으며 마음속으로 슬피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뒤로도 집사람과 함께 여러 사찰을 찾아 집사람이 기도하는 동안 저는 등산을 하며 보내곤 했습니다. 그러나 사찰을 찾는 것이나 기도를 올리는 것은 그때일 뿐, 여전히 마음의 짐들을 해결할 수는 없었습니다. 2016년 어머니께서 뇌졸중으로 쓰러지신 후 저는 불면증을 겪게 되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면 잠을 잔 것 같지 않을 정도로 힘들었고 하루 종일 비몽사몽간에 일상생활도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당시 집사람은 불교대학을 다니며 법명을 받기도 할 정도로 열심을 냈지만 얼굴은 항상 어두웠고 저 역시 불면증이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몇 년 전에는 성당에 다녀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 집사람과 상의하여 남천성당에 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4개월 정도 교리공부를 해가던 중 한 모임에 참석하였는데 그 모임에서 새벽까지 술자리를 가지는 것을 보고, 이건 아니다 싶어 더 이상 나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작년 가을 집사람이 갑자기 교회에 가보고 싶다고 해서 그렇게 하라고 했더니 몇 달 지나지 않아 집사람의 얼굴이 밝아지고 그 기도 덕분인지 제 불면증도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게 무슨 조화인가 하고 생각하던 무렵인 지난 2월 중순, 교회에서 열린 안미영 목녀님의 학부모교육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실제적인 내용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을 뿐 아니라 당시 목사님, 사모님을 비롯한 교회 분들이 밝게 환영해주시는 모습이 너무 좋아서 교회에 나가보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리고 6월부터는 목장에 나가게 되었는데 목장 식구들의 열렬한 환영과 솔직한 나눔이 너무 좋아서 목장 참석한 지 두 번째 되던 6월 11일, 목장을 방문하신 목사님으로부터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듣게 되었으며 그 자리에서 바로 예수님을 저의 구세주로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6월 14일부터 8월 16일까지 사모님이 주최하신 “성경일독반”에 참석하여 두 달 만에 성경을 한번 읽게 된 것은 제게 큰 행운이었습니다. 아직은 모르는 것이 많고 낯선 것도 많지만 구약과 신약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또 예수님이 왜 저를 위해 돌아가셨는지,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이란 어떤 것인지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된 것이 너무 좋았습니다. 그리고 저의 삶을 주관하시는 분이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평소에 늘 가지고 있던 장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이 제가 경험한 가장 큰 축복인 것 같습니다. 지난 주 월요일(24일)부터는 사모님의 권유에 따라 성경을 천천히 한 번 읽기로 작정하고 이제 다시 시작을 하였습니다. 영접은 했다고 하지만, 그리고 영광스럽게도 오늘 세례를 받긴 했지만 아직 알아야 할 것도 많고 노력해야 할 일도 많은 것 같습니다. 진정한 크리스챤이 되기 위하여, 말씀대로 살아가며 기도와 교제 가운데 참된 제자의 삶을 살아가고자 노력하고 싶습니다. 많이 격려해주시고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한국가정교회 사역원장으로서 기도 부탁을 드립니다
국제가정교회 사역원장이신 이수관 목사님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후 최영기 목사님에게 카톡으로 연락을 드렸더니, “축하합니다 라기는 그렇고… 욕보세요.”라고 답장을 해주셨습니다. 그만큼 해야 할 일이 많은가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명의 삶” 마지막 부분에서 “헌신이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슨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것이다.”라고 설명을 했던 말이 떠오릅니다. 지금은 제가 부산의 한 가정교회를 섬기고 있어서 부산에서 자주 사용하는 말로 “욕보세요.”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실감이 납니다. 그만큼 열심히 하라시는 말씀으로 알아들었습니다. 여전히 사람들 앞에 서는 일은 일단 거북하고, 더구나 말을 하는 것은 가슴 떨리는 일이어서, 저는 3년 전 한국가사원장을 선출할 때에 (될지 안 될지도 모르면서) 일단 후보 사퇴를 했던 전과자입니다. 이번부터는 후보 사퇴는 없다는 원칙도 있어서, 만일의 경우에는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마음에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부담이 됩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의 일입니다. 