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안주의(장로교와 감리교)
(오늘 설교 중에 나온 칼뱅주의에 대한 이해를 도와드리기 위하여, 칼뱅주의와 이에 반론을 제기한 어려운 글 하나를 인터넷에서 옮겨 소개합니다.) 예정론은 흔히 ‘‘TULIP’으로 요약되는바 칼뱅 신학의 5대 강령에 뿌리박고 있습니다. 첫째로, ‘Total Corruption’, 즉 ‘전적인 타락’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 인간은 단지 악을 선택할 자유만 남았다는 것이지요. 여기에 대해서 웨슬리는 비록 인간이 타락하기는 했지만 모든 인간에게 우주적으로 주어져 있는 선재 은총 때문에 선악 간에 판단할 수 있는 양심과 자유의지가 회복되었음을 강조합니다. 둘째로, ‘Unlimited Election’, 즉 ‘무조건적인 선택’입니다. 인간의 구원과 멸망이 인간 편에서의 윤리적 결단이나 선택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의하여 무조건적으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결정론 혹은 숙명론에 대해서 웨슬리는 인간의 구원과 멸망이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 편에서의 신앙과 불신앙에 따라 좌우된다는 조건적 선택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믿지 않으면 멸망당한다고 보았던 것이지요. 셋째로, ‘Limited Atonement’, 즉 ‘제한적 속죄론’입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은 영생으로 미리 선택된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라는 가르침이지요. 다시 말해 그리스도는 구원으로 예정된 사람들만을 위해서 속죄의 고난과 죽으심을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웨슬리는 만인 속죄론 혹은 무제한적 속죄론을 강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온 인류를 죄와 죽음에서 구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으므로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속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넷째로, ‘‘Irresistible Grace’, 즉 ‘불가항력적 은총’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절대적으로 항거할 수 없으므로 그대로 받아야만 한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구원과 영생으로 예정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꼼짝없이 받아들여 무조건 구원받을 수밖에 없음을 강조하는데 주목적이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아르미니안주의자인 웨슬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불가항력적인 것이 아니라고 역설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은총은 자동인형이나 로봇이 아니라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에 의해 수용될 수도, 거부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Perseverance of Saints’, 선택받은 성도가 무조건적으로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보장, 즉 ‘견인적 은총’입니다. 하나님의 예정에 따라 한 번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은 모든 인간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영원토록 구원의 길에서 떨어지지 않고 반드시 구원을 받게 된다는 보장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웨슬리는 비록 구원받은 성도라고 할지라도 지속적인 은혜 생활을 하지 못할 경우 얼마든지 타락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웨슬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의 길에 들어섰다고 해서 이제 영적 엘리트가 되었음으로 하등의 성결 노력이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정적 신비주의 혹은 반 율법주의적 수동주의를 경계합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차이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칼뱅과 웨슬리에게 머리카락 한 올의 차이도 없는 것이 있으니 오직 믿음으로 의로워지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종교개혁의 대원리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칼뱅이나 웨슬리는 한 배를 탔던, 개혁주의의 아들들이었습니다.
