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 일터 교회가 오고 있다.(피터 와그너 지음)-세 번째 요약
만약 맘몬이 만들어 놓은 구덩이와 덫을 피할 수 있다면, 안전하게 풍요함으로 갈 수 있다. 비타민을 먹고, 좋은 식이요법을 하며, 건강보조식품을 섭취하며, 매년 건강검진을 하고, 운동과 체중조절을 통하여 육신적인 풍요를 누릴 수 있다. 마찬가지로 기도, 말씀 읽기, 교회 출석, 치유 받고 성령 충만을 받는 것도 계속 유지함으로 영적인 풍요함도 개발해 나가야 한다. 또한 돈과 물질을 관리하는 법을 배우고 부를 증가시키는 것을 배움으로써 물질적 풍요함도 개발해 나가야 한다. 필요를 충족시키는 정도의 물질은 나에게만 충분할 뿐이다. 그러나 부유함의 단계로 가면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고, 그들도 부유해지도록 도울 수 있게 된다. 존 웨슬리의 어록 중 가장 많이 인용되는 것 중 하나는 “벌 수 있는 만큼 벌라, 할 수 있는 만큼 모으라, 줄 수 있는 만큼 주라.”는 말일 것이다. 십일조는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최소한의 것이다. 십일조를 뛰어넘는 헌금이 가난의 영을 깨뜨리고, 번영을 가져올 수 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누가복음 6:38) 이 말씀을 그대로 믿으면 어떨까? 풀타임 사역이라는 풍선 우리의 일이 사역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막는 것 중의 하나는 교회가 계속해서 띄어온 풀타임 사역이라는 풍선이다. 여기엔 신자로서 하나님을 온전히 기쁘게 해드리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목회자, 선교사, 부흥사, 아니면 성경학교 교사나 찬양인도자 또는 다른 적합한 사역자의 지위에서 풀타임 사역을 해야만 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먹고살기 위해서 일주일에 40시간을 직장에서 보내는 것은 하나님의 차선의 계획 정도로만 여겨졌다. 교역자와 평신도의 잘못된 구분 사역은 오직 핵교회에서만 가능하다는 생각은 교역자와 평신도를 잘못 구분하고 있는 말이기도 하다. 리치 마샬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과 그분의 계획을 잘못 표현하는 두 작은 단어들이 사단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몸 가운데에 계급사회를 만들어 버렸다. ‘직업적인 사역’ 또는 ‘전임사역’으로 부름 받은 ‘교역자’와 그렇지 못한 자들, 즉 ‘평신도’라는 두 계급이다. 내가 확신하건대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우리 모두는 ‘전임사역’으로 부름을 받은 자들이다.” 에베소서 4:11-12에 따르면, 사도, 예언자, 복음전파자, 목사와 교사들의 가장 큰 임무는 성도들로 하여금 봉사를 하도록 무장시키는 것이다. 성도들이란 목회자, 음악사역자, 소그룹 지도자, 집회 강사, 주일학교 교사 또는 성가대원과 집사들처럼 교회나 선교단체에서 일하고 있는 자들만이 아니다. 이런 사람들을 합쳐봐야 전체 성도의 20%밖에 되지 않는다. 봉사는 성도들 100% 모두에 의해서 이루어져야만 한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일주일에 하루 교회 올 때만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일주일 내내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일터에서 하는 일들이 바로 사역이 되어야 한다. 버스 운전기사, 정부 공무원, 학교 선생님, 전업주부나 신문기자이건, 그들 모두가 사역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직업과 사역의 차이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당신을 그 일로 이끄시고 당신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기름 부으심을 받고 성경적인 원칙대로 일을 한다면, 이때 당신의 직업은 사역이 될 수 있다.
