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 원하는 것을 사지 말고, 필요한 것을 사라.
제가 다운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동안에 우리 집이 교회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성도들과 같이 지내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우리 집에는 성도들이 자주 드나들었습니다. 우리 집에서 식사를 같이하기도 하고 지나가다가 차를 마시러 들어오기도 하고. 어떤 토의사항이 있어서 모이는 것만 아니라 같이 뭉그적거릴 수 있는 관계가 진짜 공동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당회도 매주 토요일에 새벽기도를 마치면 콩나물국밥을 먹고 이 얘기 저 얘기를 나누곤 했습니다. 제가 은퇴한 후에는, 우리 집에 성도들이 자주 드나드는 것이 새로운 담임목사님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서 교회로부터 한 정거장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큰아들이 우리와 같은 아파트 단지로 이사를 왔고, 얼마 후에는 둘째 아들이 바로 우리 앞집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 며느리들이 이사를 왔다고 말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지금은 두세 주에 한 번 서울 집에 가게 됩니다. 그때에는 다섯 살부터 초등학교 6학년까지 손주 다섯 명이 할아버지 찬스를 쓰겠다며 우리 집으로 몰려옵니다. 여자들이 장을 같이 보는 동안에 손주 다섯은 저와 함께 다이소에 가는 것이 큰 즐거움 중의 하나입니다. 계산은 내가 해주기로 하면서 “5,000원 범위에서 마음대로 사라.”고 하면,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이들은 5,000원을 꼭 채워서 삽니다. 5,000원을 채우다 보니 필요 없는 물건을 사는 것을 보고, 제가 재미있는 제안을 했습니다. 5,000원어치를 사지 않고 남는 돈은 각 사람 이름으로 적립을 해주기로 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 후로는 어떻게 하든 적립을 경쟁적으로 많이 하는 분위기로 돌아섰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날도 아이들과 다이소를 갔는데, 아이들이 몰려있는 곳을 지나면서 아이들이 하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너, 그거 필요한 것 아니잖아. 원하는 것을 사지 말고, 필요한 것을 사.”하며, 큰 애가 동생에게 훈시하는 것이었습니다. 5,000원을 채우려는 아이들에게, 내가 가볍게 해준 말이었는데, 내가 생각해보아도 경제개념의 기본이 되는 말이었습니다. “원하는 것을 사지 말고, 필요한 것을 사라.” 사실 우리의 삶을 보면, 꼭 필요한 것이 아닌데 원해서 사는 것들이 제법 있습니다. 남들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냥 가지고 있고 싶어서,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때로는 선전에 넘어가 충동적으로 사놓고 사용하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사용하지 않는 물건이라고 중고 시장에 내놓고서 구입한 값보다 훨씬 싼 값에 팔고는 ‘돈을 벌었다.’라고 스스로 위로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무료로 주고는, ‘좋은 일을 했다.’라며 스스로 흐뭇해하기도 합니다. 사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혼 구원하여 제자 삼는 사역”에 꼭 필요한 것이 아닌데, 많은 교회에서 유행처럼 하는 사역을 따라 하느라고 바쁠 때가 있습니다. 다른 교회가 하는 것을 보고 공연히 나도 해보고 싶은 마음 때문에 일을 벌일 때가 있습니다. 역사가 오래된 어떤 교회는 교인 수에 비해서 공간이 충분한데 50주년 기념으로 건축을 새로 하는 교회를 본 적도 있습니다. 먹는 것도 그렇습니다. 필요한 만큼 먹으면 비만으로 걱정하지 않을 터인데, (식탐으로) 원하는 만큼 먹기 때문에 비만이 생기는 것입니다. 물론 필요한 만큼 먹어야 하는데, (먹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 원하는 대로 적게 먹어서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운동도 필요한 만큼 해야 하는데, (게을러서) 원하는 대로 운동하지 않아서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저는 연장으로 무엇을 만드는 것을 워낙 좋아하기 때문에 결심한 것이 있습니다. “필요한 연장이 아니면 사지 않는다.”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면 만들지 않는다. “원하는 것을 사지 말고, 필요한 것을 사라.” 아이들에게 가볍게 했던 말인데, 경제원칙의 기본이 되는 말이며, 심플 라이프의 기본정신이라는 것을 자주 실감하며 살고 있습니다.
- 우리에게는 삼생을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살 소망이 있습니다.