- 믿지 않는 남편을 구원하려면 (최영기 목사님의 글 인용)
일반 교회에서는 남성을 포기한 것 같습니다. 목사님이 설교할 때에도 남성들의 투지를 불러일으키는 예화보다는 여성들의 감성을 터치해 주는 예화를 사용합니다. 사역을 맡길 때에도, 남성들을 전적으로 믿고 위임해 주어야 하는데, 지나친 관심을 표시해서 간섭당하는 것처럼 느끼게 만듭니다. 구역 모임도 남편들이 일하느라 참석할 수 없는 낮 시간에 갖습니다. 그러다 보니 일반 교회에서 남성들을 보기 힘들고 여성들이 교인들의 대다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믿지 않는 남편을 가진 아내들이 의외로 남편 구원에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 남편은 가망이 없어요.”라고 말하기도 하고, 남편이 교회에 나오게 되면 자신이 불편해질 것 같다고 속내를 털어 놓기도 합니다. 남편이 예수님 영접하지 않고 죽으면 영원한 멸망에 빠질 텐데, 천국과 지옥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때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아내들은, 오랜 기간에 걸쳐 설득도 하고 간청도 해 보았으나 남편이 꼼짝하지 않으니까 지쳐서 그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내가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 삶에 변화가 없으니까 남편들이 신앙생활에 관심을 안 갖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변화가 있기는 하지만, 그 변화라는 것이 교회당에 자주 가는 것이라, 오히려 아내를 빼앗겼다는 상실감을 심어주고 교회에 대해 부정적으로 느끼게끔 만드는 것 같습니다. 남편이 예수를 믿게 만들려면 예수님이 좋은 분임을 느끼게 해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 언어가 바뀌어야 합니다. 남편이 예수 믿지 않는다고 투정하고, 교회 사역 못하게 한다고 불평하고, 교회 같이 가자고 강요하고… 남편 듣기에 부정적인 말만 하면 교회에 오거나 예수를 믿고 싶은 생각이 들겠습니까? 안 믿는 남편에게 전도하려면 예쁜 말을 해야 합니다. 예쁜 말 중에 하나가 칭찬입니다. 남성은 기를 살려 주어야 에너지가 생깁니다. 남성의 기를 살려주는 것이 고마움과 칭찬의 말입니다. 당신이 열심히 일해 주어서 우리 가정이 부족함 없이 잘 지낸다, 교회 사역을 해도 불평하지 않고 참아 주어 고맙다 등. 이러한 말이 아내를 남편에게 사랑스러운 존재로 만들고, 아내를 변화시키는 예수님에게 관심을 갖게 만듭니다. 남편을 감동시키는 최고의 단어가 ‘존경’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존경한다고 말할 때 아무리 무쇠 같은 남편이라도 녹아지지 않을 수 없고, 아내와 가정을 위하여 목숨까지 바칠 결심을 하게 됩니다. 남편에게 존경한다고 말하고 싶지만 아무리 찾아도 그런 점을 발견 못하는 아내들은, 좀 더 노력해야 합니다. 흉악한 범죄자들에게도 칭찬해 줄만한 점은 한두 가지 있습니다. 남편에게 칭찬할만한 점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남편의 장점을 당연시해서 그렇든지, 장점보다 단점을 보는 습관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남편이 교회에 나오도록 하기 위해서는 교회와 목사를 자랑해야 합니다. 믿지 않는 남편 앞에서 교회와 목사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으면, 남편이 교회에 나오고 싶겠습니까? 남편이건 VIP이건, 구원 받아야 할 사람들 앞에서는 교회와 목사에 관해 불평을 늘어놓거나 비난하는 것은, 이들이 교회에 나오지 못하도록 방어벽을 쌓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목사에 대한 칭찬은 목사를 변화시킵니다. 제가 오늘날과 같은 목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휴스턴서울교회 교인들의 칭찬 때문입니다. 저의 많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단점은 눈감아 주고 장점만 보아 주었습니다. 이웃 사람들에게 제 자랑을 했습니다. 그러니 저로서는 교인들을 실망시켜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서, 바른 목사가 되고자 더 노력하게 되었고, 안 믿는 사람들이 저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 교회에도 나오게 되고, 그러다 보니 안 믿던 남편이 믿게 되고, 매 주일 평균 2-3명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침례 받는 열매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 낮은 데로 임하는 하나님의 사랑 (최영기 목사님 설교 요약)