저는 조바심이 많아서 시험만 보면 마음이 불안해지고 소변이 마려운 버릇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수줍음까지 많아서 첫 날 산수시험을 보는 날, 소변이 마려운데 선생님에게 화장실을 가도 되느냐는 질문을 하지 못하고 그냥 앉은 자리에서 쌌습니다. 문제는, 시험이 끝난 후에 일어나 걸어가는데 발자국이 찍히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본 아이들이 뒤에서 “선생님, 경준이 오줌 쌌나 봐요.” 하고 말을 했습니다. 그때 담임 선생님께서 교탁 앞에 서시며 하신 말씀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공부는 경준이처럼 해야 되는 거야. 얼마나 열중했으면 오줌 나오는 것도 몰랐겠니?” 선생님은 저에게 리더십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셨습니다. “이런, 바보 같으니. 오줌이 마려우면 말을 하지.”라고 말씀을 하셨더라면 저는 아마 지금 바보가 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선생님은 리더십이 무엇인가를 실감나게 알려주신 분이었습니다. “생명의 삶”에서 배웠고 또 가르쳤던 말이 생각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공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신실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한국가사원장이 정확하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니까 성공을 할 자신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하나 배워가는 대로, 그리고 그때그때 하나님께서 알려주시는 대로 신실하게 해볼 마음입니다. 최영기 목사님, 한국 가정교회의 대표로 또는 가사원장으로 수고하셨던 분들로부터 부지런히 배우고, 무엇이 필요한지 가정교회 목사님들로부터 자주 듣는 기회를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선교단체에서 20살에 복음을 듣고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기로 작정하였는데, 2년 후에 팀을 이끌던 분이 군목으로 입대를 하셨습니다. 팀에는 목사님의 아들, 주일학교 반사 등 저보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형제들이 있는데, 저에게 팀리더 자리를 맡기셨습니다. 앞이 캄캄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를 읽는 중에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4:10)라는 말씀이 얼마나 제 심정을 대변해 주시던지. 그런데 그 후에 나오는 말씀,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12절)는 말씀을 약속의 말씀으로 알고 시작을 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지금 심정이 그때와 거의 같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만 믿고, 그리고 여러분의 기도와 도움을 믿고 출발을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좋은 부모? 나쁜 부모! 7. 부부관계보다 자녀와의 관계를 우선하기
7. 부부관계보다 자녀와의 관계를 우선하기 가장 최근에 아이들을 떼어두고 하룻밤 이상을 단 두 분이 보내신 때가 언제입니까?” 부부가 아무런 불안감 없이 편안한 시간을 보내는 것은 부부뿐만 아니라 자녀에게도 좋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부부가 아이들을 떼어놓고 하룻밤 이상 멀리 나가는 일이란 거의 없습니다. 때로는 이런 행동에 대해 갈등하거나 죄의식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부가 따로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 누군가 자녀를 잘 보살펴줄 수만 있다면 부부가 이런 시간을 가지는 것은 부모와 자녀 모두에게 좋습니다. 특히 이런 경험을 통해 부부간의 관계가 더 친밀해지면 아이도 심리적으로 안정되고 잘 자랍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우리나라 부모들에게 자녀중심적인 생각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부부가 자녀중심으로 살면 문제가 생깁니다. 부부 관계와 같은 장기적인 인간관계는 영양분을 공급하고 돌봐주지 않으면 시들게 됩니다.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물도 주고 잡초도 뽑고 가지도 쳐주어야 합니다. 몇 십 년씩 같이 살았어도 진정 부부간에 강한 심리적 유대를 형성하지 못하면 이혼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부부가 서로 자녀에게만 관심을 갖고 자신들의 결혼생활에는 별 관심을 갖지 않기로 묵시적으로 타협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신들이 어릴 때 부모에게 느꼈던 박탈감이나 고통을 보상받기 위해 자녀에게 모든 시간과 노력을 쏟을 때 그렇게 되기 쉽습니다. 자녀가 아주 어리다 하더라도 자신의 결혼생활을 돌보기 위한 시간은 얼마든지 낼 수 있습니다. 정말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부부간에 특징적인 정서는 열정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결혼 후 몇 년이 지나면 다 사라져버리고, 동반자 관계니 정이니 하는 말로 대체되곤 합니다. 