- 일터교회가 오고 있다.(피터 와그너의 책 두 번째 요약)
제가 자주 나눈 목회철학 중에 ‘하나님의 일’에 대한 부분이 생각나실 것입니다. 그것은 전통적인 생각과는 조금 달리, ‘교회 일’만이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일’도 하나님의 일의 중요한 부분이라는 개념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 성도들이 직장에서 일을 하거나 가정에서 자녀들을 돌보고, 사업을 하거나 학교에서 가르치거나 공부를 하는 것, 심지어 제가 교회 밖의 기업체에서 강의를 한다면, 그것은 ‘교회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을 ‘하나님 나라 일’을 하는 것처럼 한다면 그것은 중요한 ‘하나님 나라 일’입니다. “일터교회가 오고 있다.”라는 책에서는 제가 말하는 ‘교회 일’과 ‘하나님의 일’ 구분을 ‘핵 교회’와 ‘일터교회(또는 확장된 교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이어 계속해서 요약한 내용을 싣습니다. “이 책의 주된 가설 중의 하나는, 두 가지 전제 없이는 21세기의 하나님 나라는 진보할 수 없다는 것인데, 그 두 가지란, 성도들의 일터 사역과 부의 이동이다. 이것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일터 속에서 존경받고 생산적인 일터 사도들의 능력 발휘가 필요하다.” “성경적 세계관을 가진 자들은 가만히 앉아서 먼지만 덮어쓰고 있는 동안, 거룩하지 않은 세계관을 가진 자들은 연료를 듬뿍 채운 채 달리고 있다면, 사회 변혁은 실현되기 어려워진다. 존슨은, ‘교회는 사업하는 성도들에게 다가가, 사업에 대한 성경의 원리를 가르치고, 그들이 성경적 세계관으로 사업을 일으키도록 도와야 한다고 말한다. 기독실업인들이 물질을 쥐게 되면, 돈이 없어 건실한 기독 단체들이 사회에 별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 있는 요즘의 현상들은 단순히 과거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잘되기를 원하시지 가난하게 살기를 원치 않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성경도 하나님을 순종하는 이들이 하나님께 최고의 복을 누린다고 거듭 말하고 있다. 무엇이 하나님께서 주신 최고의 복인가? 한 가지만 보면, ‘여호와께서 네게 주리라고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사 네 몸의 소생과 육축의 새끼와 토지의 소산으로 많게 하시며.’(신명기 28:11) 이 주제는 요한삼서 2절에도 나온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여기에서는 영적, 물질적, 육체적, 그리고 사회적인 면이 있다고 본다.” “내가 풍요가 경건한 축복이라는 것을 단언하기 시작하면서 깨달은 것은, 어떤 신자들은 이런 이야기에 무척 불편해한다는 사실이다. 왜 그럴까? 이는 가난의 영이 종교의 영과 합세해 오랜 세월 영향력을 크게 끼쳐왔기 때문이다. 그 중의 하나가 경건은 곧 가난에 비례한다는 생각인데, 이런 생각은 기독교 주류 교단 안에서 교리처럼 높이 평가되었다.” “만약 우리가 가난의 사고방식에서 번영의 사고방식으로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한다면, 맘몬은 최소한 네 가지 영들과 같이, 경건한 부유함으로 나아가는 길에 구덩이를 파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중 첫 번째는 욕심의 영이다. 욕심이란 물질 소유에 대한 지나친 욕망을 의미한다. 욕심의 영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개인적 안녕이 얼마나 많은 것을 소유했는가에 있다고 믿게 한다. 둘째는 탐욕의 영이다. 욕심의 영은 과도한 부를 축적하게 하는 반면, 탐욕의 영은 가져서는 알 될 것을 욕심내게 한다. 탐욕은 우상숭배만큼이나 나쁜 것이다. 셋째는 인색의 영이다. 인색함은 구두쇠의 영이다. 이 영은 부자로 하여금 구두쇠가 되게 하여, 돈이 있어도 가난하게 살게 한다. 인색한 영에 사로잡힌 자들은 가족 등 다른 이들을 이상하게 가난한 삶으로 끌어들인다. 넷째로 자기의존의 영이다. 돈은 힘을 가져다주기에 모든 것을 스스로 할 수 있다고 믿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교만이요,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다.”
