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 한 해를 돌아보고 새해를 계획하십시오.
산에서 열심히 나무를 베고 있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보면 모르오? 이 나무를 베려고 톱질을 하고 있는 중이오.” 하고 그가 대답했습니다. “매우 지쳐 보이는군요. 얼마나 오랫동안 나무를 베었습니까?” 큰 소리로 물었습니다. “다섯 시간 이상 이 일을 했소. 나는 지쳤소. 무척 힘든 일이오.” 그의 대답입니다. “그러면 잠시 시간을 내서 톱날을 가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게 훨씬 빠를 겁니다.” “내겐 톱날을 갈 만한 시간이 없어요.” 그가 단호하게 대답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톱질하는 데 너무 바쁘기 때문이지요.” 재충전을 하기 위해서는 톱날을 가는 시간을 할애해야 합니다. 이것을 자기쇄신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쇄신을 해야 할 영역은 네 가지가 있습니다. 신체적인 건강, 영적, 정신적, 사회적/감정적 차원입니다. 신체적인 건강-신체적인 차원은 우리 몸을 효과적으로 돌보는 활동-영양가 있는 음식의 섭취, 충분한 휴식, 긴장이완, 그리고 규칙적인 운동을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운동할 시간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루에 30분 또는 이틀에 30분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 운동이 일주일에 주는 이익을 생각하면 결코 많은 시간이 아닙니다. 속보, 달리기, 자전거 타기, 수영, 조깅 등을 통해 심장혈관에 도움을 주어 지구력을 키울 수 있습니다. 스트레칭을 통해 신축성을 키우십시오. 체조, 팔굽혀펴기, 윗몸일으키기, 역기나 아령 들기 등 근육운동을 통해 힘을 키우십시오. 영적인 성숙-영적으로 성숙하면 자기 자신의 인생에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영성은 우리가 가진 가치체계의 핵심이고 중심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영감을 주고, 우리 자신을 향상시키는 원천입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서 매일 신앙생활을 통해서 쇄신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을 함으로써 우리는 재충전되며 강하게 되고, 중심이 잡히며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영적 재충전과 쇄신은 시간투자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시간이 없다고 해서 무시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활동입니다. 정신적 성장-우리는 지금까지 정신개발과 학습에 관계되는 대부분의 훈련을 학교에서 하는 정규교육을 통해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학교교육이 끝나면 우리들 대부분은 지식의 감퇴현상을 경험합니다. 진지한 독서를 하지 않고, 종사하고 있는 분야 밖의 새로운 것에 관해 깊이 있는 탐구를 하지 않으며, 나아가 분석적인 사고도 하지 않고, 글도 잘 쓰지 않습니다. 대신에 TV나 보면서 시간을 보냅니다. 여러 가지 정보를 얻고 마음을 확장시키기 위해 규칙적으로 좋은 책을 읽는 습관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독서하지 않는 사람은 문맹보다 나을 바가 없다.”는 말을 기억하십시오. 사회적/감정적 성장-삶의 사회적 차원과 감정적 차원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감정적 삶은 주로 사회에서의 대인관계를 통해서 개발되고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일상적인 대인관계를 통해서 이것을 개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연습을 필요로 합니다. 노력이 없으면 자신의 목표를 이루지도 못하고, 대인관계에서 자연스럽게 실천할 수 있는 기술도 갖추지 못합니다. 이것은 지적인 수준이 아니라 감정 문제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의 개인적 안정감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내면적 안정은 우리의 삶이 올바른 원칙 및 가치관과 일치할 때, 즉 언행일치의 삶을 살 때에 비로소 이루어집니다.(‘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좋은 습관’의 제 4부를 요약하였습니다.)