하나님의 사랑은 낮은 데로 임하는 사랑이다. 약한 사람, 고통 받는 사람, 힘없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은 임한다. “가난한 자들의 소송을 외면하고, 불쌍한 나의 백성에게서 권리를 박탈하여, 과부들을 노략하고, 고아들을 약탈하였다.”(사 10:2)고 지적하셨는데, 그것이 주님의 징벌을 당하고 나라가 망할 이유가 될 정도의 죄인가? 세상에서는 그들이 낮아 보이지만, 하나님께는 그들이 그만큼 귀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듣지 못하는 사람을 저주해서는 안 된다. 눈이 먼 사람 앞에 걸려 넘어질 것을 놓아서는 안 된다. 너는 하나님 두려운 줄을 알아야 한다. 나는 주다.”(레 19:14) 하시는 하나님은 낮은 곳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이시다. 1. 도망가지 않게 된다. 우리는 모두 나름대로의 악습과 싸우고 있다. 그리고 악습에 졌을 때는 죄송함과 죄책감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때가 있다. 기도하기를 힘들어하고, 예배도 부담스러워진다. 이러한 것을 사탄이 가장 좋아한다. 이때에 마음 아파하고 낮아진 마음, 그곳에 하나님께서 임하신다. 그때에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나는 네 편인데, 너는 왜 나를 적으로 만드느냐?”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400m 경기에서 햄스트링에 부상을 입고 더 이상 달릴 수 없는 아들에게 달려와 결승선까지 함께 달려준 아버지가 있었다. 아버지는 우승한 아들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주한 아들이 자랑스러웠다고 고백했다. 하나님은 찢겨진 심령을 원하신다. 2. 기도에 자신감을 갖게 된다.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이루어질 것을 믿으면서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을 것이다.”(마 21:22)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믿습니다.”를 반복하는 것은 오히려 안 믿어져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 흥정하듯 기도하지 말아야 한다.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 종에게 아들을 하나 허락하여 주시면, 저는 그 아이의 한평생을 주님께 바치고, 삭도를 그의 머리털에 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삼상 1:11)라고 말한 한나는 흥정을 한 것이 아니다. 그는 괴로운 마음으로 흐느껴 울었다. 한나와 같이, 일방적으로 자비를 베푸셔서, 제때에 주시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도록 해야 한다. 3. 고난을 감사하게 된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면 낮아질 것이요, 자기를 낮추면 높아질 것이다.”(눅 14:11)라는 말씀대로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그곳에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마음이 높은 사람은 무언가 착각하는 사람이다. 겸손의 반대는 교만이 아니라 착각이다. 자기의 실체를 알아야 한다. 자기의 실체를 모르기 때문에 착각하게 된다. 자기의 실체를 보게 하시는 것이 바로 고난이다. 그러므로 고난 가운데 간증거리가 많은 것이다. 욥도 재산, 가족, 교만을 다 내려놓았을 때에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욥 42:5)라고 고백하였다. 인생은 삼생이다. 복은 이 세상에서만 받는 것이 아니다. 순교한 사람들이 그 좋은 예이다. 4. 약함을 자랑하게 된다. 많은 것을 갖춘 것이 꼭 좋은 것이 아니다. 바울은 몸에 있는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울에게 말씀하셨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고후 12:9)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바울에게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자신의 약점들을 자랑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나는 약함을 느낄 때마다 “하나님 뜻대로 해보겠습니다.” 했을 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약점을 강점으로 사용하신다. 온전히 헌신하고 쓰임을 받도록 우리의 약점을 내려놓으면, 하나님은 그것을 강점으로 사용하신다.
- 착한 목사? 나쁜 목사?