동반자 관계, 위안, 그리고 정은 결혼관계에 필수적인 요소들입니다. 그러나 열정과 성적 매력 역시 필수적입니다.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는 부부들의 대부분은 강력하고 지속적인 성적 유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문화에서 성생활에 대해 구체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은 그리 자연스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도 배워야할 일입니다. 우리 문화에서는 아이가 부부관계에 아주 중요한 변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에 대한 생각 때문에 얼마나 부부관계에 방해를 받는지 모릅니다. 어디에나 아이들이 있고 아무 때에도 둘만의 공간으로 갈 수 없다면 분명히 문제가 있습니다. 이 문제는 성적친밀감의 상실을 가져오고 욕구결핍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좋은 부모는 좋은 부부관계를 만들 수 있을 때 가능합니다. 좋은 부부관계보다 자녀와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고 여기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부모가 자신의 심리적 갈등과 욕구를 자녀를 통해 대리 만족하는 것이며, 자녀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이런 원칙들이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는 않더라도, 자신도 모르게 자녀를 망치고 있는 부모들에게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줄 것입니다. 우리가 막연히 생각해왔던 부모의 역할이나 도리에 대해 한번쯤 질문을 던져 보십시오.
- 좋은 부모? 나쁜 부모! 6
6. 부모가 원하는 대로 자녀의 인생을 만들려고 한다. 농경사회와 달리 산업화 시대와 정보화 시대에 들어서면서 직업 선택의 기회가 다양해졌습니다. 이런 선택의 기회는 부모와 자녀 모두에게 불안과 고민거리를 안겨주었습니다. 자녀가 좋은 직업을 선택하도록 돕는 것은 20세기 산업화 시대의 모든 가족들이 직면했던 문제였는데, 정보화 사회라는 21세기에 들어 더욱 심각해졌습니다. 보통 부모라면 자녀에게 조금이라도 편한 길을 선택하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이들을 소유한 것이 아니다.’라는 학자의 말을 다시 음미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 자녀가 절망적이고 실패한 삶을 살지 않게 하려면 우리의 구식 관념을 자녀들에게 주입해서는 안 됩니다. 선택의 기회를 잘 잡는다면, 몇 세기 만에 처음으로 가족 중에서 미술가나 음악가, 또는 운동선수가 태어난 것을 기쁜 마음으로 축하할 수도 있습니다. 자녀를 위한 선택을 잘 도와주려면 부모가 예전보다 훨씬 더 성숙해야 합니다. 자녀와 정서적으로 더 깊은 관계를 가져야 하며,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강한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만약 자녀의 예술적 재능을 찾아주고 이끌어주려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바로 자녀와의 대화입니다. 호의적이고 점잖게 걱정해주고 방향을 제시해주어야 합니다. 부모와 자녀 간에 인격적인 의사소통이 일어나려면 서로 신뢰해야 합니다. 그런데 일상생활에서 부모가 정직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는 사례를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부모가 별 생각 없이 하는 “아빠한테 전화 오면 없다고 그래!”와 같은 말이 자녀들에게 거짓말을 가르치게 됩니다. 청소년들이 일상생활에서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 부모의 모습에서 정직이 아닌 거짓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부모-자식 간의 신뢰감 상실이라는 심각한 사태를 초래합니다. 부모의 가치관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으면 부모를 존경하기 어렵습니다. 가치관에 부합하는 삶을 영위하는 가정에서 자란 자녀들은 성인이 되어 명료한 가치관과 고유의 정체성을 갖는 반면, 그렇지 못한 가정에서 자란 자녀들은 확고한 가치관을 갖지 못함으로써 정신적으로 혼란스러워 하게 됩니다. 심지어 “우리 부모님은 엉터리다.”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자녀의 인생은 자녀의 것입니다. 따라서 자녀가 원하고 선택하였다면 그 선택을 존중해주십시오. 많은 부모들이 염려와 욕심 때문에, 그리고 옆집 아줌마가 하기 때문에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모의 욕심에서 또는 염려에서 자녀가 잘못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녀의 인생을 부모가 대신 살아주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자녀를 한 사람의 성인이 되지 못하게 합니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자녀들 또한 빠르게 변화해 갑니다. 이것은 발달학적인 관점에서 잘 적응하는 것이고 바람직한 태도입니다. 부모가 자녀들의 울타리 역할을 해주고 싶고, 그들의 고민과 생각을 공유하고 싶다면 지금까지 가졌던 믿음과 가치 중에서 버릴 것은 과감히 버리고 취할 것은 일관성 있게 유지하는 것이 현명한 행동일 것입니다. 오늘날 현명한 부모가 되려면 이전보다 더 많은 융통성이 필요합니다. 잘 짜인 구조와 적절한 지침이 바탕이 될 때에 성공을 할 수 있습니다. 자녀들은 자신의 바른 내적 구조를 가져야 성숙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많은 지침은 오히려 자녀들을 성숙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도전은 좋은 것이며, 우리를 살아있게 합니다. 자녀들이 자라는 만큼 부모도 자라야 합니다.