- 일터교회가 오고 있다.(피터 와그너의 책 첫 번째 요약입니다.)
“일터 교회가 오고 있다.”라는 책을 3회에 걸쳐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 책은 일터 교회에 관한 책입니다. 우리는 ‘교회’라고 하면 주일, 새벽기도회, 그리고 수요일저녁에 성도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는 교회를 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일터 교회란 그런 형태의 교회뿐만 아니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성도들이 각자 일터에 흩어져서 세워나가는 교회도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을 간추려서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우리 신자들이 사회 변혁의 실질적인 책임을 다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리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교회론 중에는, 교회를 목적 그 자체로 보는 정통적인 교회관이 있는데, 이를테면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보는 견해 같은 것이다. 그러나 교회를 달리 보는 또 다른 정통 견해가 있는데 예를 들자면, 교회를 하나님의 군대로 보는 견해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교회는 목적 자체가 아니라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이다. 교회는 아담이 사단에게 빼앗긴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를 다시 취하기 위해 영적 전투에 임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는 교회 건물의 사방 벽에 갇혀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껏 갇혀있지도 않았다. 그것보다 훨씬 광범위하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는 어디에 있는가? 어떻게 알아볼 수 있는가? 우선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 나라가 아니다. 국경도 없다. 여권발급도 안 한다. 유엔에 가입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고 설교 때나 쓰는 은유나 상징도 아니다. 만져서 알 수 있을 정도로 확실한 것이다. 우리가 기다려야 하는 것 또한 아니다. 지금 여기 이 땅에 존재한다. 예수를 구주로 인정하는 두세 사람이 모인 곳이라면 존재한다. 그곳에서 예수의 왕 되심과 주 되심을 알게 되고 모든 영광을 주께 돌리게 된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말씀하신 그대로다.” “우리는 교회가 두 형태를 취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하나는 매주일 지역교회에 모이는 회중 모임으로서의 교회이고, 다른 하나는 주중 엿새 동안 일터에 흩어진 성도들의 몸으로서의 교회이다. 그들은 같은 백성 즉 하나님의 백성이다. 히브리 세계관으로 보면 이 두 모습의 교회는 적대적이거나 경쟁적이지 않고 조화롭게 존재하는 한 교회이다. 그러나 기능적으로는 주일에 모인 교회와 주중에 흩어진 교회의 모습이 무척 다르다.” “주님이 꿈꾸셨던 인간 세상은 하늘에 계신 주께서 다스리시는 대로 이루어지는 세상이다. 우리는 그렇게 이 땅에서 살아야하며 또한 하늘 뜻대로 기도해야 한다. 하늘은 평화, 풍요, 건강, 행복, 도덕, 이타심, 안녕, 조화, 이해, 친절 그리고 뜨거운 찬양으로 가득 찬 곳이다. 따라서 우리가 사는 이 사회가 이런 하늘의 모습을 갖고 있지 못하다면, 무언가 주의 뜻대로 살고 있지 못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 신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이 사회가 하나님의 뜻에 합한 곳이 되도록 힘껏 도와야 할 책임이 있다. 이 모든 것을 한 마디로 정리한다면, 오늘날 많이 사용하는 말로 ‘사회 변혁’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 변혁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 중 하나가 지역 사도들의 역할이다. 이들은 하나님께로부터 특정한 지정학적 영역에서 행사할 수 있는 사도의 권세를 받은 자들이다. 어떤 핵교회 사도들은 동시에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지역 사도가 될 수 있음을 나는 의심치 않는다. 일터 교회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은 나로 하여금 강한 결론을 내리게 했는데, 그것은 대부분의 지역 사도들은 핵교회 사도들이라기보다는 확대 교회 사도들이라는 사실이다. 이 말의 의미는 이제 우리는 일터 사도들을 발굴해서, 그들이 할 일을 설명해주고, 그들을 지지해주며, 격려하는 새 과업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비결
인간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 해도 결코 지나침이 없을 것입니다. 무력전쟁, 경제전쟁, 문화전쟁, 그리고 스포츠 정신으로 임한다는 스포츠까지도 지금은 거의 전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다툼의 근원은 욕심입니다. 사람들은 세상과 벗하여 그것들을 얻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욕심이나 세상과 벗하는 방법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는 얻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1. 욕심으로는 얻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조금 더 가지려는 욕심 때문에 다투게 됩니다. 