- 빈 방 없습니다
저희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의 일로 기억이 됩니다. 성탄절을 앞두고 저희가 다니던 교회의 소극장에서 “빈 방 없습니다.”라는 연극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감동적이었는지 몇 차례를 더 보았고, 올해도 할 수만 있으면 다시 보고 싶은 연극입니다. 이미 잘 알고 있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오늘은 이 연극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해 드립니다. 미국 어느 작은 마을에 윌리라고 불리는 9세 된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나이로는 4학년이지만 지적 능력이 다소 떨어져 2학년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해 성탄절이 가까워 오자 교회에서 연극을 준비하게 되었는데, 선생님은 윌리에게 대사가 많지 않은 여관집 주인 역할을 맡겼습니다. 성탄절이 되어 교회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습니다. 연극이 진행되던 중 드디어 요셉과 마리아가 여관으로 다가와 여관집 문을 두드렸습니다. 주인이 나와 여관에 방이 없으니 다른 곳을 찾아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는 더욱 간절히 간청하였습니다. “우리는 너무 멀리 왔습니다. 아내는 출산할 날이 찼고 쉬어야할 곳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여관집 주인으로 분장한 윌리는 말도 없이 마리아를 오래 쳐다보았습니다. 무대 뒤에서 대사를 읽어주던 선생님은 윌리가 대사를 잊은 줄 알고 자꾸 읽어주었습니다. 한동안 말없이 서있던 윌리는 선생님이 무대 뒤에서 반복해서 힘을 주어 일러주던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그대로 대답을 하였습니다. “빈 방 없습니다.” 그 말을 듣고 요셉과 마리아는 힘이 빠진 채 뒤로 돌아 걸어갔습니다. 그때였습니다. 각본에 따르면 윌리는 방안으로 들어가야 했지만, 윌리는 문간에 서서 걱정스러운 듯이 눈물을 흘리며 마리아와 요셉이 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습니다. “요셉! 가지 말아요. 마리아를 데리고 돌아와요.” 물론 각본에는 없는 대사였습니다. “내 안방을 써요. 내 방에서 쉬란 말이에요.” 연극은 그것으로 엉망이 되고 말았지만, 이 장면을 지켜본 수많은 관중은 가장 뜻 깊은 성탄 연극을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교회 소극장에서 본 이 연극의 그 다음 이야기가 더 감동적이었습니다. 한국에서 윌리 역을 맡은 아이는 ‘덕구’라는 아이였습니다. 그 앞의 내용은 모두 같습니다. 마지막에 덕구 때문에 연극이 우습게 되자 관중석은 웃음바다가 되고 연극을 망친 아이들은 덕구를 마구 손가락질을 하며 자리를 떠납니다. 연극을 지도하던 선생님은 맥이 빠져버립니다. 연습을 할 때 짧은 대사인 “빈 방 없습니다.”도 제대로 못해서 그렇게도 빼버리자는 아이들의 원성이 선생님의 귀에 다시 들리는 듯합니다. 그런데 덕구는 하늘을 쳐다보며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자기의 마음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 저 때문에 연극을 망쳐버렸어요. 친구들이 연습을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어떻게 하지요? 그렇지만 어떻게 방이 없다고 요셉과 마리아를 돌려보내요? 예수님이 곧 태어나셔야 하는데 어떻게 방이 없다고 할 수 있어요?” 그리고 덕구는 예수님께 자기의 마음을 고백합니다. “예수님, 사랑해요.” 이 장면에서 저는 매번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니 흐느끼며 울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덕구의 순수한 마음이 정말 좋습니다. 상혼에 물들어버린 성탄절. 즐거움을 추구하는 젊은이들의 연말공휴일이 되어버린 성탄절. 예수님보다 산타클로스가 더 드러나는 성탄절이 속상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에게 빈 방이 없다고 차마 말할 수 없었던 덕구가 다시 생각납니다.
- “자각 증상”이 없는 지체를 잘 챙깁시다
우리 몸의 요긴한 지체들은 자각 증상이 매우 늦게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그 지체가 없으면 활동에는 불편함이 있어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지체들은 자각 증상이 매우 빨리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새끼손가락 손톱 밑에 가시 하나가 박히면 그 아픔 때문에 우리는 거의 다른 일을 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가시 하나를 빼기 위하여 온갖 정성을 기울입니다. “그까짓 가시 하나 박힌 걸 가지고.” 하며 무시하고 싶어도 그 고통 때문에 견디기가 힘들고, 가시를 조금만 건드려도 온몸이 짜릿할 정도로 통증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 몸에 없어서는 안 될 지체들이 있습니다. 위, 폐, 간 등이 그렇습니다. 이와 같이 몸에 꼭 필요한 지체들은 웬만해서는 자각 증상이 거의 나타나지 아니합니다. 정밀검사를 통해서 초기에 발견되는 경우는 있지만, 자각 증상으로 그것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제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몸에 꼭 필요한 지체들은 몸의 생존을 위하여 끝까지 자기의 역할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지체들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고, 더 이상 기능을 발휘하기 힘들 때에 비로소 자기가 힘들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 때는 대개 “말기”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지체에 이상이 생기게 되어도 우리가 즉시 그것을 알아채기 어렵습니다. 불행하게도 많은 경우 그것을 발견하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한 지체들의 정상적인 기능을 100이라고 한다면, 그 기능이 대략 15% 이하로 저하되어야 비로소 자각 증상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초기에 발견되면 좋은데 안타깝게도 대부분은 그렇지 못합니다. 