- 좋은 부모? 나쁜 부모! 5
5. 부모의 감정을 억제하며, 자녀 위주로 생활한다. 부모라면 누구나 한번쯤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말에 공감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자식을 키우는 일이란 힘든 일입니다. 자녀양육은 부모의 인생을 수련하는 과정이며, 진정한 사랑을 배우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낳은 죄 때문에’ 또는 ‘부모니까’라는 조건부의 관계로 부모 노릇을 한다면, 부모와 자녀 모두에게 좋지 않습니다. 좋은 부모는 부모로서의 역할이 무엇이든지간에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부모님들의 세대가 했던 희생은 정말 고귀한 사랑의 표현이었지만, 자신의 생활이나 삶이 무시되는 불행한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부모의 역할과 자녀와의 관계가 아무리 중요하더라도 자신의 삶을 먼저 찾고자 하는 현대의 부모들은 이런 삶을 선택하지 않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영성이라는 단어는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됩니다. (1) 인간을 초월한 존재, 즉 신이나 우주의 법칙과 관계를 가지는 능력. (2) 우주의 모든 것들과 자신이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는 것. (3) 우주에 대한 말 못할 두려움과 위압감, 그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인가를 깨닫는 순간 우리는 영성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상생활을 통해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가치를 느끼는 것입니다. 설거지를 하든,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하든, 심장수술을 집도하든, 빈민가에서 병들고 죽어가는 자를 돌봐주든, 무엇이든 간에 우리는 일상적인 일에서 영성을 느끼며, 우리의 영혼을 그 영성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이렇게 영성으로 충만한 영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맡은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녀의 영성을 키우는 방법을 잘 알고 있지만, 실천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자신부터 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겸손함과 타인에 대한 신뢰를 증진하고, 자신의 내면을 성숙시키기 위해 시간을 쓰고, 고생의 가치를 인식하는 것을 배우며, 고독과 자기도취, 이기주의, 친밀감에 대한 두려움 또는 해결되지 않은 분노 등을 직면하려면 대단한 용기와 노력이 필요하고 위험도 뒤따릅니다. 삶의 괴로움에 직면하면서도 희망을 가지려면 우리는 성장하고 또 성장해야 합니다. 이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예나 요즘이나 부모들은 미성숙한 부분이 많아서 마치 아이가 아이를 키우는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어느 누구도 완전하게 성숙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과연 누가 아이들을 잘 키울 수 있을 만큼 성숙한 사람인가?’라는 질문보다는 ‘어떻게 하면 내가 더 성숙해질 수 있으며, 언제부터 노력해야 할까?’라고 질문을 해보아야 합니다. 한 가지 희망은, 부모가 성숙해지기에 너무 늦은 때는 결코 없으며, 부모가 성숙해지려고 노력하면 아이들에게 항상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결코’ ‘항상’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무리인 것은 알고 있지만, 우리는 나이나 주변 환경에 관계없이 긍정적인 결과가 일어나는 것을 수없이 많이 보아 왔기에 감히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영성은 모든 인간이 가지고 태어난 능력, 즉 성장하고 자식을 낳아 기르며 의사소통을 하고 생각하며 느끼는 능력 등을 말하기도 합니다. 부모는 자녀들이 자신의 감정을 느끼고 영혼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자녀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부모의 모습입니다. 자녀를 위해 부모가 희생한다는 감정을 느끼게 하는 것은 또 다른 심리적 족쇄를 자녀에게 채우는 것입니다.