주위에서 어르신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마음 아픈 소식을 접할 때마다 늘 두 가지 마음이 생깁니다. 하나는 더 이상 고통이 없는 하늘나라로 잘 가셨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어르신들을 떠나보내는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특히 연로하셔서 기력이 없으시거나 오랫동안 질병으로 고생하신 경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95세가 넘으신 아버님을 모시고 있을 때 점점 노쇠해 가시는 모습을 볼 때마다, 저는 두 가지 마음을 가졌었습니다. 거동을 못 하시고 거의 온종일 누워계시며 죽을 받아 드시고, 나중에는 식사도 못 하시고 링거를 맞고 계셨습니다. 병원을 가서 치료하실 일은 아니고, 집에서 돌봐드리기에는 전문적인 실력이 필요한 일이기 때문에 마지막 몇 달 동안은 요양센터에 모시고 거의 매일 방문하였습니다. 떠나시기 며칠 전에는 아버님을 방문하여 빨대로 물을 드시도록 도와드렸는데 빨대를 빠는 일조차 힘들어하셨습니다. 부득이 주사기로 물을 입 안에 넣어드리면서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더 회복이 되지 않는다면 고통 없이 하나님 품에 안기시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요?”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버님이 우리 곁에 조금 더 계셨으면…’ 하는 것이 저의 마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갈등을 표현한 말씀이 생각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훨씬 더 나으나, 내가 육신으로 남아있는 것이 여러분의 발전과 믿음의 기쁨을 더하기 위하여 여러분 모두와 함께 머물러 있어야 할 것으로 압니다.”(빌립보서 1:23-24) 그는 이 두 사이에 끼어 있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즉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더 좋은데, 육신을 입고 살아가면 보람된 일을 할 수 있으니, 자신이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부모님을 떠나보내는 자녀들의 마음이 모두 이와 같을 것입니다. 아무리 연세가 많아도 부모님이 우리 곁을 떠나는 것은 마음 아픈 일입니다. 더 이상 곁에서 모습을 볼 수 없고 대화를 나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좀 더 잘해드리지 못한 아쉬움도 있겠지요. 때로는 평소에 바라시던 것이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떠나시는 것에 대해 안타까움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산 소망이 있으니 감사한 일입니다. 우리에게는 어머니의 태중에서 일생(一生)을, 이 세상에서 이생(二生)을 지낼 뿐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 삼생(三生)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이 ‘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집착하거나 이 세상에 대하여 허무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삼생을 소망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의 삶을, 삼생을 위하여 준비하는 삶으로 살 수 있습니다. 더구나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민족이요, 왕의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국민이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어둠에서 불러내어 그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 분의 업적을”(베드로전서 2:9) 온 세상 사람들에게 선포하기 위하여, 우리는 이 땅에 출장을 나온 것입니다. 물론 출장비는 출장을 보내신 하나님께서 모두 책임을 져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가 이 세상 사람들을 위한 영적 지도자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잘 살피고 하나님의 양떼를 잘 보살피는 행복한제자교회 공동체의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 가을학기 삶 공부 신청을 꼭 하시기 바랍니다.
가정교회에서 삶 공부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래에 인용하여 놓은 최영기 목사님의 글을 읽고, 가을학기 삶 공부 신청을 꼭 하시기 바랍니다. 가정교회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가정교회 원칙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 가정교회의 진정한 원칙은 3축과 4기둥 뿐입니다. 나머지 원칙은 이 두 가지에 기초한 관행입니다. 세 축과 네 기둥은 컴퓨터에 비유하자면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에 해당합니다. 이 두 가지를 중심으로 가정교회는 돌아갑니다. 인간은 세 가지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지정의(知情意)입니다. 