이러한 지체들은 조금씩 나빠지고 있는데도 별다른 증상을 느끼지 못해 방치하고 있다가 건강검진을 통해 발견되거나 뒤늦게 “말기에” 자각 증상이 나타난 후에야 발견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공동체 안에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몸에 있는 지체는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발, 손, 눈, 코, 하나님께서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신 만큼 모든 지체가 하나같이 중요합니다. 또 몸에서 약해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몸에서도 그 지체가 병이 들면 온몸이 위험해지는 지체가 있는 것처럼, 공동체 안에도 그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안타까운 현상은, 몸에 있는 지체나 공동체 안에 있는 지체나 생명에 지장을 줄 수 있는 요긴한 지체는 자각 증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처음에는 자각 증상이 없다가 마지막에 뒤늦게 자각 증상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생명에 요긴한 지체들은 자각 증상이 여간해서 나타나지 아니합니다. 그러므로 평소에 잘 살펴주고 이상이 없는지 가끔 살펴보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가정이든, 직장이든, 교회이든 공동체 안에서도 그 공동체의 존립에 중요한 사람들은 여간해서는 힘들다는 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묵묵히 맡은 자리에서 충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웬만한 어려움이나 고통은 스스로 해결을 해나갑니다. 그러나 그 스트레스가 한계 이상이 되면 서서히 마음이 병들어갑니다. 그래도 여간해서 자각 증상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자각 증상이 없다고 해서 정상인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생명에 요긴한 몸의 지체들이 스스로 회복 기능이 있듯이, 공동체 안에서도 중요한 사람들은 스스로 회복 기능이 있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한계를 넘어가게 되면 회복이 힘들어집니다. 몸을 위해서는 정기적인 건강진단이 필요하듯, 공동체 안에서도 그러한 사람들을 잘 챙겨야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자각 증상이 일어났을 때는 이미 공동체를 떠나기로 작정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자각 증상’이 없는 지체를 잘 챙겨야 합니다.
- 중요한 여섯 마디의 말
한때 많은 사람들이 읽었던 책 가운데 영어로는 여섯 단어에서 한 단어로 된 말까지 여섯 마디가 소개되어 있는 것인데, 우리말로 모두 두 단어로 바꾸어 정리해 드립니다. 1. “제가 잘못했습니다.”(I admit I made a mistake.) “제가 실수했습니다.” “내 탓이오.” 등이 같은 의미입니다. 어릴 때에는 이 말을 하면 매를 맞거나 꾸지람을 들을까봐 잘 못합니다. 학교에서는 벌을 서거나 궂은일을 하게 될까봐 못하기도 합니다. 어른이 되어서 이 말을 하게 되면 법적인 책임을 져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이가 더 많아지면 자존심 때문에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자신의 잘못을 겸손하게 시인하는 사람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2. “정말 잘하셨습니다.”(You did a good job.) 우리나라 사람들은 칭찬에 인색한 편입니다. 누군가 일을 잘 하면 기껏 한다는 이야기가, “네가 웬일이냐?”입니다. 말투에 따라서 오해를 사기 쉬운 말을 할 때도 있습니다. “내일은 서쪽에서 해가 뜨겠다.”와 같은 말입니다. 심한 경우에는 “소가 뒷걸음질하다가 쥐 밟았구나.” 하고 빈정거리는 투의 말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진정한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고,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칭찬은 사람을 세워줍니다. 3. “어떻게 생각하십니까?”(What is your opinion?)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물어보는 것입니다. 다 아는 일이라 할지라도 애나 어른이나 누구에게든지 의견을 한번 물어보십시오. 명령조의 말이나 상대를 무시하거나 깔보는 말을 하는 사람과는 가능하면 대화하기가 꺼려집니다. 그러나 겸손하게 상대를 존중하며 의견을 묻는 사람에게는 마음이 열리게 마련입니다. 이름을 기억하며 겸손하게, 때로는 체면을 세워주는 말은 상대의 힘을 북돋아줄 수 있습니다. 4. “좀 해주시겠습니까?”(If you please.) 많은 사람들이 ‘높은 사람은 명령을 하는 사람, 낮은 사람은 지시를 받아야 하는 사람’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에 젖어있는 사람들은, 누구에게 부탁을 하는 것을 마치 리더십이 약한 것으로 오해를 할 수도 있습니다. 명령을 하면 일을 빨리 시작할 수는 있지만 마음은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작은 좀 늦더라도, 사람들의 마음까지 얻어서 하는 것이 결국은 더 빨리, 좋은 결과를 얻는 지름길입니다. 5. “참 감사합니다.”(Thank you.)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곱다.”는 말이 있습니다. “말 한 마디로 천량 빚을 갚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매일 숨을 쉬고 사는 일도 하나님께 감사할 일이요, 밥 한 그릇을 먹는 것도 여름내 수고한 농부에게 감사할 일입니다. 모두들 자기 돈 주고 사먹는 것 같아도 그렇지 않습니다.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일수록 감사의 표현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6. “나”보다는 “우리”(We) 정보통신 사회가 되면서 이 사회는 더욱 자기중심적인 모습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선거전을 하는 뉴스만 보아도 온통 상대를 무시하며 비판하는 말투에 남을 깔보는 태도가 난무합니다. 정보통신(情報通信) 사회에서는 정(情)이 오가고(보:報), 믿음(신:信)이 통(通)하는 사이가 되도록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나”만큼이나 “우리”를 중요시하는 사회를 만들어나갈 수 있습니다.