우리 교회 앞 주차장에는 동네 분들이 차를 주차시켜 놓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요즈음은 각 집에 차들이 한두 대는 보통 있는 편이어서 집 근처에 차를 주차시키는 일이 매우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실제로 주일에 우리 성도들도 교회 근처에 차를 주차시키지 못하고 멀리 세워 놓고 걸어오시는 분들이 매주일 여러 분이 계십니다. 보통 때는 교회 앞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아도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허용을 해드리는 편입니다. 그러나 새벽기도 시간이나 수요저녁예배 시간, 주일예배 시간에는 다른 차들이 주차를 시키지 못하도록 합니다. 우리 성도들의 차를 주차시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차시키는 일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면서, 우리 성도들이 차를 주차시켜야 할 시간에 동네 사람들이 교회 주차장에 주차를 시켜놓는다면, 그것을 허용하는 것이 착한 목사가 되는 길일까요? 동네 사람들에게는 착한 목사라는 평을 받을지 모르지만, 우리 성도들에게는 담임목사로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직무유기(?)가 될 것입니다. 오래 전의 일입니다. 다운교회에서 승합차를 마련하기 위해 중고차를 하나 구입하였습니다. 보통 새 차를 구입하면 구입한 날로부터 몇 년 이내, 또는 주행거리 몇 km까지는 무상으로 수리를 해주는 항목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차를 구입한 후에 무상으로 수리(A/S)를 받기 위해 자동차 정비소에서 점검을 하였는데, A/S를 해줄 수 있는 주행거리를 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계기판에 나온 주행거리와 실제 주행거리가 다른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차를 판 사람이 계기판 주행거리를 작게 나오도록 소위 미터기를 조작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선 ‘내용증명’을 차를 판 사람에게 보내도록 지시를 하였습니다. 내용증명이란 법률서식으로 법적인 절차를 밟기 전에 미리 알아야할 내용을 통보해 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내용으로 편지를 보내는 것이지요. “귀하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로 시작을 합니다. 그리고 일전에 판 자동차의 주행거리를 계기판에서 조작을 한 것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 때문에 자동차 판매대금을 실제 받을 수 있는 금액보다 많이 받았기 때문에 그 차액을 돌려주든지, 아니면 환불해주고 자동차를 되돌려 받으라는 통보를 합니다. 최악의 경우 마지막에는,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을 경우에는 형사고발을 하거나 법적인 단계를 밟을 것이므로, 신속한 조치 및 연락을 기다립니다.”라는 문구를 넣어 공신력 있는 문서를 만들어 상대방에게 발송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제가 법적으로 해결하겠다고 덤벼드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 불쌍한 사람에게는 당연히 긍휼을 베풀어야지요. 그러나 위의 경우와 같이 질이 좋지 않은 사람을 대할 때는 우선 ‘내용증명’과 같은 법적인 첫 단계를 밟아놓고 일을 진행해야 정당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제 생각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만일 그 때에 제가 돈을 제대로 받아내지 못하면, 미터기를 조작하는 악한 행동을 한 사람에게는 제가 착한 목사가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결국 교회에 손해를 입히는 나쁜 목사가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교회 재정에 손해를 입히면서 악한 사람에게 돈을 더 주고, 저는 착한 목사가 된다면, 그것은 착한 목사가 아니라 제 직무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지요. 그런 식의 착한 목사가 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과연 ‘착하다’는 말의 정의를 여러분들은 어떻게 내리고 계십니까? 미가서 6:8은 “무엇이 착한 일인지를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라고.
- 헤어 드라이어를 구두 속에, 냉동실에 넣었다가 다시!