알고, 느끼고, 원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는 하나님의 속성이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인간도 세 가지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진정한 회심이나 영적 성장은 이 세 가지가 균형을 이룰 때 온전하게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이 균형이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대학생 선교 단체는 대학교에 복음을 전하는 데에 큰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유는 지적인 면에 편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는데, 감성 시대인 21세기에 이런 방법으로 전도하는 것은 점점 힘들어질 것입니다. 부흥집회를 통해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 부흥회를 통해 예수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부흥집회는 감동을 주는 설교, 공감을 심어주는 간증을 통해 정적인 면에서 접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보 시대에 사는 현대인들은 정보가 결여된 이런 방법이 더 이상 효과적이지 못합니다. 복음을 들고 노동자들과 빈민들 틈에 뛰어 들어가 이들의 권익을 위하여 일하면서 복음을 전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의지적인 면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접근했을 때 도덕적인 크리스천을 만들어낼지는 모르지만, 하나님과 깊은 관계 속에 들어가는 크리스천을 만들어내기는 어렵습니다. 가정 교회는 지정의 세 가지를 골고루 만족시켜 주어 온전한 회심과 영적 성장을 가능케 해줍니다. 회심의 예를 들어봅시다. 목장 모임은 정적인 면을 만족시켜 줍니다. 감동을 주는 섬김에 의하여 교회에 대한 거부감과 예수 믿는 사람에 대한 반감이 사라지게 만들어 복음에 마음 문을 열게 만듭니다. 삶 공부는 지적인 면을 만족시켜 줍니다. 복음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 주어서 신앙의 근거를 마련해 줍니다. 주일 연합 예배는 의지적인 면을 만족시켜 줍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도록 하고 결단과 결심을 하게 만듭니다. 온전한 영적 성장도 지정의가 골고루 만족되어야 가능합니다. 가정교회는 지정의 이 세 가지를 골고루 만져줍니다. 지적인 면을 터치해 주는 삶 공부는 진정한 크리스천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정적인 면을 터치해 주는 목장 모임은 주님의 뜻대로 살려다가 받은 상처를 치유해 줍니다. 의지적인 면을 터치해 주는 연합 목장 예배는 새로운 힘을 얻어 바른 삶을 살도록 결심과 결단을 하게 만듭니다. 3축과 4기둥, 이 두 가지에 기초하여 자신의 사역을 검토하시기 바랍니다. 이 두 가지만 확실히 잡고 있으면 가정교회에 성공할 수밖에 없습니다.
- 믿지 않는 남편(모든 VIP)을 구원하려면(최영기 목사님의 목회서신에서)
대부분의 아내들은 오랜 기간에 걸쳐 설득도 하고 간청도 해 보았으나 남편이 꼼짝하지 않아서 지쳤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내가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 삶에 변화가 없으니까 남편들이 신앙생활에 관심을 안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변화가 있기는 하지만, 그 변화라는 것이 교회당에 자주 가는 것이라, 오히려 아내를 빼앗겼다는 상실감을 심어주고 교회에 대해 부정적으로 느끼게끔 만드는 것 같습니다. 남편이 예수를 믿게 만들려면 예수님이 좋은 분임을 느끼게 해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 언어가 바뀌어야 합니다. 남편이 예수 믿지 않는다고 투정하고, 교회 사역 못하게 한다고 불평하고, 교회 같이 가자고 강요하고… 남편 듣기에 부정적인 말만 하면 교회에 오거나 예수를 믿고 싶은 생각이 들겠습니까? 안 믿는 남편에게 전도하려면 예쁜 말을 해야 합니다. 예쁜 말 중에 하나가 칭찬입니다. 남성은 기를 살려 주어야 에너지가 생깁니다. 남성의 기를 살려주는 것이 고마움과 칭찬의 말입니다. 당신이 열심히 일해 주어서 우리 가정이 부족함 없이 잘 지낸다, 교회 사역을 해도 불평하지 않고 참아 주어 고맙다 등. 이러한 말이 아내를 남편에게 사랑스러운 존재로 만들고, 아내를 변화시키는 예수님에게 관심을 갖게 만듭니다. 남편을 감동하게 하는 최고의 단어가 ‘존경’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존경한다고 말할 때 아무리 무쇠 같은 남편이라도 녹지 않을 수 없고, 아내와 가정을 위하여 목숨까지 바칠 결심을 하게 됩니다. 남편에게 존경한다고 말하고 싶지만 아무리 찾아도 그런 점을 발견 못하는 아내들은, 좀 더 노력해야 합니다. 흉악한 범죄자들에게도 칭찬해 줄 만한 점은 한두 가지 있습니다. 남편에게 칭찬할만한 점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남편의 장점을 당연시해서 그렇든지, 장점보다 단점을 보는 습관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남편이 교회에 나오도록 하기 위해서는 교회와 목사를 자랑해야 합니다. 믿지 않는 남편 앞에서 교회와 목사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으면, 남편이 교회에 나오고 싶겠습니까? 남편이건 VIP이건, 구원받아야 할 사람들 앞에서는 교회와 목사에 관해 불평을 늘어놓거나 비난하는 것은 이들이 교회에 나오지 못하도록 방어벽을 쌓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담임목사가 자랑할 만한 점을 하나도 갖고 있지 못하면 어쩌나?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런 목사가 담임하는 교회에 있으면 안 됩니다. 그 교회를 떠나야 합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장단점이 있는 법인데, 목사에게서 칭찬할만한 덕목을 하나도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은, 본인에게 문제가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열심히 노력하여 목사의 장점을 발견하고 자랑하면 전도가 될 뿐 아니라 담임목사가 점점 좋아집니다. 