- “내 사람으로 키우면 안 된다.”(?)
영혼 구원하여 제자 삼는 사역을 하거나 목회를 하다보면 자주 듣는 말이 있습니다. “사역을 통해서 주님의 사람을 만들어야지, 자기 사람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사역현장에서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바울 편이다.” 하고, 또 다른 사람은 “나는 아볼로 편이다.” 하였습니다. 이렇게 편을 가르는 모습을, 사도 바울은 육에 속한 사람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신앙 연수가 아무리 길고, 성경을 많이 알고, 은사를 많이 받았더라도, 이렇게 편을 가르는 사람은 영적으로 어리고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아마 부교역자가 교인들 중에 자기 사람들을 만들어서 데리고 나가 교회를 따로 차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마음 아픈 일을 겪은 담임목사님들은 “내 사람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주님의 사람을 만들어야지.”라는 말에 금방 동의하실 것입니다. 회사에서도 중견간부가 자기 사람들을 만들어서 그들을 데리고 퇴사해서 자기 회사를 차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이와는 매우 대조적인 표현을 한 곳들이 있습니다. “나의 자녀 여러분, 나는 여러분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다시 해산의 고통을 겪습니다.”(갈 4:19)와 같은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믿는 사람들을 마치 자신의 자녀인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빌립보서 4:9에서는 “그리고 여러분은 나에게서 배운 것과 받은 것과 듣고 본 것들을 실천하십시오, 그리하면 평화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마치 사도 바울이 자기의 사람들을 만들려는 의도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모순처럼 보이는 사도 바울의 두 가지 모습을 이렇게 이해하면 좋습니다. 부모가 어린아이를 키울 때에는 내 자식으로 키웁니다. 마치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안 될 것처럼, 어린아이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가지고, 심지어 부모의 모든 것을 심어주려고 합니다. 사리분별이 안 되어 매우 의존적인 어린아이들에게는 그렇게 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나 어린아이가 성장해감에 따라 점차 부모로부터 독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고, 결혼을 하게 되면 부모를 떠나 그들의 가정을 이끌어가게 됩니다. 영혼 구원하여 제자 삼는 사역이 이와 같습니다. 예수님을 갓 믿고 영적으로 어린 사람은 ‘내 사람’이 되어야 제대로 가르칠 수 있습니다. “나에게서 배운 것과 받은 것과 듣고 본 것들을 실천”하려면 ‘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다가 영적으로 성장하여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감에 따라 점점 독립을 하게 되고, 나중에는 ‘내 사람’을 벗어나 ‘나의 동역자’로서 함께 ‘주님의 일꾼’이 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어릴 때에는 ‘내 사람’이 되지 아니하면 제대로 가르칠 수가 없고, 예수님의 제자로 성장시키기가 어렵습니다. 한편 영적으로 성숙했는데도 여전히 ‘내 사람’으로 붙들고 있으면, 권위주의에 빠지게 되거나 자신의 왕국을 이루게 됩니다. 영적으로 어릴 때에는 ‘내 사람’이었다가, 영적으로 성숙해감에 따라 ‘주님의 일꾼’으로서 함께 ‘동역자’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이 단계에서 우리는 자주 서로 오해를 하거나 혼란을 겪습니다. 인간적으로 서운한 것이지요. 마치 장가를 간 아들이 자기 아내와 아이들만 챙기고 부모를 잊은 듯한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시집을 간 딸이 자기 남편과 아이들만 챙기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결혼한 아들이나 딸에게 부모님이 전처럼 잔정을 주지 않는 것 같은 서운함을 느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으로 어릴 때에는 ‘내 사람’으로 키우십시오. 그리고 영적으로 성장해감에 따라 함께 주님의 일꾼 된 동역자 의식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 교회는 공동체입니다