심지어 다른 사람을 죽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습니다. 다툼이나 살인으로 원하는 것을 얻었다 하여도 실상은 더 귀중한 것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욕심을 내어 원하는 것을 얻었다 하여도 양심을 잃고 사람을 잃었다면 그것은 더 큰 것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야고보서 곳곳에 “나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이라는 말을 쓴 것은 야고보 시대에 살던 그리스도인에게 이 글을 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욕심에서 해방된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성화과정 중에 있는, 아직 온전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단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특권을 누리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 구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정욕에 쓰려고 잘못 구하면,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시지 않습니다. 2. 세상과 벗이 되어서는 얻지 못합니다. 세상에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사람들은 세상적인 온갖 꾀를 다 써봅니다. 원대한 꿈을 가지라고 가르칩니다. 깡이 있어야 다른 사람을 이끌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세상은 끼가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이곳저곳에 힘이 될 만한 사람들을 끈으로 가지고 있어야 앞길이 트인다고 말들을 합니다. 그러나 세상과 벗이 되는 방법을 하나님은 미워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자세히 주의하는 꾀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미래를 내다보며 하나님의 나라와 연관된 꿈을 가져야 합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거룩한 깡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대로 전문적인 끼를 발전시켜야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지체가 된 성도들과 좋은 끈을 유지해야 합니다. 3.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는 사람은 마음이 조급해집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신뢰하지 못하면 부정한 방법을 사용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욕심이 그 마음속에 들어차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께 순복합니다. 마귀는 그것을 방해합니다. 마귀를 대적하십시오. 그리하면 마귀가 여러분들을 피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귀를 대적할 수 있는 권한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우리와 가까이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와의 교제를 즐거워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아 누리기 위해서는 손이 깨끗해야 합니다. 마음을 성결케 해야 합니다. 교만한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장벽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겸손한 마음으로 받아 누리는 모든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 우리가 헌금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많은 교회에서 예배 중에 헌금을 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귀한 예물을 드리는 중요한 시간입니다. 그런데 교회를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분이나,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헌금 바구니가 앞을 지나가는 것이 부담이 될 수도 있어서, 우리 교회는 헌금을 하는 시간을 따로 두지 아니하고 본당 뒤편에 있는 헌금함에 자유롭게 헌금을 하고 있습니다. 요즈음은 토요일에 은행이 업무를 하지 않기 때문에 현금을 보관하기 어려워서 계좌이체로 헌금을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헌금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언젠가 구약성경을 읽다가 ‘하나님께서 제사를 드릴 때 왜 제물을 가지고 오도록 하셨을까?’를 묵상한 적이 있습니다. 레위기는 사람들과의 친밀한 교제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람들 사이에도 친밀한 교제에는 ‘오고가는 정’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베풀어주기만 하는 사랑이 아니라, ‘오고가는 정’을 통해 사람들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기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든 것들을 사람들을 위하여 베풀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베푸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 하셨다.”