지난 태풍에 교회 옥상을 올라가 보았더니 배수구가 막혀서 물이 고여 있었습니다. 급한 마음에 구두를 신은 채로 고인 물을 밟고 들어가서 배수구를 뚫고 나왔는데, 그만 구두 안으로 물이 스며들어와 양말이 젖어버렸습니다. 집에 들어와 양말을 벗고, 구두를 말리려고 헤어드라이어를 틀어서 구두 속에 넣었습니다. 구두 속에 있는 헤어드라이어가 거의 밀폐된 공간이니 열이 빠져나가지 못해 헤어드라이어가 지나치게 가열이 되어 그만 작동이 멈춰버렸습니다. 제 생각이 짧았던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헤어드라이어를 꺼내보니 손에 쥐지 못할 정도로 뜨거워졌습니다. 휴즈가 혹시 끊어졌는가 확인하기 위하여 뜯어보려다가, 바이메탈 작용으로 작동을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일단 드라이어를 냉동실에 넣어두었습니다. 조급한 마음에 잠시 후에 꺼내어 플러그를 끼어보니 여전히 작동되지 않았습니다. 헤어드라이어 본체가 아직 따뜻한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냉동실에 넣었습니다. 얼마 후에 본체가 차가워진 것을 확인하고, 꺼내어 다시 플러그를 끼어보니 이전과 같이 작동이 잘 되었습니다. 바이메탈이 원위치 된 것입니다. 그리 비싼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하마터면 망가졌다고 생각하고 별 생각 없이 버릴 뻔하였습니다. 물론 모든 전열기구가 냉동실에 넣는다고 고쳐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몸, 혼, 영이 이와 같습니다. 몸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상태가 되면 몸살을 앓게 됩니다. 그때는 쉬어주어야 합니다. 상처가 났을 때에는 하나님께서는 희한하게 상처가 아물고 피부가 다시 새로워지도록 새살을 주시기도 합니다. 무리해서 끊어지거나 상한 경우에는 치료하느라 돈이 많이 들거나 원상 복구가 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망가질 정도로 무리해서는 안 됩니다. 말(Horse)과 같은 우리의 몸이 건강해야, 말씀을 전하는 메신저(Messenger)인 우리가 마음 놓고 그 말을 타고 다닐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감정이 받아들일 한계가 지나치게 되면 감정적(정신적) 피로(Emotional Fatigue)현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스프링과 같은 용수철을 잡아당겼다가 놓으면 원위치하게 됩니다. 그러나 한계치 이상으로 힘을 가하면, 힘이 없어졌을 때에도 원위치하지 아니하고 어느 정도 늘어난 상태로 머물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의 혼(정신 또는 감정)도 그와 같습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당하면 ‘얼이 빠진다.’는 말이 바로 그 상태입니다. 심하면 정신이상 증세까지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사람들이 실수하는 것이 있습니다. 누구에게 기도를 받거나 기도원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을 오직 기도와 간구로”(빌 4:6-7) 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팔이 부러지면 기도와 아울러, 기도원을 가는 것이 아니라 병원을 찾아가야 하는 것처럼, 혼이 망가졌을 때에는 잘 쉬거나,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정신과 치료는 정신이상이 된 사람만 받는 치료가 아닙니다. 감기에 걸리면 감기약을 먹듯이 정신과 치료를 위해 정신과 약을 먹는 것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겪게 되고 자주 들었던 말 중에 공황장애라는 것이 바로 그 중의 하나입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빌 4:13)라는 믿음도 필요하지만, “내가 교만한 마음을 버렸습니다… 너무 큰 것을 가지려고 나서지 않으며, 분에 넘치는 놀라운 일을 이루려고도 하지 않습니다.”(시 131:1)의 겸손한 자세도 필요합니다. 영적으로도 바이메탈이 떨어지게 되면, 다시 바이메탈이 붙을 때까지 쉬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이여, 나는 그대의 영혼이 평안함과 같이, 그대에게 모든 일이 잘 되고, 그대가 건강하기를 빕니다.”(요삼 1:2)
- 가족목장 또는 가정목장
좋았더라.” 하신 세계를 우리에게 정복하고 다스리도록 하셨습니다. 내가 시간과 정성을 들여서 귀하게 만든 것은 아무나 함부로 만지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나 존경하는 사람에게는 만질 수 있도록 허락을 해줍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얼마나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귀하게 보셨는지, 하나님께서 “보기에 좋았더라.” 하시면 만드신 만물을 정복하고 다스리도록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가져야할 세계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을 보호해야 합니다.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망가진 자연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계 안에 거하는 사람들이 이루고 있는 사회를 회복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해야 할입니다. “영혼 구원하여 제자 삼는 일”과 아울러 사회를 회복하고 자연을 회복하는 일이야말로 교회의 존재목적입니다.
- 다시 복음 앞에 (어느 분의 글을 읽으며 감동이 되어 옮겨 적었습니다.)