지난 주간에는 두 가지 모임을 가졌습니다. 하나는 강원도 동해에서 모인, 가정교회를 하는 목회자들의 초원모임이었고, 다른 하나는 일본 목회자 40여 명을 대상으로 하는 컨퍼런스였습니다. 동해에서 가진 초원모임에는 최영기 목사님을 모시고 가야 했기 때문에 주일 예배를 마치고 차를 운전하여 대저동으로 갔다가 동해로 향했습니다. 대저제일교회에서 최목사님이 부흥회를 인도하셨기 때문입니다. 대저동에서 동해까지 가는 길만 해도 4시간은 족히 걸리더군요. 중간에 영덕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저녁 아홉 시가 넘어서야 도착을 했습니다. 저녁 늦은 시간이어서 첫날은 인사만 나누고 다음날 오전 함께 모여 여러 이야기들을 나누고 점심식사를 한 후 촛대바위가 있는 해변을 산책하고 헤어졌습니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대면을 하여 만난 목사님들과는 공동체성을 많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아는 사이”가 된 느낌이 들었습니다. 또 하나의 모임이었던 일본 목회자를 대상으로 하는 컨퍼런스에서는 제가 주강사로 섬기게 되어 ZOOM으로 설교를 하고 조남수 목사님께서 통역을 하셨습니다. 온라인으로 설교와 강의를 할 수 있으니 얼마나 편리한지 모릅니다. 비행기를 탈 필요도 없고, 장소를 따로 빌릴 필요도 없어서 비용 면에서나 시간 면에서나 유익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3일 동안 오전은 제가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크게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내용을 전달하는 면에서는 별 문제가 없었지만, 짧은 시간이라도 직접 대면하여 만난 초원모임에서 느낀 공동체성은 느끼기가 어려웠습니다. 최근에 “코로나 시대, 하나님께서 온라인이라는 대포를 쏘신 겁니다!”라고 말씀하신 분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마을을 보호하기 위하여 성을 쌓았는데, 대포가 발명되고 난 후에 성의 의미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칼과 창을 가지고 쳐들어올 때는 성벽이 유용했지만, 대포가 성벽을 넘어서 공격을 하게 되면서 성벽의 의미가 없어졌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결국 성은 관광명소나 유적지가 되어 버렸다는 결론입니다. 그리고 코로나 19로 인하여 온라인(비대면) 예배를 드리면서 교회라는 건물의 의미가 줄어들었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실제로 개신교인 설문 응답자의 1/3이, 코로나 19이전처럼 현장 예배 대면 예배가 재개되더라도 온라인 예배를 계속하겠다는 통계결과까지 증거로 내놓았습니다. 결론은 예배당(교회)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었지만, 그분이 우려하신 것처럼 교회의 공동체성이 가볍게 여겨져서는 안 됩니다. 가까운 사람 사이에 전화통화를 했다고 충분하다면 만나지 않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전화통화를 하다가, “얘, 전화로 하니까 답답해서 안 되겠다. 우리 만나서 얘기하자.”며 전화를 끊습니다. 그리고는 날짜와 장소를 정하고 서로 만나서 손바닥을 마주치며 깔깔거려야 속이 풀리는 것을 경험합니다. 직접 대면을 하고 만나야 공동체성을 느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목장모임을 가지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주일예배를 통하여 감동을 하고 헌신을 하며 하나가 된 기분을 느끼더라도, 앞사람의 뒤통수만 보고 목사님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는 공동체를 이루기는 어렵습니다. 목장모임을 통해서 서로 삶을 나누는 가운데 기쁘고 감사한 일뿐 아니라, 어려움을 나누며 마음을 같이 하면서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번거롭기도 하고 섬기는 수고를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식사를 함께 하는 것도 바로 그 이유입니다. 다과만 나누면 편리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손님접대에 불과합니다. 식사를 같이 해야 가족이 되어갑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것처럼, 우리는 가족으로서 공동체(하나)가 되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 행복한제자교회를 이 자리에 세우신 이유
지난 주일 점심시간이었습니다. 늘 주방 앞자리에 앉아 식사를 하시던 조춘자 어머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컨디션이 좋지 않으신가보다.’ 잠시 생각을 하였습니다. 늘 자상하게 챙기는 교회 자매님들이 점심을 넉넉하게 챙겨서 어머님 댁을 방문하였습니다. 어머님은 늘 문을 열어놓고 사시기 때문에 방안으로 들어가는 일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어머님은 곱게 누워계셨답니다. 그런데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어 확인해 보고는 심각한 상태인 것을 감지했나봅니다. 마침 그날 방문을 했던 두 자매님은 모두 간호사 출신이었습니다. 교회로 부리나케 뛰어온 자매님들은 의사 두 분을 모시고 어머님 댁으로 갔습니다. 한 분은 심폐소생술을 하고, 다른 한 분은 맥박을 짚어보았는데 이미 소천하신 상태였습니다. 119로 연락을 하여, 소천하신 것이 확인이 되었습니다. 혼자 계시다 소천하신 상황이어서 국립과학연구소 사람들이 와서 여러 가지를 확인한 후에, 가족들이 장례식장에 연락을 하여 모시고 가서 빈소를 차리게 되었습니다. 동네에서 여러 분들이 저희를 보고 잘 부탁한다며 고맙다고 감사의 말씀을 전해주셨습니다. 저녁에 우리 교회 십여 명의 성도들이 장례식장을 찾아가서 유족들을 위로하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장례식장에 빈소를 차린 분들의 사진이 현관 광고판에 일곱 분 보였습니다. 그런데 어머님의 이름에만 “성도”라는 호칭이 붙어 있었습니다. 