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S
말씀
- 진정한 성전의 회복학개 2:20-23오늘부터 살펴볼 학개, 스가랴, 말라기는 포로 후 시대의 선지자들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과 성전의 회복을 선포한 선지자였습니다. 학개의 주요 메시지는 성전 재건을 쉬고 있던 백성들을 독려하여 성전을 완성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의 남은 자들이 예루살렘과 유다에 돌아온 지 얼마 못되어 그들은 성전 재건을 그만두고 하나님의 일을 소홀히 하면서 자신들의 집을 짓는 데 시간을 소모하고 있었습니다. 14년 동안 그들은 하나님을 잊고 살았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학개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성전의 회복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로 이루어진 교회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루신 일을 살펴봅시다. 1. 하나님의 백성을 택하심. 학개의 첫 번째 설교는 백성들이 성전 재건을 게을리 하는 것을 책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성전 건축을 계속 연기하고 있었습니다. “이 백성이 말하기를 때가 되지 않았다. 주의 성전을 지을 때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1:2) 백성들은 자기들의 집에 앉아 그 일을 ‘하고 싶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에 만족하였습니다. 학개는 그들을 나무랐습니다. “너희는 각자의 소행을 살펴보아라.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베어다가 성전을 지어라.”(2:7-8) 오늘날 우리가 힘써야 할 일은 복음을 증거하고 사람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여 주님의 전인 교회를 완성하는 일입니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을, 한 가정이 한 가정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여 교회에 정착시키는 일을 힘씁시다. 매년 이렇게 할 것을 평생 목표로 삼아도 좋습니다. 2. 하나님의 백성을 인치심.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재건하는 일을 위하여 스룹바벨을 택하시고 인을 삼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열방의 세력을 끝이 나게 하시고 “그 날에” 스룹바벨로 “옥새”를 삼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옥새”라는 말은 권위를 상징하며 더 나아가 위대한 다윗의 보증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윗과 스룹바벨의 자손으로 오셔서 하나님의 뜻과 이상을 펼치시는 모든 나라들에게 하나님의 옥새가 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피로 우리들을 사셨고, 우리는 구속의 날을 대비해서 인치심(엡 4:30)을 받은 자들입니다. 인치심을 받은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않도록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위하여 또한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3. 하나님의 백성 안에 내주하심. 학개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신 격려의 말씀에는 이스라엘과 맺으신 하나님의 언약과 그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성이 나타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신이 그들과 함께 머물러 계시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격려가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그 옛날 찬란한 그 성전보다는, 지금 짓는 이 성전이 더욱 찬란하게 될 것이다.”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신약시대의 성도들에게는 구약시대의 성도들이 맛보지 못한 축복이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성령께서 특정한 사역을 위하여 특정한 사람들에게 머물러 계셨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성령께서 모든 믿는 자의 마음속에 내주하십니다. 하나님의 피 값으로 우리를 사셔서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신 것도 감사한 일인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인을 치시고 그 보증으로(고후 1:22)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함께 거하시며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룰 우주적인 교회가 이룰 영광이 구약시대 어떤 성전의 영광보다 클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 교회가 완성될 것입니다.