(창1:28)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들을 누리고 다스리도록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도 하나님께 드릴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등 다섯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막힌 담들을 허물 수 있는 의식을 행하도록 하셨습니다. 아울러 일곱 절기를 통해서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오순절, 나팔절, 속죄일, 초막절 등 일곱 절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절기에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제물을 드리도록 하셨습니다. 제물을 드리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법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우리 행복한제자교회 성도님들은 ‘힘에 지나도록 자원해서’(고후8:3) 헌금을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실제로 우리 규모의 교회가 재정적으로 자립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난 주일에 공동의회에서 보신 것처럼, 우리 교회는 현재 재정적으로 자립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재정을 사용하는 것을 우리는 아끼지 않습니다. 또한 존경하는 분을 위해서 재정을 사용하는 것도 우리는 아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의 헌금 수준을 보면, 우리 성도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사람들은 착각을 하게 됩니다. 돈을 비롯한 재물이 생겼을 때에, 마음속으로 “이 재물은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모은 것이라.”(신8:17)고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생각할 것 같아서 걱정이 된다고 말하면서, “그러나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신 그 언약을 이루시려고 오늘 이렇게 재산을 모으도록 당신들에게 힘을 주셨음을, 당신들은 기억해야 합니다.”(신68:18)라고 권면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헌금을 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하나님,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주님, 우리의 마음에 들어오셔서 거해주시는 성령님에게 감사하며, 교회의 필요를 위하여, 또한 선교사나 어려운 사람들을 위하여 사용되기를 바라며 헌금을 하는 것입니다. 이를 기억하면서, 아까워하면서 내거나 마지못해서 하는 일이 없이, 마음에 정한 대로 기쁜 마음으로 헌금에 임하는 것이 헌금의 바른 모습입니다. 그리하여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 연휴 중에 있었던 가장 뜻깊은 일
지난 연휴 기간 중 월요일에 뜻깊은 일이 있었습니다. 서울 다운교회 성도의 부모님이 마산에 살고 계시는데, 설 명절에 부모님께 인사를 하러 왔던 성도가 부모님을 모시고 저희 집을 찾아왔습니다. 어머님은 전에 제가 다운교회를 담임하고 있을 때 오셔서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아버님에게 꼭 복음을 들려드리고 싶어서 우리 집으로 모시고 오신 것입니다. 아버님은 전에 아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에 대해 완강하게 반대하던 분이셨는데, 아들 부부가 믿는 모습을 보면서 지금은 반대까지는 하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밖에서 식사대접을 하는 것보다는 집에서 준비를 하는 것이 감동적일 것 같아서, 저희 집에서 점심을 준비하여 함께 식사를 대접하였습니다. 식사 후에 후식을 나누면서 좋은 분위기에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자녀들이 모두 성장했는데, 그 동안 자녀에게 무엇을 기대하셨습니까?”로 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부모님들의 대답을 모아보면 답은 대개 한 가지입니다. “자식이 잘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님들이 자녀에게 원하는 것이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자녀들과 좋은 관계”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도 이와 꼭 같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행복하게 사는 것을 원하십니다. 둘째는, 우리가 하나님과 좋은 관계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와 자녀가 사이가 좋지 않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 이유는 대부분, 자녀가 부모의 말을 듣지 않아서입니다. 조금 어려운 말로 자녀가 부모에게 불순종해서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죄라고 말합니다. 사람들 가운데 죄를 한 번도 짓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마음에 죄책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고를 당하는 등 좋지 않은 일을 당했을 때, “내게 무슨 죄가 있어서?”라는 질문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죄책감과 아울러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불안감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코로나가 한참 유행할 때에 우리는 마스크를 쓰고 다녔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코로나에 걸릴까봐?