만일에 우리 교회가 이곳에 세워지지 않았더라면 어머님의 이름 옆에 성도라는 호칭이 붙어 있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머님은 교회 옆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습니다. 꼭 두 손을 모으고 합장을 하고 지나가셨습니다. 그 모습이 조금 우습기는 했지만, 어머님의 정성을 표시하는 마음이려니 하며 언젠가는 합장은 하지 마시라고 말씀을 한 번 드려야겠다 생각했었습니다. 어머님은 작년에 복음을 들으시고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한 후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이것만 해도 우리 교회가 이곳에 세워진 의미는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장례식장에 어머님 사진 곁에 있었던 다른 여섯 분의 사진 옆에는 “성도”라는 호칭이 없었던 것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교회 옆 공원에 놀러 나오시는 많은 어르신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세상을 떠날 때에 그분들의 사진 옆에도 “성도”라는 호칭이 붙을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자주 차도 타다 드리고, 더울 때에는 시원하게 교회 1층에 들어와 쉬시라고 해도, 추울 때에는 따뜻하게 들어와 따뜻한 차라로 한 잔 드시라 해도 아직은 받아들이지 않으십니다. 그래도 그분들은 마음속에 우리 교회에 대한 호감을 가지고 계신 것은 분명합니다. 조춘자 어머님의 변화된 모습을 보며, “저 양반 교회에 나가더니 신수가 훤해졌다.”고 말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거든요. 이번 일을 보면서 우리 교회에 감사한다는 말도 하고요. 조춘자 어머님이 간접적으로 복음의 길을 많이 닦아 놓으셨습니다. 평소에 저희 부부를 만나면 어머님이 곧잘 나누시던 인사말이 있었습니다. “서울 가지 마이소.”였습니다. 저희가 없으면 쓸쓸하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시더니 어머님이 저희 곁을 떠나셨습니다. 그렇다고 어머님에게 “어머니, 천국 가지 마이소.”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곁에 계시지 않아서 서운하기는 하지만, 불편한 몸으로 힘들게 재송동 언덕길을 오르는 일도 없고, 수시로 병원을 방문하여 진찰을 받고 약을 타오는 일도 없을, 하나님 나라에 가셨기 때문입니다. 유족들을 위로하는 예배에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을 꼭 동반자로 삼으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무거운 인생 짐을 내려 놓으라고. 그리고 돌아갈 집이 있어야 우리 인생 나그네길이 행복할 수 있다고.
- 믿는 구석이 있는 사람처럼
“국민들 희망 없이 산다.” 경제 불황과 정치 불안, 게다가 코로나 19 바이러스로 인해 많이 듣는 말입니다. 그런데 한 해도 이 말을 듣지 않고 산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는 대통령 선거철이나 국회의원 선거철이 되면 나붙는 플래카드가 있었습니다. “배고파 못 살겠다. 죽기 전에 살 길 찾자.”라는 구호였습니다. 우리나라보다 어려운 나라가 많은데,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는 유난히도 희망이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항상 위를 쳐다보고 사는 민족이라 여간해서 만족하지 못하는 민족성 때문일까요? 어느 사업가가 했던 말이 있습니다. “긍정적으로 사업해도 힘든데 부정적 사고로 경쟁이 되나요?” 우리 민족은 한국전쟁을 혹독하게 겪어온 민족입니다. IMF외환위기 당시에도 많은 사람이 우리나라가 끝날 것처럼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코로나 19로 인해 경제적, 정서적, 육체적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저는 로마서 8:28을 제 나름대로 적용하여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을 자들에게는 코로나 위기도 기회로 만들어 주시느니라.” 요즈음 인터넷을 들어가면 유명한 목사님들의 설교를 쉽게 보며 들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주5일 근무제가 되어서 주말에 사람들이 교회에 오지 않고 놀러 다니는 사람이 많다고 걱정을 하는 목사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어느 목사님이 마음에 남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무리 좋은 TV 중계가 있어도 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람은 중계 보는 것으로 만족 못한다. 현장을 가서 봐야 하듯이, 아무리 인터넷에서 좋은 설교가 나와도 제대로 예배를 드리고 싶은 사람은 교회를 올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목사가 열심히 준비해서 좋은 설교를 들으며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전적으로 공감이 가는 말씀이었습니다. 경기 내용만 훌륭하면 관중은 운동장으로 모이게 마련이라는 것과 같은 이야기이지요.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좋은 습관’의 첫 번째 습관도 바로 그것을 이야기합니다. 영어로는 ‘Proactive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Reactive’의 반대가 되는 말로서 환경에 반응적으로 대하지 말고 주도적으로 대하라는 말입니다. 