- 사랑으로 새롭게 해주시는 하나님스바냐 3:14-20오늘 본문을 기록한 스바냐가 선지자로 활동하던 때는 유다 왕국의 우상숭배가 극에 달해 있을 때였습니다. 유다 최악의 왕이었던 므낫세가 뿌린 배교와 문화적 전통으로 인해 나라 안의 형편은 그렇게 악할 수가 없었습니다. 유다 전역에 바알과 아세라 신상을 만들고, 예루살렘 성전 뜰에 일월성신을 위한 단을 쌓았으며, 심지어 성전에 아세라 목상을 세웠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참아보실 수 없을 정도로 엄격하신 분이십니다. 스바냐는 죄악이 가득한 유다에, 그리고 이방 나라들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진노가 있을 것을 예고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실 정도로 사랑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스바냐는 하나님의 진노 그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치료와 축복의 때가 임할 것을 또한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날에 모든 고통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천하 만민 중에서 명성과 칭찬을 얻을 것입니다. 1. 형벌을 벗어나게 해주신 하나님 스바냐서의 처음 부분은 슬픔과 어두움으로 가득 차 있지만, 오늘 본문이 노래하고 있는 것처럼 마지막 부분은 구약성경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다운 노래로 끝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의 날은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고 불의를 행하는 모든 자들에게 심판을 내리는 날이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베풀어지는 날이기도 합니다. 구원의 대상은 결코 이스라엘 백성에 제한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스바냐 시대에 사람들이 악을 행했던 것처럼, 우리 모든 사람들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으로부터 떠나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는 구원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치러야할 죄의 값을 십자가에서 대신 치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의 형벌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2. 우리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 본문의 시작은 ‘노래하라’ ‘기쁘게 부르라’ ‘즐거워하라’는 명령형을 계속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우리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실 것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고서 기뻐하고 반기시고, 우리를 사랑으로 새롭게 해주시고 우리를 보고서 노래하며 기뻐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사람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현재의 구원을 경험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내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께서 매일매일 우리를 주관하시도록 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옛 속성의 권세와 지배에서 자유롭게 해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겪는 시험을 다 경험해 보셨기 때문에, 우리는 은혜의 보좌에 나아가 시험을 이길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면 우리는 시험을 이기는 현재의 구원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3. 그날에 우리를 이끄실 하나님 유다에 임할 진노, 이방 나라들에 대한 진노를 예고했던 스바냐는 끝으로 이스라엘과 열방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그날에 이스라엘은 회복될 것이며 하나님의 정결한 백성들은 그들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을 영원히 모시고 살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 그들은 모든 나라들 가운데 기쁨이 되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이루어주신 것을 노래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주께서 친히 다윗의 보좌에 앉으시는 날에 있을 것입니다. 그날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계 각 곳에서 모여들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존재가 없고 사망과 고통과 슬픔이 없는 곳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주의 날에 이 세상에 다시 오셔서 큰 권세와 영광 중에 다스리게 되실 하나님을 노래합시다.
- 나의 기쁨 되시는 하나님하박국 3:16-19하나님을 마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기독교의 원조가 마치 유대교인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들을 택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나타내도록 한 것은 사실입니다. 즉 그들이 하나님을 신뢰하면 승리하도록 하셨고, 그들이 하나님을 배반하면 하나님은 그들을 어렵게 만드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은 자신을 세상에 알리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사람 모두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신 것을 보면 그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오바댜는 에돔의 운명을, 나훔은 앗수르의 운명을, 하박국은 바벨론(갈대아사람)의 운명을 말하고 있습니다. 요나는 니느웨의 구원을 위해서 외치도록 보내신 것처럼, 하나님은 세상사람 모두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1. 세상에는 이해되지 않는 일이 많습니다. 본문 16절은 하박국 1장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1장의 요점은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하박국의 불평입니다. 하박국의 마음에는 ‘왜?’라는 질문이 떠나지 않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그렇게 무서운 전쟁이 일어나게 내버려 두실까?’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분이면서 왜 그런 광적인 파괴를 막지 않으실까?’ ‘왜 악인이 번창하나?’ 이런 문제들이 늘 하박국의 마음을 괴롭혔습니다. 