어제 김용의 선교사님의 메시지는 정말 은혜롭고 도전이 되었습니다. 망한 술집 아들로, 중학교 중퇴로, 파괴된 인격으로, 제대로 인생을 배워본 적이 없었던 선교사님이 생전 처음 시골교회 주일 예배에 억지로 참석하였다가,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여 독생자를 보내셨고, 그가 우리를 사랑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그로 인하여 우리는 구원받았고,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가 되었다는 복음을 듣고 “홀랑 미쳤다.” 그리고 그 증세는 지금까지 가라앉지 않고,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답니다. 저에게는 너무나 익숙하여 아무런 감동도 안 되는 그 메시지가 선교사님의 가슴에는 조물주 되신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고백으로 들렸답니다. 부모로부터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말, “사랑한다.” 욕만 듣고 살았던 그는 사랑한다는 말을 하나님으로부터 처음 듣고, 주님께 ‘무소유’로 살면서 오직 복음을 위하여, 주 예수님을 위하여 살겠다고 헌신을 결심하였답니다. 결혼하여 주신 다섯 자녀, 이름도 ‘순종, 인내, 응답, 충성, 선교’라고 지었고, 모두 선교사로 내보냈답니다. 완전한 복음을 알았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 완성에 대한 비밀을 깨닫고 나니 대통령도 유엔 총장도 부럽지 않았답니다. 아들을 선교사로 훈련시키기 위하여, 아프리카 오지에 혼자 남겨두고 귀국하기 전날에, 갑자기 마음이 너무 힘들더랍니다. 아들은 너무나 험악한 환경인 아프리카에 두고 자기만 한국으로 도저히 걸음이 떨어지지 않을 것 같더랍니다. 그날 밤새 기도하고 또 기도하면서 아들에게 긴 편지를 쓰고, 그것을 손에 쥐어주고 왔답니다. 그 편지 끝에 그는 아들에게 이렇게 썼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우리 땅 끝에서 죽어 하늘 복판에서 만나자.” (늘 울어도 이 부분에서 울게 됩니다. 다들 울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을 아는 자의 심정입니다. 어마어마한 복음 하나면 충분한 것 아닌가?) 그런데 김용의 선교사님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소리쳤습니다. “이런 복음을 나만 아는 것입니까?” 모든 교회, 모든 교역자들, 모든 교인들이 다 아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어찌 이리 답답하고 안타깝습니까? ‘시험 들었다’ ‘답답하다’ ‘지쳤다’ ‘못 견디겠다’ ‘은혜가 안 된다’ 이것이 웬 말입니까? 늦게 부름 받은 제게 이런 충격이라면 먼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큰 충격일까 하고 생각했는데, 많은 교인들이 ‘예배드려주는’ 분위기입니다. 팔짱끼고 앉아서 ‘나 좀 감동시켜봐!’ 하는 태도입니다. 지금 한국 교회의 이 기가 막힌 현실을 어떻게 할 것입니까? 복음이 복음이 아닙니다. 온전히 무시당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것이 무엇이고, 복음의 능력이 무엇입니까? 다시 복음 앞에 돌아가야 합니다! ‘진정한 복음, 진정한 교회’ 우리는 거기에 서야 합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산다. 정신 차려야 할 것입니다. 이제는 변질된 복음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 매력적인 그리스도인이 되려면(최영기 목사님의 설교 요약)
한국 청소년 중에서 3%만이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말했다는 충격적인 설문 조사 결과를 얼마 전에 읽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의 약 30%가 기독교인이라는데(개신교, 천주교, 사이비 기독교인을 다 합친 통계) 3%의 청소년만이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말했다면 대부분의 청소년이 실제로는 예수를 믿고 있지 않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청소년들이 신앙을 저버리는 가장 큰 이유는 부모 신앙의 이중성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보이는 부모들의 모습과 가정에서 보이는 모습 사이의 괴리를 보면서 청소년들이 실망감에 빠져서 부모들의 신앙까지도 저버리게 됩니다. 그리스도인 삶의 이중성에 실망하는 것은 비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에 대해 잘 몰라도 사랑하라고 가르쳤다는 정도는 아는데, 막상 돈이나 이익이 걸리면 똑같이 이기심을 발휘하고, 권리 주장을 하니까, 예수 믿는 삶과 안 믿는 삶의 차이를 보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매력을 느낄 수 없고, 예수를 믿어야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이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5:13-16).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착한 행실을 보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의미하는 착한 행실이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일반적인 착한 행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정도를 뛰어 넘는 행실을 의미합니다. 세상 사람들도 착한 일을 합니다. 그러나 희생이 요구되거나 손해를 보게 되면, 거부합니다. 같은 상황에서 희생과 손해를 감수할 때 세상 사람들은 ‘크리스천은 다르구나!’ 느끼게 되고, 이런 삶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고, 기독교 신앙이 궁금해집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비신자 전도가 되기 위해서는 크리스천의 삶이 매력적으로 보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다르다는 것은, 밥 먹기 전에 기도를 한다든가, 회식 자리에서 술잔을 거절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행위가 크리스천으로서 용기 있는 행동이고, 칭찬할만한 일이기는 하지만, 비신자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비신자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삶의 키워드는 희생과 손해입니다. 그러므로 직장 생활을 하는 크리스천이 예배나 교회 사역 때문에 야근이나 주말 근무를 부득이 빠져야 한다면, 그 대신에 남들이 일하기 원치 않는 휴일이나 주말에 일할 것을 자원하여, 희생하고 손해 보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직장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인생을 악착같이 살아도 될까 말까한데, 희생과 손해를 감수한다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그런 삶의 결과가 자신뿐만 아니라 자녀와 가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면 더 두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천들이 이런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서 살면,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를 해결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마 6:33). 이러한 약속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희생과 손해를 선택한다 할지라도 절대 망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희생과 손해를 감수할 수 있습니다.