감옥생활을 한탄하지 아니하고 로마의 시위대 안에 복음을 전했던 바울이 그 좋은 예입니다.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가서도 형들을 원망하지 아니하고 맡은 일에 충성되어 가정총무를 맡기까지 한 요셉이 또한 좋은 예입니다. 그는 보디발 아내의 모함을 받아 감옥에 들어갔을 때에도 복수의 칼을 갈지 않았습니다. 그곳에서도 충성되어 죄수의 몸으로 감옥의 열쇠를 맡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Proactive’한 삶입니다. 많은 사람이 어렵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죽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상황이 어려울수록 우리는 그리스도를 증거하기가 쉽습니다. 같이 어렵다고 하지 않으면 됩니다. 같이 죽겠다고 하지 않으면 됩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보며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는 사람이다’라고 여길 것입니다. 그 ‘믿는 구석’이 바로 하나님이신 것을 보여주면 됩니다. 우리는 믿는 구석이 있는 사람입니다. 믿는 구석이 있는 사람은 너그럽고 여유가 있습니다. 여유가 있으면 다니엘처럼 명철과 슬기로 일을 처리할 수 있습니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을 주실”(저녁에는 눈물을 흘려도, 아침이면 기쁨이 넘친다.) 하나님을 소망하며, ‘믿는 구석이 있는 사람’처럼 사십시다.
- 건강관리도 영적인 일입니다
1. 긍정적으로 생각하십시오. 세상을 살다보면 즐거운 일만 아니라, 어려운 일도 있기 마련입니다. 내가 잘못해서 어려운 일을 당하면, “생각하십시오.” 다른 사람이 잘못해서 어려운 일을 당하면, “용서하십시오.” 누구도 잘못한 것이 없는데 어려운 일을 당하면, “인내하십시오.” 2. 욕심을 자제하십시오. 우리가 어릴 때부터 듣던 말에는 욕심 가득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제는 말을 바꾸어야 합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를 “서울을 못 가도 모로 가서는 안 된다.”로.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써라.”를 “정승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써라.”로. 3. 가능한 대로 베푸십시오. “벌어서 남 주느냐?”를 “남 주려면 벌어야 한다.”로. “공부해서 남 주느냐?”를 “남 주려면 공부해야 한다.”로. 베푸는 삶을 살면 뇌에서 건강에 도움이 되는 호르몬이 생성된답니다. “돈, 돈, 돈” 하면 돌기 쉽고, 돈독이 올라서 건강하기 어렵습니다. 4. 많이 웃으십시오. 웃음에 대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신 분이 있습니다. 월요일에는 원래부터 웃고, 화요일은 화사하게 웃고, 수요일은 수수하게 웃고, 목요일은 목숨 걸고 웃고, 금요일에는 금방 웃고 또 웃고, 토요일은 토실토실하게 웃고, 일요일은 일어나자 말자 웃으라고 했습니다. 5. 좋은 대인관계를 유지하십시오. 각 사람이 독특한 인격체로 만들어진 것을 이해하고 서로 존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일을 잘 이끌어가는 주도적인 사람, 분위기를 늘 화기애애하게 만드는 사교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앞에 나서지 아니하고 뒤에서 섬기기를 좋아하는 안정형의 사람, 생각이 정리되어야 움직이는 신중형이 있습니다. 6. 담배와 술을 금하십시오. 담배는 백해무익하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수명을 조금씩 단축하는 것도 살인 중의 하나입니다. 뿐만 아니라, 간접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담배 연기를 마시도록 하는 것도 다른 사람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7. 목욕은 자주, 잠은 깊이 주무십시오. ‘누워도 잠이 안 온다.’는 말씀을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대개 운동이 부족하신 경우가 많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많이 걸으시고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하시면 잠을 깊이 주무실 수 있습니다. 식사 전후의 목욕이나 지치도록 뜨거운 곳에 오래 계시는 것은 삼가십시오. 8. 가능한 즐겁게 잘 드십시오. 주위에 연세가 많으시면서 건강한 분들이 계십니다. 그분들의 건강 비결은 무엇이든 맛있게 잘 드신다는 것입니다. 보약을 따로 드신 적이 없으시답니다. ‘밥이 보약이란 말’ 그대로지요. ‘음식은 골고루, 고기는 적게, 채소는 많이’를 기억해 두세요. 9. 정직 하십시오. 사람은 나이를 먹을수록 눈치가 빨라지고 체면치레가 늘어납니다. 자연히 악의는 아니라 할지라도 거짓말로 둘러대는 경우가 많아집니다. 그렇게 하면 서로의 신뢰가 무너지고, 무어라 거짓말을 했는지 기억을 해야 하기 때문에 머리가 복잡해집니다. 10. 건강 체크를 하십시오. 자동차에 연료가 떨어졌는데, 갈 길이 바쁘다고 연료를 넣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무뎌진 연장 날을 갈지 않으면 힘이 더 듭니다. 건강이 무뎌지기 전에 건강을 체크하면 건강을 지키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건강 체크에 돈을 들이는 것은 오히려 돈을 절약하는 길입니다.