하박국은 “어찌 … 잠잠하시나이까?”(1:13) 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사람의 머리로는, 더구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렵게 보이는 일들이 아직도 세상에 많이 있습니다. 하박국은 어떤 어려움 속에서나 하나님 앞에 나가 기도하였고 인내를 가지고 하나님의 답을 기다렸습니다. 하나님께 물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대답을 들을 수 있습니다. 2. 그래도 나는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합니다. 하박국은 새롭게 일어나는 강대국 바벨론에 의해 유다가 멸망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마음속에 한 가지 의문이 생겼습니다. ‘왜 유다가 그보다 더 사악한 바벨론에게 침범을 당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다만 악이 악을 이기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박국은 하나님의 답변을 듣기를 원했습니다. 바벨론은 잠시 영화를 누리는 것 같으나 곧 멸망의 운명에 처해질 것이라고 하나님은 대답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오직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2:4)는 핵심적인 말씀도 주셨습니다. 본문 17-18절은 하박국 2장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2장의 요점은 하박국의 불평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즉 악인은 망하고 의인만이 하나님 앞에 남게 된다는 하나님의 대답이었습니다. 이 결론 때문에 우리는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은 나의 힘이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본문 19절은 하박국 3장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3장의 요점은 하나님의 대답을 들은 하박국의 노래입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기도하며 질문한 하박국은 하나님의 대답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대답을 들은 하박국은 절대적으로 하나님 안에 믿음을 두는 것을 배웠고, 또한 사람은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분밖에 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전체 계획을 나타내실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언제나 무엇이나 하나님의 방법이 최선이라는 사실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행복을 원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거룩함을 더 원하십니다. 우리는 안락함을 원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성품이 변화되기를 더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있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힘이 되셔서 우리에게 가장 최선의 것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 주님은 나의 피난처나훔 1:7-8자녀들이 아버지에 대해 두 가지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야 바람직합니다. 하나는, 자녀에 대해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녀의 필요를 언제나 채워줄 수 있는 인자한 아버지의 이미지입니다. 다른 한 가지는, 자녀가 그릇된 길을 가거나 잘못된 길을 가려고 할 때는 엄격하게 다스려주는 아버지의 이미지입니다. 나훔서에는 하나님의 이러한 두 가지 모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더 깊은 죄악에 빠져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고의적으로 거역하는 니느웨를 향하여, 하나님은 심판자로서, 투기하시고, 보복하시고, 격노하시고, 진노하시고, 크신 권능으로 악인을 사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와는 대조적인 하나님의 성품을 또한 노래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아버지로서 선하시고 환난 날에 산성이시며, 그를 의뢰하는 자를 아시는 분입니다. 1. 주님은 선하시다. 나훔 1장에서 하늘의 거룩한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사악한 니느웨 성을 심판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심판자로서 그들을 투기하시고, 보복하시고, 격노하시고, 진노하시고, 권능이 크시며, 악인을 결코 사하지 아니하시고, 분노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아버지로서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선하시고 환난 날에 산성이시고 그를 의뢰하는 자를 아시는 분이십니다. 선한 목자 되신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먹이십니다. 선한 목자가 양떼들을 위하여 가장 좋은 푸른 초장으로 안내해 주고 목이 마를 때에는 물가로 인도해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 우리는 다윗과 같이 노래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 없어라.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신다. 나에게 다시 새 힘을 주시고,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바른 길로 나를 인도하신다.”(시 23:1-3) 2. 환난을 당할 때에 주님은 나의 피할 피난처시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대적하는 나라에,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란 그 나라를 멸하는 것밖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홍수로 니느웨에 종말을 내리시고 니느웨의 이름은 영원히 지워지며 하나님은 니느웨의 무덤을 파시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때로는 환난을 통하여 우리를 겸손하게도 하시고 믿음을 단련하기도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을 테스트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환난을 허락하실 때에 그것을 이길 힘도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노래할 수 있습니다. “내가 비록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주님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나를 보살펴 주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잔칫상을 차려 주시고, 내 머리에 기름 부으시어 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주시니, 내 잔이 넘칩니다.”