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까봐? 궁극적으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죄책감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세상사람 모두가 가지고 있는 두 가지 문제입니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 준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종교의 창시자도, 어떤 위인도 우리의 죄 문제를 대신 해결해 줄 사람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우리의 죄 값을 대신 담당해 주시기 위하여 자신의 몸값으로 우리의 죄 값을 치러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바로 그 일을 해주신 것입니다. 또한 세상의 어느 누구도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준 사람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무덤에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사흘 만에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죄책감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모두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여기까지 설명을 들으신 아버님은 처음에는 주저하셨지만, 저의 안내를 따라 겸손하게 다음과 같이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 저는 죄인임을 시인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저를 사랑하셔서 저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믿고 감사드립니다. 이제 예수님을 저의 구주로 믿고 제 마음에 모셔들입니다. 제 마음에 들어오셔서 제 삶을 인도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 그 죄 값을 예수님께서 몸값으로 대신 치러주셨다는 사실을 믿고, 예수님을 마음에 구주와 주인을 모셔들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 진정한 자녀교육
교육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자질들을 개발하여 온전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획일화된 기준의 평가방식과, 경쟁과 성과 위주의 교육방식이 다양성을 해칠 수 있음을 한 번쯤 생각해볼 수 있도록, 글을 인용하여 소개합니다.(“믿는 부모” 이종철 엮음, 팝콘 북스) “대한민국을 사랑하던 한 독립투사가 죽어서 하늘나라에 갔다. 우리나라가 강대국이 되지 못한 것은 탁월한 과학자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그는 하나님에게 위대한 과학자 다섯 명만 한국으로 보내달라고 졸랐다. 끈질긴 그의 부탁에 감동한 하나님은 마침내 퀴리 부인, 뉴턴, 아인슈타인, 에디슨, 갈릴레이 등 당대의 유명한 과학자들을 한국에 태어나게 했다. 몇 십 년 후, 이제는 대한민국이 강대국이 되었으려니 생각하고 조국 땅을 방문했다가 그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들 모두가 백수로 지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에디슨은 발명은 많이 했으나, 초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특허 심사에서 떨어졌고, 회사에서도 받아주지 않았다. 아인슈타인은 수학만 잘하고 다른 과목은 모두 못했기 때문에 수능에서 번번이 낙방, 대학 문턱도 밟지 못하고 있었다. 뉴턴은 대학 교수들이 그의 논문을 이해하지 못해서 탈락했고, 갈릴레이는 우리나라 과학 정책의 문제점을 꼬치꼬치 따지고 물고 늘어지는 바람에 쫓겨났다. 퀴리 부인은 얼굴이 따라주지 않아 회사에서 받아주지 않았다. 극단적인 일면이지만 한국사회의 모습을 잘 반영하고 있다. 획일화된 성적 지상주의, 대학과 직업의 서열화, 학벌과 배타적 연고주의, 대화와 타협보다는 무조건 복종과 줄서기를 강조하는 폐쇄적 구조 하에서 우리 자녀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능을 포기하고,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에 자신을 맞추어가고 있다. 자기 안에 있는 것이 아닌 외부의 것을 강요받을 때는 행복하지도 않고 성공하기도 힘들다. 실상 경쟁력 있는 것은 자기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것들이다. 자기의 강점을 가지고 승부를 가릴 때 인간은 잘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교육 환경은 자기의 강점이 무엇이고, 재능이 무엇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부모의 욕심이나 염려 또는 잘못된 교육제도 하에서 그 싹이 죽기 쉽다. 이런 현상은 교육학자 리브스의 우화 ‘동물학교’에서 잘 풍자되고 있다. 동물들이 모여 회의를 했다. 그들은 다가올 신세계를 준비하기 위해 학교를 세우기로 결정했다. 달리기, 나무 오르기, 수영, 날기 등으로 교과 과목을 정하고 모든 동물들이 예외 없이 전 과목을 수강하도록 했다. 오리는 수영은 지도교사보다 잘했지만 달리기에서는 매우 부진했다. 달리기 점수가 너무 낮았기 때문에, 오리는 방과 후 공부를 해야 했으며, 달리기 연습을 위해 수영 과목을 포기해야만 했다. 달리기 연습을 너무 많이 한 나머지 오리는 발의 물갈퀴가 너덜너덜해졌고, 이제는 수영 과목에서조차 겨우 평균 점수밖에 얻지 못했다. 토끼는 달리기를 가장 잘했지만 수영연습에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물을 싫어하는 토끼는 거의 신경쇠약에 걸릴 뻔했다. 다람쥐는 나무 오르기 과목은 잘했지만, 무리한 날기 연습 때문에 근육에 자주 경련이 났다. 독수리는 오르기 수업을 할 때, 자기 방식대로 날아서 오르는 것을 고집하였기 때문에 문제아 취급을 당하기도 했다.”