목사에 대한 칭찬은 목사를 변화시킵니다. 제가 오늘날과 같은 목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휴스턴서울교회 교인들의 칭찬 때문입니다. 저의 많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단점은 눈감아 주고 장점만 보아주었습니다. 이웃 사람들에게 제 자랑을 했습니다. 그러니 저로서는 교인들을 실망시켜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서, 바른 목사가 되고자 더 노력하게 되었고, 안 믿는 사람들이 저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 교회에도 나오게 되고, 그러다 보니 안 믿던 남편이 믿게 되고, 매 주일 평균 2~3명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침례 받는 열매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 추석연휴 가족목장에서 나눌 말씀(자료)
추석 연휴에 가족목장을 가지는 동안에 같이 나눌 말씀 하나를 소개합니다. * 요한복음 14:6을 함께 읽고, 다음 글을 같이 읽으십시오.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을 들라면 보통 네 명을 듭니다. 소크라테스, 공자, 부처, 예수입니다. 이분들의 가르침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이며, 공자의 경우 “인의예지신”이고, 예수는 “죄를 대속한 것”이며, 부처는 “팔정도”를 그 핵심이라고 말합니다. 소크라테스가 말한 대로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자신의 주제를 알라는 말이지, 말 그대로 구원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공자의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란, 인은 측은(惻隱)지심으로 불쌍한 것을 가엾게 여겨 정을 나누는 마음입니다. 의는 수오(羞惡)지심으로 불의를 부끄러워하고 악한 것을 미워하는 마음입니다. 예는 사양(辭讓)지심으로 겸손해하며 남을 위해 사양하고 배려하는 마음입니다. 지는 시비(是非)지심으로 옳고 그름을 가릴 줄 아는 마음입니다. 신은 광명(光明)지심으로 중심을 잡고 가운데 바르게 서 밝은 빛을 냄으로 믿음을 주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모두가 사람이 바르게 살아야 할 도덕을 가르치는 것이지 구원을 말하는 대목은 하나도 없습니다. 한 마디로 신앙이 아니라 도덕입니다. 우리가 다른 종교에 대해 무작정 반박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일입니다. 다른 종교를 그저 무시하지 말고, 다른 종교는 단지 도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지혜롭게 말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불교의 핵심이라고 하는 팔정도(八正道) 역시 그렇습니다. 정견(正見): 바르게 보기, 정사(유)(正思(惟)): 바르게 생각하기, 정어(正語): 바르게 말하기, 정업(正業): 바르게 행동하기, 정명(正命): 바르게 살기, 정근(正勤) 또는 정정진(正精進): 바르게 노력하기, 정념(正念): 바르게 관찰하기, 정정(正定): 바르게 삼매(집중)하기. 모두가 도덕입니다. 성경의 잠언에 다 나오는 내용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무엇을 보아도 구원을 말하는 내용은 없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을 보면, 어느 누구도 사람들의 죄 값을 치르기 위해서 대신 죽었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대로 한 번 죽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죄를 자기의 몸에 몸소 지시고서, 우리를 대신하여 나무에 달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이보다 더 큰 증거는 없습니다. 또한 어느 누구도 죽은 자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났다는 사람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고, 지금은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해 주십니다. 모든 것을 탕진한 후에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집으로 돌아온 아들을 아버지는 무조건 뛰어나가 맞이해 주었습니다. 탕진한 재산을 다시 벌기 전에는 집안에 들어오지 말라는 아버지도 간혹 있을 수 있습니다. 다른 종교는 그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생각에서 나온 교리일 뿐입니다. 모두 이 세상을 바르게 살라는 도덕적인 가르침을 주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도덕적으로 죄가 전혀 없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또한 착한 일을 많이 하거나 도를 많이 닦거나 고행한다고 해서 자신의 죄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을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을 무조건 받아준 아버지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주셨습니다. 예수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은 없습니다. * 예수님을 구주와 주인으로 모신 가정되게 하신 것을 감사하고, 주기도문으로 마칩니다.