- 휴스턴서울교회 연수동기
이번 연수 기간 동안에 장모님께서 소천하시는 큰일이 있었는데, 여러분의 위로가 저희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물심양면으로 섬겨주신 여러분들의 사랑에 감사를 드립니다. 지난주의 목회서신과 순서가 바뀐 감이 있지만, 오늘은 연수를 하게 된 동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개척했던 다운교회가 2009년에 가정교회로 전환하기 전, 2008년 1차 연수 때는 세 축 네 기둥으로 진행되는 교회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최영기 목사님의 기도하는 지도자, 보여주는 지도자, 가르치는 지도자, 위임하고 신뢰하는 지도자로서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가정교회의 정신을 배우기 위하여 2년에 한 번씩 연수를 가기로 작정하고, 2010년에 2차 연수를 갔을 때에는, 목회자세미나 때에 배운 대로 휴스턴서울교회가 어떻게 변화의 8단계를 밟았는지를 보고 다운교회도 그대로 적용할 생각을 하였습니다. 당시에 인상적이었던 것은, 가정교회의 모든 시스템에서 배어나오는 자연스러운 영성과 생활화된 헌신이었고, 또 한 가지는 자신이 다니는 교회인 휴스턴서울교회와 목사님을 좋아하는 모습이었습니다. 2012년 3차 연수 때는, 다운교회의 부목사인 곽우신 목사와 같이 연수를 왔습니다. 휴스턴서울교회에서는 어린이 목장, 청소년 목장이 어떻게 운영되고 있으며 삶 공부 인도자는 어떻게 세워나가고 있는지 등을 배우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연수를 왔습니다. 구체적인 방법들을 배우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큰 배움은 그 사역들 속에 담겨있는 스피릿을 느끼는 것이었습니다. 2015년 과분하게도 휴스턴서울교회 부흥회에서 말씀을 전할 기회를 주셔서, 부흥회에 이어 4차 연수를 계획하였습니다. 당시 휴스턴서울교회는 가정교회로 전환을 한 지 22년이 되는 교회였습니다. 처음에는 플라이휠을 돌리기가 힘들지만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게 되면 플라이휠을 돌리기가 그리 힘들지 않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휴스턴서울교회가 22년 동안 신약교회의 모습을 잘 유지해 왔고, 가정교회가 문화로 정착되기까지 큰 역할을 해왔던 요소가 무엇인가를 정리해보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연수를 계획하였습니다. 휴스턴서울교회는 좋은 교회를 넘어서 위대한 교회라는 생각이 들어서,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라는 책에서 말하는 요소와 연관을 지어 보았습니다. 2022년, 이번에 하게 된 5차 연수는, 지금은 다운교회를 은퇴한 상황이지만, 행복한제자교회의 담임목사로서, 그리고 한국가정교회 사역원장을 맡고 있는 임기 동안에 바르게 정리해 놓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보고 싶은 마음으로 계획을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네 차례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정하고 연수를 왔지만, 이번에는 나름대로 정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을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연수를 하는 중에 ‘휴스턴서울교회가 가정교회를 30년 동안 유지하고 발전하게 된 원동력이 무엇일까?’를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것을 세 가지로 정리해 보았는데, 스스로의 의욕, 분위기, 코치, 세 가지였습니다. 이 세 가지는 다른 무엇을 배워도 꼭 필요한 항목입니다. 공부도 그렇고 스포츠도 그렇습니다. 간단히 예를 들자면, 피겨선수인 김연아, 축구선수인 손흥민도 이 세 가지가 훌륭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인다면, VIP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침례를 받으며, 그렇게 말을 듣지 않고 심지어 대들고 속을 썩이던 목원들이 생명의 삶과 확신의 삶을 공부하여 변화되는 모습을 보면, 그 맛을 잊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 다음 주일에는 드디어 여러분을 다시 만나게 됩니다.