(시 23:4-5) 3. 주님께 피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보살펴 주신다. 니느웨가 멸망할 때 성 밖에는 수많은 메대 군병들이 무장을 갖추고 군집해 있었습니다. 성읍 안에서는 왕이 뒤늦게 술 취한 신하들을 일으켜 사랑하는 성읍을 방위하려고 했으나 그 때는 이미 티그리스 강이 홍수로 범람하여 그들의 유일한 방패인 성벽을 무너뜨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였지만, 아직 세상은 죄악이 함께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범죄하였던 니느웨가 멸망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 날에 원수를 갚아주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자기에게 의뢰하는 자들을 아시고 그들을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인도하여 주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 사실을 아는 다윗이 노래했던 것처럼, 우리도 노래합시다. “진실로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내가 사는 날 동안 나를 따르리니, 나는 주님의 집으로 돌아가 영원히 그 곳에서 살겠습니다.”(시 23:6)
- 무엇이 진정 착한 일인가?미 6:1-8요즈음 “착한 가격”이라는 단어를 유통업계에서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과연 어떤 가격이 착한 가격일까요? 고객에게 싸게 파는 것이 착한 가격이라면, 생산자에게는 싼 값을 받고 팔아야 하는 나쁜 가격이 될 것입니다. 생산자에게 비싼 가격을 주고 사는 것이 착한 가격이라면, 고객에게는 비싸게 팔아야하는 나쁜 가격이 될 것입니다. 전도를 하다보면, “하나님을 믿지는 않지만, 믿는 사람보다 더 착하게 사는 사람은 어떻게 되나요?”라는 질문을 자주 접하게 됩니다. 이때에 “착하게 사는 사람”이란 과연 어떤 사람일까요? 국어사전은 “착하다”라는 단어를 “곱고 어질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미가서 6:8은 무엇이 진정 착한 일인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1. 공의(公義)를 실천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를 향한 분노를, 미가 선지자를 통하여 알리신 책이 미가서입니다. 어리석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지,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몰랐습니다. 그들은 “내가 주님 앞에 나아갈 때에, 높으신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에, 무엇을 가지고 가야 합니까?” 하면서, 좋은 희생제물, 많은 분량의 제물, 심지어는 맏아들을 바치는 것을 하나님이 좋아하실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그런 제사의 형태가 아니었습니다. 옳고 그른 것에 대한 기준을 하나님의 생각에 맞추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옳다고 하시는 것에 대해서는 순종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죄라고 하시는 것은 버리고 멀리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일치시킬 줄 아는 것이 바로 공의를 실천하는 착한 일입니다. 2. 인자(仁慈)를 사랑하는 것이다. ‘내리사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물론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일에도 힘써야 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물과 같은 성향이 있어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러나 죄로 오염된 사람들은, 자신에게 이익이 될 일을 먼저 추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세력이 있는 윗사람에게 뇌물을 바치기도 하고, 내게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아니면 무시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들에게 최선의 것을 주기 원하십니다. 또한 우리에게도 연약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돌아보고 인자를 베풀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백성들에게서 잔인하게 빼앗지 말고 인자를 베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 즉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경험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기뻐하십니다. 3.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同行)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지는 않지만, 믿는 사람보다 더 착하게 사는 사람은 어떻게 되나요?”라고 질문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것만 빼놓고는, 그 사람보다 착한 사람은 없습니다.”라는 평을 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려야 할까요? 아무리 다른 영역에서 착하다 할지라도,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사람은, 일단 착하다고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마음과 생각대로 하는 것을 ‘자유’라고 말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은, 실은 자유가 아니라 자기 욕심에 끌려 다니는 것입니다. 자기의 욕심을 통제할 수 있는 자유가 진정한 자유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 곁에 있지 않으려고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는 것은 진리를 떠나는 것입니다.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할 때에 우리는 가장 최선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 가서 외쳐라요나 4:1-11사람은 두 마리 개와 산다는 농담이 있습니다. 바로 편견(犬)과 선입견(犬)입니다. 그 두 마리를 오래 데리고 살면 꼴불견(犬)이라는 새끼를 낳는답니다. 요나가 바로 그러했습니다. 요나의 마음에는 ‘니느웨와 같은 이방인들이 무슨 하나님이냐?’는 편견이 있었고, ‘니느웨는 내가 선포해봐야 믿을 인간들이 아니다.’