- 10월 15일부터 삶 공부에 꼭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는 일 년에 봄 학기와 가을 학기 두 차례 삶 공부반이 개설됩니다. 10월 15일부터, 이경준 목사-생명의 삶, 조흥래 목사-새로운 삶, 배경한 장로-경건의 삶, 이준홍 목자-말씀의 삶, 이마리아 사모-생명언어의 삶 등 다섯 반이 시작됩니다. 생명의 삶을 아직 공부하지 않은 분들은 생명의 삶을, 다른 분들은 넷 중의 하나에 참여하시면 됩니다. 다음 글은 최영기 목사님의 글을 인용, 간추려 정리하였습니다. 삶 공부는 가정교회 원칙인 3축과 4기둥 중의 중요한 한 부분입니다. 삶 공부 신청은 10월 8일까지 받고, 삶 공부하는 요일은 각 삶 공부반을 신청한 분들이 상의하여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생명의 삶은 제가 가사원장으로서 해야 할 일이 평일에 많으므로 부득이 주일 오후 2~3시에 교회에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 가정교회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가정교회 원칙을 붙들어야합니다. 그런데 ‘가정교회 원칙’이 무엇인지를 알기 어렵다는 분들이 있습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원칙에 기초한 관행도 편리상 ‘원칙’이라고 혼용해서 불러왔기 때문입니다. 사실 가정교회의 진정한 원칙은 3축과 4기둥뿐입니다. 나머지 원칙은 이 두 가지에 기초한 관행입니다. 세 축과 네 기둥은 컴퓨터에 비유하자면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에 해당합니다. 이 두 가지를 중심으로 가정교회는 돌아갑니다. 가정 교회 3축을 다시 한번 설명 드리고자 합니다. 인간은 세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정의(知情意)입니다. 알고, 느끼고, 원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는 하나님의 속성이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인간도 세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진정한 회심이나 영적 성장은 이 세 가지가 균형을 이룰 때 온전하게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이 균형이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가정 교회는 지정의 세 가지를 골고루 만족시켜 주어 온전한 회심과 영적 성장을 가능케 해줍니다. 목장 모임은 정적인 면을 만족시켜 줍니다. 감동을 주는 섬김에 의하여 교회에 대한 거부감과 예수 믿는 사람에 대한 반감이 사라지게 만들어 복음에 마음 문을 열게 만듭니다. 삶 공부는 지적인 면을 만족시켜 줍니다. 복음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 주어서 신앙의 근거를 마련해 줍니다. 주일 연합 예배는 의지적인 면을 만족시켜 줍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도록 하고 결단과 결심을 하게 만듭니다. 온전한 영적 성장도 지정의가 골고루 만족되어야 가능합니다. 가정교회는 지정의 이 세 가지를 골고루 만져줍니다. 지적인 면을 터치해 주는 삶 공부는 진정한 크리스천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정적인 면을 터치해 주는 목장 모임은 주님의 뜻대로 살려다가 받은 상처를 치유해 줍니다. 의지적인 면을 터치해 주는 연합 목장 예배는 새로운 힘을 얻어 바른 삶을 살도록 결심과 결단을 하게 만듭니다.
- “처음 사랑을 회복하자.”(?)
교회 수련회를 하는 장소에 수련회 주제로 이 표어를 플래카드로 걸어놓은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또는 한 해를 시작하면서 교회 앞에 이 표어를 걸어놓은 모습을 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열심이 식어져가는 교회에 다시 열정을 회복하고 싶은 마음이 잘 나타나있는 표어입니다. 그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우리 교회에는 이 표어를 결코 걸어야 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이 표어는 요한계시록 2장 4절에 근거한 것으로서, 일곱 교회에 보내는 말씀 중 에베소교회에 보내는 말씀입니다. 에베소교회는 칭찬을 받을 만한 교회였습니다. 실제로 요한계시록 2장 2-3절에 에베소교회를 칭찬하는 글이 있습니다. “나는 네가 한 일과 네 수고와 인내를 알고 있다. 또 나는, 네가 악한 자들을 참고 내버려둘 수 없던 것과, 사도가 아니면서 사도라고 자칭하는 자들을 시험하여 그들이 거짓말쟁이임을 밝혀 낸 것도, 알고 있다. 너는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견디어 내고, 낙심한 적이 없다.” 에베소교회는 이러한 칭찬을 받을 정도로 인내하였고 거짓 사도들을 분별해내는 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도 두드러진 은사를 가지고 있거나 애쓰고 수고하며 신앙을 잘 지키는 교회들이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자신들의 높은 수준 때문에 영적 우월감에 빠지기 쉬우며 다른 교인들을 무시하거나 얕잡아보는 실수를 범하기 쉬운 점입니다. 