제가 행복한제자교회에 온 이후로, 다운교회 석정일 목사님이 미국에서 하는 따님의 결혼식으로 인해, 제가 대신 설교를 하느라고 두 주일을 비운 외에는 이번이 두 번째로 주일을 비운 것으로 기억이 됩니다. 주일을 비우지 않으려고 작정을 해서였는지, 이번에 세 주일을 연속해서 비우려니 여간 길게 느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마도 주일을 비우는 자체보다는 그 동안 여러분들과 정이 많이 들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한국에 코로나 양성반응이 나오는 사람들의 숫자가 급증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건강하시지요? 이곳 사람들은 거의 마스크를 쓰지 않고 있는데, 왜 한국의 양성반응자가 많은지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상대적으로 사망자 수는 한국이 비율상 매우 낮게 통계가 나와 있더군요. 아무튼 끝까지 지혜롭게 조심하되, 믿음으로 쫄지는 말아야 할 것입니다. 어디에 가나 가정교회 성도들을 보면 정말 멋있습니다. 우선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를 세우고자 열심이 대단합니다. 아마 돈을 받고 하더라도 그만한 열심이 나오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영혼 구원하여 제자 삼는 일’을 자신의 일로 여길 수 있도록 위임하고, 그만큼 신뢰하고 있는 것도 중요한 이유입니다. 아마 그렇게 되는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그러한 분위기 가운데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정교회 안에 들어오는 사람은 으레 예수 영접 모임에 들어가야 되는 줄 알고, 생명의 삶 공부를 해야 되는 줄 알고, 목자와 목녀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살아야 되는 줄 알게 되는 것이 가정교회의 분위기입니다. 목자와 목녀의 삶을 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만큼 하나님의 칭찬과 상급을 받는 일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고, 또한 그를 도와서 주님의 제자가 되도록 돕는 일이야말로 가장 보람된 인생을 사는 길입니다.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면, 가정교회는 지속적으로 멘토링과 코치를 해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목장 모임에서 직접 여러분들이 목자와 목녀의 삶을 통해서 배우고 있고, 삶 공부를 통해서 배우고 있으며, 주일 설교를 통해서 여러분은 멘토링과 코치를 받고 있습니다. 때로는 총목자 목녀 모임을 통해서 그 일이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스스로의 의욕, 분위기, 코치, 이 세 가지는 다른 무엇을 배워도 꼭 필요한 항목입니다. 공부도 그렇고 스포츠도 그렇습니다. 간단히 예를 들자면, 피겨선수인 김연아도 이 세 가지가 훌륭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번에 다섯 번째 가정교회 연수를 와서, 과연 휴스턴서울교회가 가정교회 30년을 계속 발전시켜 온 힘이 무엇인가 여러 모양으로 살펴보았습니다. 결국은 위의 세 가지라고 정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를 이루고자 하는 자신의 의욕,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분위기, 그리고 좋은 코치들. 앞으로 우리 교회도 조만간 가정교회 평신도세미나, 목회자세미나를 통해서 다른 교회들에게 좋은 본을 보일 수 있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인도해 주신 주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며, 여러 선배 가정교회의 도움을 받은 은혜를 보답하는 길입니다. 다음 주에 여러분을 만날 것이 벌써부터 기대가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