라는 선입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시스로 도망가는 꼴불견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니느웨와 같은 큰 이방의 성읍이 한 외국인 전도자에 의하여 단 며칠 만에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전도자인 요나는 자기 나라만 생각하여, 니느웨가 심판을 면하게 될까 걱정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박 넝쿨을 교보재로 사용하셔서 자기중심적인 요나의 마음을 넓혀주시며,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넓은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1. 요나의 편견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가서 그 성읍에 대고 외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니느웨의 죄악이 하나님 앞에까지 이르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니느웨와 같은 이방인들이 무슨 하나님이냐?’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니느웨 성이 회개하고 돌아섬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게 될까봐 오히려 걱정했습니다. 왜냐하면 니느웨 성을 그냥 두어 그들이 죄 가운데 멸망한다면, 그의 사랑하는 조국 이스라엘은 그 적국의 손에 의해 파멸될 염려가 없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깊은 애국의 정신을 가지고 자기 동족을 구하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려고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좁은 마음에서 비롯된 생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 죄악이 하나님 앞에까지 도달한 사람은 멸망해 마땅한 사람이지만, 한편 구원을 받아야할 불쌍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2. 요나의 선입견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하신 큰 물고기 뱃속에 밤낮 삼일을 있다가 나오게 된 요나에게 하나님은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어서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이제 내가 너에게 한 말을 그 성읍에 외쳐라.” 그러나 요나는 ‘니느웨는 내가 선포해봐야 믿을 인간들이 아니다.’라는 선입견이 있었습니다. 그는 마지못해 그 성에 들어가 하룻길을 다니며 “사십일만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 외쳤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 온 성이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 성이 어떻게 되는지를 지켜본 요나는 심통이 났습니다. 심지어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라고까지 했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박 넝쿨을 준비하셔서 그 그늘이 요나의 머리 위에 그늘이 지게 하셨습니다. 박 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하던 요나는, 벌레가 박 넝쿨을 다 씹게 하셔서 햇볕이 머리에 쪼이자 또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 했습니다. 3. 하나님의 넓은 사랑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마지막 하신 말씀 속에서 우리는 모순된 우리 인간의 마음과 하나님의 넓은 사랑을 배울 수 있습니다. “박 넝쿨이 죽었다고 네가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요나는 우겼습니다. “옳다 뿐이겠습니까? 저는 화가 나서 죽겠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수고하지도 않았고, 네가 키운 것도 아니며, 그저 하룻밤 사이에 자라났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버린 이 식물을 네가 그처럼 아까워하는데, 하물며 좌우를 가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 십이만 명도 더 죄고 짐승들도 수없이 많은 이 성읍 니느웨를, 어찌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 혹시 여러분 마음속에도 요나가 가졌던 편견이나 다른 사람에 대한 선입견이 마음에 있지는 않은지요? 게다가 경제주의, 과학주의, 기술주의로 좁아지고 자기중심적이 되어버린 마음을, 하나님의 넓은 사랑으로 넓히고자 작정하는 이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 택함을 받은 자에 대한 약속오바댜 1:15-21성경의 오바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의 집안 역사를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오바댜는 에서의 후손인 에돔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사람입니다. 에돔은 에서에게서 나온 족속입니다. 장자권을 동생에게 빼앗긴 형 에서와 동생 야곱 사이에 생겨난 적대심은 수 세기 동안 지속되었으며, 이는 에돔의 역사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에돔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으로 가는 도중 에돔을 지나가겠다는 요구를 거절했고, 예루살렘 멸망을 위해 바벨론을 돕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로 큰 민족을 이룰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복을 주시며,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창 12:3)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1. 하나님의 약속 오바댜는 구약성경 가운데 가장 짧은 책입니다. 이 말씀은 이삭의 두 아들 에서와 야곱의 후손인, 에돔과 이스라엘의 종말에 관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와 그를 괴롭히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아브라함을 택하시며 약속을 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은 결국은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인 우리에게 주어진 약속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졌던 모든 축복은 아브라함의 후손인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영적인 후손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계속 이어집니다.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인 여러분께서 이제 아브라함에게 주어졌던 축복을 받아 누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택함 받은 자를 괴롭히는 자의 결말 오바댜서에 기록되어 있는 에서의 산 위에 작은 성읍이 세워졌었는데, 그것은 세계에서 가장 기이한 성 중의 하나이었습니다. 