- 구원받은 사실에 대한 열 가지 테스트
요한일서에는 “알고”, “압니다”, “알지” 등의 말로 그리스도인이 알아야할 것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한다.(2:3-4)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 이것으로 우리가 그분을 참으로 알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구원을 받기에는 너무 부족하고, 죄인이어서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도 없는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내어주신 그 사랑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하게 됩니다. (2)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대로 행한다.(2:6) “하나님 안에 있다고 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과 같이 마땅히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은, 죄를 보고 미워하며, 죄를 지었을 때 고백하고 용서받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전진하게 됩니다. (3)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다.(2:15) “여러분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속에는 하늘 아버지(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의 친구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결국은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4) 의를 행한다.(2:29)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의로우신 분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에게서 났음을 알 것입니다.” (5) 습관적으로 죄를 계속 짓지 않는다.(3:6)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마다 죄를 짓지(계속해서 습관적으로 죄를 짓지) 않습니다. 죄를 짓는 사람마다 그를 보지도 못한 사람이고, 알지도 못한 사람입니다.” (6) 기도 응답을 경험한다.(3:22) “우리가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에게서 받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그 자식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기 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에게 가장 유익하고 좋은 것을 주기 원하십니다. (7) 사도들의 말을 순종하는 자세로 듣는다.(4:6)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났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에게서 나지 아니한 사람은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합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알아봅니다.” (8) 성령이 있다.(4:13)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기 영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고, 또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9) 형제를 미워하지 않고 사랑한다.(4:20) “누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보이는 자기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10) 아들을 시인하며 영접한다.(5:12) “그 아들을 모시고 있는 사람은 생명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아들을 모시고 있지 않은 사람은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러한 증거들을 여러분의 마음과 삶 가운데 꼭 가지고 계시기 바랍니다.
-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지혜
2023년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 행복한제자교회 가족들을 지켜주시며, 은혜를 주시고, 평강을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로운 한 해를 어떻게 살아야 할지, 전도서를 통해서 지혜를 얻었습니다.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의 의도를 모르는 사람들은 진정한 인생의 맛을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인생을 사는 동안에 재미있고 편안하게 살 수 있는 행운을 잡으려다가 끝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교제하며 동행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재미보다는 기쁨 솔로몬은 어떻게 하면 인생을 즐길 수 있을까 궁리를 많이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술로, 여러 가지 큰일을 성취해서, 많은 가축 떼 등, 한 마디로 원하던 것을 다 얻었습니다. 누리고 싶은 낙은 무엇이든 삼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결론은 세상 모든 것이 헛되고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재미있는 것을 추구했지만, 결국은 기쁨을 추구하는 것이 진정 보람 있는 일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큰 교회 건물,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교인들의 수평이동을 받아서 짧은 시간에 교인수가 수적으로 늘어나는 현상을 보면 재미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를 통해서 구원받는 영혼들이 없고 기존교인들의 변화가 없으면 기뻐할 수가 없습니다. 교회의 본질적인 존재 목적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 하신 사명에 있기 때문입니다. 