- 검소한 것일까, 궁상을 떠는 것일까?
따로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저희 집안의 문화가 된 것들이 여럿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는 검소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검소하게 산다고 하면, 조금 초라하고 밝지 않게 사는 것으로 오해하시는 분들이 간혹 있습니다. 검소한 삶이란 그저 경제적으로 낮게 단순한 삶을 사는 것(simple life)이라기보다는, 자신이 살 수 있는 수준보다 조금 낮게(simpler lifestyle) 살면서 다른 선한 일에 힘쓰는 삶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음의 예가 그것을 말해줍니다. 평소에 검소하게 살고 있는 자매 한 사람이 한쪽 구두 앞부분에 구멍이 나있는 구두를 신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구멍이 나있는 구두를 신고 있는 사람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이라면, 그것이 드러났을 때 그 사람이 마음에 상처를 받기 쉽습니다. 그러나 검소하게 살기 때문에 구멍이 난 구두를 신고 있는 사람은 그것이 드러나도 여간해서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 구두 앞부분에 구멍이 났네. 이야, 어떻게 구두를 구멍이 나도록 신느냐?” 하고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역시 자매는 별로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아무도 본 사람이 없는데, 역시 목사님이 보셨네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신발이 너무 가벼워서 신고 있어요. 비 오는 날은 못 신어요. 물이 들어오거든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대답을 듣고는 제 장난기가 발동을 하였습니다. “내가 때워줄 테니까 나중에 구두를 가지고 오라.”고 말이지요. 약 두 주 후에 자매가 구두를 비닐 봉투에 넣어가지고 와서 제 방에 놓아두었습니다. “목사님, 신발 드디어 가져왔습니다! ooo 드림”이라는 메모가 봉투 안에 같이 들어있었습니다. 마침 제 벨트 가죽과 그 구두 가죽의 종류가 비슷했습니다. 제 벨트의 길이도 마침 여유가 있어서 두 조각을 떼어내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양쪽 구두에 덧댄 가죽이 대칭이 되도록 똑같이 자른 후에 본드로 튼튼하게 붙이는 작업을 하면서 혼자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만일 누군가 구두를 때우는 이 모습을 보고 “목사님, 궁상 좀 그만 떠세요.” 한다면 무어라 대답을 할까?’ 저는 분명히 이렇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이건 궁상을 떠는 것이 아니라 검소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저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궁상을 떠는 것과 검소한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궁상을 떠는 것과 검소한 것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왜냐하면 우리가 검소한 생활은 추구해야 하지만, 궁상을 떠는 것은 삼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생각 저 생각, 이런 기준 저런 기준을 생각하다가 결국은 쉽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웃으면서 할 수 있으면 검소한 생활’이요, ‘찌푸리고 하면 궁상을 떠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자녀들에게 자전거는 꼭 중고를 사주라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만, 저는 우리 아이들이 성장하는 동안에 자전거를 점점 더 큰 것으로 사줄 때마다, 늘 중고 자전거를 사주었습니다. 새 것을 사줘봐야 한두 달만 지나면 중고와 다를 바가 없고, 두 해만 지나면 다리가 길어져서 곧 바꾸어줘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대신에 성인용 자전거(26인치)를 살 때는 새 것으로 좋은 것을 사주겠다고 약속을 하고 그대로 했었습니다. 중고를 살 때 아이들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돈이 없어서 중고를 산다.’든지 하는 말은 하지 않고, 오히려 새 자전거를 살 만한 충분한 돈이 지갑에 있는 것을 일부러 보여주면서, 검소한 삶에 대한 철학 때문에 중고 자전거를 산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고운 샌드페이퍼와 스프레이 페인트와 아이들이 붙이고 싶은 스티커를 사도록 했습니다. 집에 오면 녹슨 부분을 닦고 페인팅을 한 후에 아이들이 붙이고 싶은 곳에 스티커를 붙이도록 했습니다. 그리하면 아이들이 자랑스럽게 자전거를 타고 나갔습니다. 만일 제가 궁상을 떨면서 중고 자전거를 사주었으면 아이들은 타고 나가기를 꺼려했을 것입니다. 궁상은 떨지 말고, 검소한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