이러한 위치에 서있는 이 성읍은 어떠한 외부의 침략에도 꿈쩍하지 않는 요새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주어질 결과는 “나는 여러 민족 가운데서 너를 가장 보잘것없이 만들겠다. 모든 사람이 너를 경멸할 것이다.”(2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에돔은 예루살렘 멸망을 위해 바벨론을 도운 지 5년만에 바벨론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마카비 시대에는 더욱 심한 적대행위를 하였으며 그 후 에돔은 헤롯을 통하여 유다 지방의 지배권을 획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이 멸망당할 때와 같은 때에 역사의 페이지에서 사라져버렸습니다. 3세기에 와서는 에돔의 언어마저 소멸되어 버렸습니다. 3. 택함을 받은 자의 축복 오바댜서는 시온의 구원에 대한 약속으로 끝이 납니다. “그러나 더러는 시온 산으로 피하고 시온 산은 거룩한 곳이 될 것이다. 그 때에 야곱의 집은 다시 유산을 차지할 것이다.”(17절) 이스라엘은 그들의 본 땅을 찾고 블레셋과 에돔 땅까지도 소유하게 되며 약속된 메시아의 거룩한 통치를 받는 가운데 기뻐하리라고 예언되었습니다. 다른 선지자들과 마찬가지로 오바댜도 주의 날이 임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메시아 왕국이 설립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도 “당신들은 에돔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당신들의 친족입니다. 이집트 사람을 미워해서도 안 됩니다. 당신들이 그들의 땅에서 나그네로 살았기 때문입니다.”(신 23: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어느 누구와도 할 수만 있으면 평화해야 합니다. 믿지 아니하는 세상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심판받아야할 죄인이 아니라 구원을 받아야할 죄인입니다.
- 주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아모스 8:11아모스는 이사야와 같이 나라의 충신도 아니었고, 예레미야와 같은 제사장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다만 보통 목자이었지만 유다 출신으로서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는 일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아모스가 예언을 할 때는 유다의 웃시야 왕과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왕에 의해 크게 번영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러나 평화를 그저 즐기고 향락하는 것만이 그들의 일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오는 위험을 알게 하시려고 호세아와 아모스를 보내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였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 있을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아모스 시대와 마찬가지로 현대인들이 굶주리고 목말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1. 가치관 결여 하나님께서 지적하신 이스라엘의 죄는,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궁핍한 자를 파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까지도 탐내며 겸손한 사람의 길을 굽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법도를 지킬 때에, 사람도 사랑하게 되고 사람들 앞에서 인간의 도리를 지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올바로 깨달은 사람이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고, 하나님의 용서를 제대로 경험한 사람이 이웃을 온전히 용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사람은 진리를 무시하며 분명한 가치 기준을 상실하게 됩니다. 현대인들에게는 가치 기준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귀중한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 값으로 사신 귀중한 존재입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늘 확인하며 가치관의 결여에서 오는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사랑 결핍 양식이 있고 물이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그보다 더 큰 굶주림과 목마름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바른 가치관이 결여되고, 진정한 사랑이 결핍되며, 목적이 불분명해집니다. 아모스는 그 시대의 여인들을 ‘바산의 암소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이 사치와 세상 향락만을 추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복음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사람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로마서 8:32)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결코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때에 우리는 비로소 사랑에 주린 마음과 목마름이 해결됩니다.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시기 위하여 십자가의 고통과 수치를 당하신 주님의 사랑을 깨달을 때에, 우리의 마음에 있는 감정 잔고가 많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3. 불분명한 목적 아모스는 이스라엘이 탐욕스럽고 불의하며 깨끗하지 못하고 불경건하면서도,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백성이라는 것을 구실로 내세우고 있는 것을 지적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며 율법을 알고 택함을 받은 나라였기에 그들의 죄는 더 중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지키는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성회들을 기뻐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공지상주의, 물량주의 속에 있는 현대 기독교인들도 주의해야 할 사항들입니다. 분명한 목적의식이 없으면 형식에 빠져버리기 쉽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외적인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행위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목마름 가운데 있는 자들을 향하여 초청하고 계십니다. 요한계시록 22:17 말씀대로, “목이 마른 사람도 오십시오. 생명의 물을 원하는 사람은 거저 받으십시오.”