- 좋은 부모? 나쁜 부모! 4
4. 자녀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주려고 한다. 한 임상자료에 따르면 소아정신과를 찾는 청소년들이 해마다 30-40%씩 늘고 있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도 참을성이 부족하다고 진단받은 아이들의 비율이 점점 높아진다고 합니다. ‘참을성 결핍증’이라고 명명되는 이 문제는 부모가 자녀의 요구를 다 들어주는 양육 방법과 관련이 있습니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종종 이런 소리를 합니다. “그렇게 잘해 주었는데 뭐가 부족해서…” 이 말에는 부모의 애정과 기대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차라리 그런 애정과 기대가 없었다면 어땠을까요? 핵가족화로 줄어든 자녀수로 인해 과잉보호에 익숙해진 아이, 친구와 공원에서 놀기보다 전자오락에 나오는 괴물과 싸우면서 시간을 보내는 아이들, 끊임없이 바뀌는 입시제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유치원 때부터 준비하는 아이들, 이런 아이들에게 인생의 지표를 만들어주는 가정교육을 확립하는 일은 전적으로 부모에게 달려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 부모들이 열심히 하는 가정교육은 기본적인 중요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자녀와 친구가 되라.’ 이것은 소위 자녀교육 전문가나 가족문제 전문가들이 상투적으로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상투적인 표현이 담고 있는 숨은 뜻을 파악해야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바로 부모가 자녀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며, 그 관계를 어떻게 유지해야 하는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모와 자녀는 친구가 될 수 없기 때문에 가능한 한 서로 의사소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라.”는 뜻입니다. ‘자녀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라.’ 이 말은 부모와 자녀 간의 경계를 허물고 서로 통하는 사이가 되라는 뜻일 것입니다. 물론 부모와 자녀 간의 원활한 의사소통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부모와 자녀 사이의 경계가 사라져가는 것은 매우 위험스러운 일입니다. 부모와 자녀가 건강하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려면 부모와 자녀 사이에 융통성 있는 경계가 있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이 경계가 무너지기 시작하면 정서적 혼란이라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어떤 집단체계에서든 일관되고 신뢰할 만한 구조가 존재하지 않으면 그 집단 내의 인간관계는 진정한 관계로 발전하지 못합니다. 진정한 관계란 힘들고 어려울 때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 신뢰가 형성된 관계를 말합니다. 이것은 상대방에 대한 믿음과 책임감을 수반하며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는 관계입니다. 이는 부모·자녀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가 아이에게 ‘좋은 부모’로서의 행동만 하려고 한다면 정서적 혼란을 야기합니다. 부모와 자녀간의 경계에 대한 또 다른 극단적인 예는 부모와 자녀 사이의 따뜻한 정이나 가족 구성원이라는 연대감이 거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분리된 경우입니다. 너무 엄격하고 완고하고 융통성 없고 권위적인 부모 밑에서 자라는 경우가 이에 해당됩니다. 이런 가정에서 자란 자녀들은 매우 거리감 있고 형식적이며 정서적 친밀감은 거의 없기가 쉽습니다. 부모가 자기의 신세타령을 친구에게 하듯 자녀에게 털어놓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누군가에게 깊은 사랑을 받거나 준 경험이 없어서 생긴 상실의 고통을 아이에게서 보상을 받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는 명료하되 융통성이 있는 경계가 필요합니다. 부모는 자녀의 친구가 아닙니다. 자녀에게 어른과 아이 사이에는 지켜야할 적절한 예의와 행동방식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어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