신앙을 잘 지키는 만큼, 인격적으로도 성숙하여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고 성령의 열매를 그 인격 속에 맺어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영적 교만에 빠질 우려가 있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거짓 영들을 잘 분별하는 사람들이 주의하지 아니하면 거짓 영들을 분별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비판하는 습성이 인격이 되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에베소교회의 교인들 중에 그러한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거짓 영들을 잘 분별하던 사람들이 다른 성도들까지 비판을 하게 되었습니다. 거짓 영들을 잘 분별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다른 성도들도 주님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다른 성도들을 비판하다보니 그들에 대한 사랑이 사라지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주님에 대한 사랑까지도 식어지게 된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4절에서 에베소교회를 꾸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따. 그것은 네가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처음(첫) 사랑을 회복하자.”는 표어를 걸어놓을 수 있지만, 사실 이 표어는 잘 생각해보면 가슴 아픈 표어입니다. 신앙햇수가 늘어갈수록 주님에 대한 사랑이 깊어가는 것이 바람직한 일입니다. “옛날에는 나도 뜨거웠었는데…” “나도 청년부 때는 회장 했었는데…” “나도 왕년에는 성가대였어.” 이런 말을 하면서 산다면, 이것은 자랑이 아니라 오히려 부끄러운 일입니다. 결혼생활을 생각해 보십시오. “신혼 때가 좋았는데…” 이 말이 신혼 때는 좋았다는 자랑이 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가장 바람직한 일은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갈수록 신혼이야.” “우리가 신혼 때도 지금과 같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공연히 싸움을 했지?”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처음 믿었을 때 지금과 같은 열정이 있었으면, 내가 뭐가 되어도 되었고 무얼 해도 하나는 했을 터인데.” 우리는 이런 믿음의 고백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부부생활이든 믿음생활이든, 우리는 겨우 처음 것을 회복하는 수준이 되어서는 아니 될 줄로 압니다. “처음 사랑을 회복하자!” 대신에, “지금과 같은 사랑이 그때에 있었더라면…”이라는 말을 하면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영적 지도자가 갖춰야 할 덕목들(3월 5일 설교 복습)
요즈음 나라의 지도자들로 인해 온 국민이 큰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을 갖추지 못한 것에서 비롯된 결과입니다. 지도자는 그가 속한 공동체 멤버들을 잘 되게 해야 하는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지도자의 직분을 맡고 싶어 하는 것은 훌륭한 일을 바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잘 되게 하려는 책임을 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영적 지도자는 다음의 네 영역에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있어야 합니다. 1. 개인생활 지도자는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남녀관계가 깨끗해야 하고,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의 감정을 다스릴 뿐만 아니라, 시간과 돈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지도력이 있는 사람은 도덕성에 문제가 있고, 도덕성에 문제가 없는 사람은 지도력이 없는 경우가 많아 참 안타깝습니다. 영적 지도자는 더욱 도덕성과 지도력을 고루 갖추어야 합니다. 술을 찾는 것 자체가 술을 즐기는 것입니다. 술이 들어가면 분별력이 떨어져서 도덕성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술은 성적인 문제와 돈 문제 등 윤리적인 문제가 생기게 하는 사탄의 도구입니다. 또한 돈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악의 뿌리임을 꼭 기억하십시오. 2. 가정생활 자기 가정을 잘 이끌어가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자기 가정을 잘 다스리고 언제나 위엄을 가지고 자녀들을 순종하게 하려면, 우선 좋은 본을 보여 신뢰받을 수 있는 가장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 성실하게 갖추어온 실력, 그리고 다른 사람의 의견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성품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중요한 두 가지를 맡겨주셨습니다. 시간과 돈입니다. 시간과 돈을 투명하고 지혜롭게 사용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존경과 신뢰를 받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아내가 먼저 남편을 사랑하고 존중할 때 자녀들도 부모를 사랑하고 존중하게 됩니다. 3. 