편안보다는 평안 전도자는 “기쁘게 사는 것, 살면서 좋은 일을 하는 것,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랴!”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좋은 일을 하는 것은 편안하지만은 않습니다. 좋은 일에는 반드시 수고와 희생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수고하지 않고, 가능하면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찾습니다. 로또, 뇌물, 많은 범죄 사건들이 그로 인하여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선물은, 애쓰고 수고하여 얻은 것으로 즐거워하면서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예수 영접 모임에 사람들을 데리고 가는 것, 목자 목녀가 되어 가정을 오픈하고 VIP를 비롯하여 사람들을 섬겨서 주님의 제자가 되게 하는 것, 이 과정이 편안한 삶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 때에 우리의 마음에는 진정한 평안이 깃들게 됩니다. 편안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평안하게 사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행운보다는 행복 하나님께서 진리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이유에 대해서도, “당신들이 행복하게 살도록 내가 오늘 당신들에게 명하는 주 당신들의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일이 아니겠습니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십니다. 사람들이 행복을 찾을 수 있는 비결은 첫째로, 생수의 근원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둘째는, 우리를 행복하게 살도록 주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켜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행복보다, 행운을 잡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네 잎 클로버를 찾는 것과 같습니다. 네 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운’입니다. 그러나 네 잎 클로버는 기형입니다. 세 잎 클로버가 정상입니다. 세 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복’입니다. 사람들은 기형인 네 잎 클로버를 찾기 위하여, 정상인 세 잎 클로버를 얼마나 밟아버리는지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이 행운을 얻기 위하여 행복을 밟아버리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 2023년 새해를 맞이하면서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추구하는 영역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건강입니다. 아기가 태어났을 때는, 그저 잘 먹고 변을 잘 보는 것을 엄마들이 기뻐합니다. 또래 아이들보다 키가 작으면 마음이 편하지 못한 것도, 자식의 건강을 염려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겠지요. 건강을 원하는 것은 성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늙으면 더욱 건강을 신경 쓰게 됩니다. 90세가 넘은 분들에게, “인생을 다시 살 수 있다면 더 힘쓰고 싶은 일은 무엇입니까?” 하고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재미있게도 가장 많은 답이 “건강을 위해 더 힘쓰겠다.”였다고 합니다. 둘째는, 지적인 성숙입니다. 아기가 태어나서 몇 개월이 지나면 옹알이를 하는 것을 매우 신기해합니다. 돌을 앞두고 말을 하는 아이가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몇 살이 되지 않아 한글을 알고 수를 계산하는 법을 알면 마치 집안에 천재가 태어난 듯이 기뻐합니다. 학교를 다닐 때는 성적, 직장을 다닐 때는 업무능력,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개발을 원합니다. 셋째는, 원만한 대인관계입니다. 붙임성이 있는 아이로부터 시작해서 유치원에서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 자녀가 되는 것을 부모들은 기대를 합니다. 이것은 학교생활과 직장생활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선배들에게는 인정을 받고, 후배들에게는 존경을 받는 탁월한 업무능력과 아울러 원만한 대인관계를 원합니다. 이 세 가지는 인생을 마라톤으로 비유를 한다면, “어떻게(how?) 잘 달릴 수 있을까?”에 해당하는 영역입니다. 인생은 무엇(what?)이며, 왜(why?)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는 다루지 못하고, 다룬다 할지라도 해결책은 어찌 할 방법이 없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바로 영성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고, 인간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에 비로소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네 영역에서 건강하게 성장하셨습니다. “예수는 지혜(지적 성숙)와 키(몸의 건강)가 자라며, 하나님(영적 성숙)과 사람(대인관계)에게 더욱 사랑을 받았다.”(누가복음 2:52) 모세는 나이가 120이 되도록 눈이 빛을 잃지 않았고(몸의 건강),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30일 동안 애곡을 하였습니다.(대인관계)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세워서 이스라엘 자손이 잘 따르게 되었습니다.(지적 성숙) 그리고 모세와 같은 예언자가 다시는 나지 않을 정도로, 주께서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고 모세와 말씀하실 정도였습니다.(영적 성숙) 2022년을 꼭 한 주간 남겨두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한 해는 위의 네 영역에서 어떠했는지 한 번 점검해 보십시오. 그리고 네 영역에 대한 2023년의 계획을 세워 보십시오. •