- 노아의 홍수는 신화인가 사실인가창세기 7:11-16노아의 홍수 이야기는 교회를 다니지 않고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라고 믿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어떻게 그런 엄청난 홍수가 일어날 수 있는지, 어떻게 그 큰 배를 만들어서 육지의 생물들을 배에 실을 수 있는지, 의심하기 때문입니다. 노아의 홍수는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며 하나님은 우리에게 방주의 문이 닫히기 전에 구원의 방주에 타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깨어있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1. 노아의 방주 1) 방주의 구조와 모양(창 6:14-17) 2) 방주의 비율(창 6:15)에 담긴 비밀 3) 방주가 수용할 수 있는 짐승의 수 2. 홍수 1) 지구 전체 vs 지역적 홍수 (창 6:13, 17) 2) 홍수의 근원 창공 위의 물(창1:7) / 땅 속 깊은 곳의 샘(창 7:11) 3. 하나님이 전하시는 메시지 1) 노아의 홍수 때처럼 지금도 먹고살기 바쁩니다. (마 24:37-39) 2) 가까운 사람이 구원받지 못할 수 있습니다. (마 24:40-41) 3) 하나님이 구원의 문을 닫으십니다. (창 7:16) 4) 우리가 깨어 있기를 원하십니다. (살전 5:4-8)
- 애써 주님을 압시다호세아 6:1-11호세아서의 처음 장면은 호세아가 음란한 여인과 결혼하는 것입니다. 호세아서에는 이상한 사랑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하나님께서 호세아로 하여금 ‘음란한 여자’와 결혼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호세아 선지자에게는 음란한 여자와 결혼할 것을 명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에게 말씀하신 일은 참으로 실행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음란한 여인과 결혼시킴으로써, 이스라엘의 영적인 간음과 하나님의 변함없는 신실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이 책에는 이스라엘의 죄악과 하나님의 거룩하심, 죄로 인해 심판받아야 할 이스라엘과 사랑으로 회복시켜주시는 하나님이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1. 주님께로 돌아갑시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이라고 불리는 열 지파 족속들에게 보내심을 받은 선지자였습니다. 호세아의 아내는 바로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호세아의 아내였던 고멜이라는 여자는 그의 젊은 남편 호세아와 삼 남매를 남겨두고 집을 나가 죄의 물결에 휩쓸려 다니다가 결국에는 종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동안에도 호세아는 줄곧 그녀에게 충실하였습니다. 호세아가 부정한 여인 고멜과 결혼한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불신앙의 이스라엘과 결혼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오늘도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끝까지 하나님을 거부하는 인간의 고집을, 우리는 여전히 주위 사람들에게서 보고 있습니다. 그들이 돌아오기를 끝까지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사랑, 그 덕분에 우리는 주님께로 돌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구원과 아울러 심령의 치유를 받은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2. 주님을 애써 압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아무 가치가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음란한 이스라엘에 대해서 말할 때, 그 원인은 그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부족한 데 있었다고 지적합니다. “이 땅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다.”(4:1) “내 백성이 나를 알지 못하여 망한다.”(4:6)고 하셨습니다. 바른 신앙은 하나님을 올바로 알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는 일로부터 시작됩니다. 최근 오랫동안 한국교회가 성장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통계가 나와 있습니다. 문제는, 교회가 교회다운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교회로서의 기능과 역할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전히 화려한 외관이나 규모를 내세우는 것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방향으로 다시 전환해야 합니다. 지금은 우리가 애써 주님을 알아야 할 때입니다. 3.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영적 배반과 아울러 사회적 도덕적 타락이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심판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지적했습니다. 법을 어기고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은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께 합당치 않은 삶을 살면서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사회적 도덕적 바른 삶을 사는 온전한 신앙을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극복해야 할 문제는 세속화와 다원화입니다. 세속화란 교회와 세상 사이에 구분이 사라져 감을 의미합니다. 다원화는 기독교의 정체성과 독특성이 사라지고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구별이 없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어떤 종교이든 하나님께로 도달하는 길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은, 성경에서 분명히 선포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