교회생활 교회를 이끌어나가는 목사나 장로들처럼 영적 지도자가 될 사람은 공동체 안에서 충분한 검증을 거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개인생활과 가정생활이 내적인 생활이라면 교회생활과 사회생활은 외적인 생활입니다. 교회는 주님께서 가장이 되시는 더욱 확장된 가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정을 돌보는 가장의 역할을 온전히 할 수 있는 사람이 교회를 돌볼 영적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자기 가정을 다스릴 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더 큰 가정인 하나님의 교회를 돌볼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새로 입교한 사람이 아니라, 교회에서 충분한 기간 동안 그의 삶과 신앙이 확인된 사람이 영적 지도자의 역할을 맡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4. 사회생활 주님을 믿는 성도들은 세상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좋은 평판을 받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모두 부활하게 될 것을 염두에 두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항상 거리낄 것 없는 양심을 간직하려고 애쓰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더구나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주님을 드러내는 사람들입니다. 옳든 그르든 우리의 말과 행실을 듣고 보는 사람들에게 주님을 알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지도자들은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도 좋은 평판을 받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에게 비난받지도 않고 마귀의 꼬임에도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 세상이 우리를 부추기고 속삭입니다
세상이 부추깁니다. 친구와 동료, 옆집 아저씨와 윗집 아주머니를 통해서요. 다들 아이를 학원에 보내는데 우리 애만 안 가면 불안하니까 등록합니다… 세상은 속삭입니다. 텔레비전을 켜도 유튜브를 봐도 인스타그램을 열어도 내 귀에 대고 부드럽게 속삭입니다. ‘이거 사야지, 이래도 안 살래, 안 사고는 못 버틸 걸.’ 짝수 채널마다 자리 잡은 홈쇼핑의 쇼핑호스트들은 또 어찌나 달콤하게 유혹하는지요. ‘어머 이건 꼭 사야 해, 이거 나만 몰랐나 봐, 요즘 어느 집에나 하나씩 있다는데.’ 좋아하는 크리에이터가 진행하는 라이브 방송을 켰더니만 중간 광고를 하겠답니다. 팔로워가 수십 만인 인스타그램 인플루언서 언니가 쓰는 화장품을 사면 언니처럼 예뻐질 것만 같습니다. 그렇게 불안해서 남들만 따라가다 보면 물건은 쌓이고 나는 길을 잃습니다. 포장도 뜯지 않은 채로 나날이 먼지만 쌓여가는 신상품을 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정신을 차리고 중고 거래 앱을 켭니다. 인심을 쓰며 ‘나눔’이라는 작은 기부 활동도 해봅니다. 기분이 좋습니다. 하지만 나는 무엇을 한 걸까요. 아무리 좋은 값을 받아도 새상품을 살 때 지불한 가격에는 훨씬 못 미칩니다. 말끔히 정리하고 홀가분한 마음이 들지언정 처음부터 물건을 사지 않은 것만 못한 건 아닐까요. 불안을 잠재워야 합니다. 내 영혼을 잠식하지 않게, 내 카드를 긁지 않게. 그러려면 먼저 나는 남과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아무리 가까운 가족이라도 그들과는 다른, 나만의 인생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지구에 사는 79억 인구에게는 79억 갈래의 길이 있습니다. 가보지 않은 길이기에 미련이 남고, 두 갈래 길 앞에서 망설이더라도 한 발 한 발 나아가야 합니다. 20대는 가장 불안한 나이입니다. 잘 아는 작가는 그런 말을 했어요. 20대에는 날마다 넘어지는 것 같았는데 30대가 되니 좀 덜한 것 같다고요. 아침에 잘 차려입고 나갔는데 길에서 넘어지면 얼마나 속상해요. 손바닥도 까지고 무릎에 멍도 들고 옷도 찢어지고요. 어제 넘어졌는데, 오늘도 넘어지면 얼마나 힘이 빠집니까. 이런 일이 반복되면 내가 나를 믿지 못하게 되고 나를 믿지 못하니 기웃거리며 남을 보겠지요. 재능이 있고 노력하고 열정도 있는 후배들이 그러는 걸 보면 저도 속이 상했어요. “제가 붙을 수 있을까요? 제가 될 수 있을까요?” 묻는 후배에게 그렇게 답해줬어요. “나는 너를 믿는데, 너는 왜 너를 못 믿니? 누구보다 열심히 했잖아. 누구보다 해보고 싶잖아. 그럼 너를 믿고 한번 해봐.”-위의 글은 이금희의 <우리, 편하게 말해요>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 작가는 “너를 믿고 한번 해봐.”라고 말했는데,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더 크시고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불안이 우리를 잠식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을 오직 기도와 간구로 하고,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그리하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줄 것입니다.”(빌 4:6-7)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의 평화로 가득 채우시기 바랍니다.
- 사람을 살리는 방법 중의 한 가지
저와 가까이 지내던, 저보다 열댓 살 어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심하게 말을 더듬어서 분노하면 말보다 야구 방망이가 먼저 아들에게 향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는데, 큰아들이 중학교 2학년 학생이었고, 작은아들은 초등학교 6학년에 재학 중일 때의 일이었습니다. 저녁 9시 이후에는 게임을 하지 않아야 하는 집안 규칙이 있었는데, 어느 날 9시가 넘어서 퇴근했는데 큰아들이 게임을 하고 있었습니다. 화가 난 아버지는 말을 버걱거리며 진공관으로 된 모니터를 주먹으로 내리쳤습니다. 진공관으로 된 커다란 모니터를 보던 시절이니까 좀 오래 된 이야기입니다. 주먹으로 쳐서 그 모니터가 깨질 리가 없고, 주먹만 아플 수밖에. 그러니 화가 더 치밀어 오른 아버지는 컴퓨터에서 게임 CD를 꺼내어 가위로 잘라버렸습니다. 그때가 10월 말쯤으로 기억이 됩니다. 큰아들은 집안에서 가볍게 반바지에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다가, 아버지가 CD를 가위로 자른 것에 분개하여 집 밖으로 나가 버렸습니다. 10시 가까이 되도록 아들이 집에 들어오지 않으니 아버지가 걱정되어 아내와 둘째 아들을 데리고 저희 집으로 뛰어왔습니다. 저는 이런 상담을 할 때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자주 느끼곤 합니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도 않은 일인데, 저 스스로 생각을 해봐도 제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하며 상담했을까 의문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날도 그러했습니다. 제가 그 아버지에게 던진 첫 질문은 “아들이 집을 나간 것이 처음이냐?”였습니다. 그렇다는 대답을 듣고 제가 그다음 말한 내용은, “처음 나간 애는 갈 곳이 없어서 집에 꼭 들어와.”였습니다. 두 번 이상 나가는 아이들은 계획을 세우고 나가는 일이 많아질 터인데, 얼떨결에 처음 뛰쳐나간 애들은 갈 곳을 예비하지 않고 나갔기 때문에 보나 마나 돌아올 것이라는 생각이 순간 들었나 봅니다. 저도 어떤 생각에서 그렇게 이야기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렇게 말한 것은 분명히 기억이 납니다. 그다음에, 아이가 집에 들어오면 절대로 꾸중하거나 때리지 말고, 두 마디 말만 하라고 해주었습니다. 첫째는, “미안하다.”였습니다. 그랬더니 아버지가 화를 냈습니다. 자기가 무얼 잘못해서 미안하다고 말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9시가 넘도록 게임을 한 것, 집을 뛰쳐나간 것, 모두 아들이 잘못했지만, 그래도 게임 CD를 가위로 자른 것은 잘못하지 않았느냐며 설득을 하였습니다. 다른 것은 다 잊어버리고 게임 CD를 자른 것만 생각하고 사과하도록 권면하였습니다. 화를 가라앉힌 아버지는 그다음에 무엇을 하느냐고 질문을 해왔습니다. “들어가 자라,” 이 말 한마디만 더 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 여러 말로 항의하길래, 제가 물었습니다. “아이가 집에 들어오기를 원해? 집을 나가기를 원해? 아이가 집에 들어오기를 원하면 내가 하라는 대로 하라.”고 으름장을 놓기까지 했습니다. 아버지는 알았다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다음 날 오후에 제가 전화를 걸어서 확인하였습니다. 집을 나갔던 아이는 반바지에 반팔 티셔츠를 입고 놀이터 벤치에 앉아 얼마나 추위에 떨었을까요? 거실 전등이 꺼지기를 기다리는데, 거실 등이 꺼지지를 않아서 새벽 3시 반쯤에 집으로 돌아왔답니다. 얻어맞을 각오를 하고 고개를 떨어뜨리고 들어오는 아들을 향해서 아버지가 건넨 말은, “미안하다.” “들어가 자라.” 두 마디였습니다. 그 아들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도무지 아버지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아 그날 밤, 잠도 제대로 못 이루었을 것 같습니다. 학교에서 성적이 바닥을 치던 이 아들은 그 이후로 공부를 열심히 하여, 안산의 유명한 동산고등학교에 진학하였고, 후에 대학을 들어가서 군대 복무 중에 휴가를 나왔다며 그 아버지와 저에게 인사를 왔던 적이 있습니다. “미안하다.” “들어가 자라.” 이 두 마디가 많은 자녀를 살릴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